
지난해 11월, ‘다시 과학기술인을 꿈꾸는 대한민국’ 국민보고회에서 ‘이너시아’ 김효이 대표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이 말에 이재명 대통령은 “훌륭한 지적”이라고 화답했다.
김 대표 역시 과학고 조기 졸업, KAIST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공계 엘리트다. 하지만 그는 스물네 살에 논문 대신 생리대를 선택했고, 연구실 대신 시장으로 나왔다. 김 대표는 “사회생활 한번 한 적 없는 어린 여성”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한 범생이”라는 편견 속에서도 사업가로서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내가 만든 제품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것’이라는 희망에 밤을 새우며 제품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이너시아는 지난해 매출 약 200억 원을 기록하며 펨테크(femtech·여성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산업) 업계의 선두 주자로 자리 잡았다. 김 대표는 생리대를 시작으로 건강기능식품, 뷰티 디바이스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여성의 삶 속 불편함’을 기술로 해소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24년 포브스코리아가 선정한 ‘30 Under 30(30세 미만의 젊은 리더 30명)’, 2025년 영국 매거진 ‘DAZED’가 선정한 ‘100 체인지메이커(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는 100인의 크리에이터)’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더 많은 도전을 하라는 응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이너시아를 물건 개발과 마케팅을 모두 잘하는 기업으로 키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펨테크 기업 ‘이너시아’의 김효이 대표는 ‘여성의 불편함을 기술로 해결한다’는 철학으로 각종 기업가 포럼에서 연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모범생 김효이, 창업에 뛰어들다
어린 시절 성공한 창업가를 예상했을까요.사실 초등학교 때는 무용수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키 문제로 현실적인 한계를 느꼈죠. 그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모범생’으로 살았어요. 저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게 기본값이에요(웃음). 열심히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고민하다 ‘과학자’를 진로로 선택했죠. 과학, 수학 성적도 늘 좋았고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에 대한 로망도 있었거든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해 2년 내내 물리 현상에 대한 논문 쓰는 것에 집중하며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과학 연구원이나 교수가 된 제 모습을 그렸어요.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값이었던 이유는요.
부모님의 영향이 컸어요. 저는 언니가 둘 있는 막내인데,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 저를 일터로 데리고 가곤 하셨죠. 특히 학자이신 아버지가 국제기구 임원을 만나러 갈 때 저를 데려갔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만난 어른들은 모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었고,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제 기준이 된 것 같아요.
KAIST 입학 후 진로를 바꾼 이유는 뭔가요.
대학교에서 양자물리학을 전공하며 늘 학과 1등을 놓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면역력이 낮아져서 몸이 여기저기 아팠어요. 그래서 입원했는데, 점수가 깎일까 전전긍긍하면서 입원실에서도 과제를 했어요. 그때 한 의사 선생님이 저한테 “이렇게까지 살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죠. 그 말이 계기가 돼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지’를 돌아보게 됐어요.
고민의 결과는 뭐였나요.
제가 과학자를 선망했던 이유는 기술의 선한 영향력 때문이었어요. 과학기술을 개발하면 수만 명을 살릴 수도 있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죠. 그런데 그때의 저는 그런 과학자가 되기 위한 길이 아닌 논문과 성적을 위한 삶을 살고 있더라고요. 진로를 점검한 후 대학원에서 의료 AI 분야를 전공하며 의료기기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게 됐어요.
결정적으로 창업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구실에서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기업들이 제품으로 구현하지 못하더라고요. 좌절하던 차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요. 결국 “우리가 직접 창업해서 기술도 만들고 제품도 만들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렇게 공동 창업자들과 ‘이너시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의료기기’ 사업을 계획하셨다고요.
창업을 결심한 후 KAIST 교내 창업 경진대회에 참가했는데, 처음에는 ‘반려동물 암 치료 의료기기’를 아이템으로 냈어요. 그런데 바로 현실의 벽에 부딪혔어요.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이 암에 걸렸을 때 고가의 비용을 내면서 CT를 찍어 진단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나아가 암 치료를 위해 수백만 원을 쓰는 경우는 더욱 없는 거예요.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우리’의 문제가 사업의 단초
생리대로 사업 아이템을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우리가 직접 겪는 불편함에서 출발하자’고 관점을 바꿨어요. 그리고 우리가 쓰는 물건들, 일상의 불편함을 정리했어요. 이 중에서 시장 규모가 충분하고 우리가 잘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골랐죠. 결론적으로는 가장 시급한 문제를 가진 아이템 ‘생리대’를 제작하기로 했어요.
생리대 아이템에서 시급한 문제점은 무엇이었나요.
생리대 유해성 논란이 반복해서 있었잖아요. 많은 연구에서 생리대에 사용되는 미세 플라스틱 흡수체가 여성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고요. 하지만 시장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겉면만 유기농 소재일 뿐, 내부 흡수체에는 합성 소재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죠. 저 역시 스스로를 꼼꼼한 소비자라고 생각하며 ‘유기농’ ‘친환경’이라는 문구를 믿고 제품을 선택해왔는데, 저도 마케팅에 휩쓸려 소비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포장이나 이미지가 아닌 ‘실제 소재 자체에서부터 차별화를 해보자’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가 친환경 흡수체 ‘라보셀’인가요.
생리대 소재를 조사한 결과, 천연 흡수체는 많지만 여전히 흡수체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화학물질이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빵을 만들 때 유기농 밀가루를 써도 이스트나 다른 재료에 독성이 있다면 그 빵은 독성이 있는 빵인 거잖아요. 생리대도 마찬가지죠. 화학 첨가제 없이 안전한 흡수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1년 동안 공동 창업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병원 수술실의 지혈 소재에서 착안해 ‘라보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너시아가 처음 상품을 출시할 때 와디즈 펀딩 목표 금액의 2만207배를 달성했어요. 폭발적인 반응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희는 제품을 기획할 때 ‘어떤 불편함을 해소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요. 생리통이나 생리 주기, 부인과 질환 등 여성 건강과 관련한 불편함은 매우 흔하죠. 하지만 정작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해결책은 많지 않잖아요. 이를테면 질염에 걸려 병원에 가도 항생제를 주거나 생활 습관을 고치라는 지시가 대부분이고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죠. 시장에서 수요는 있지만 공급은 부족한 ‘그레이 존’이 존재한다고 봤어요. 저희가 개발자이자 동시에 소비자의 시선에서 시장을 파악했던 것이 정확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생리대가 아닌 다른 제품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생리대 브랜드라고 하면 생리대 사이즈를 다양화하거나 기저귀 브랜드를 내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요. 하지만 저희는 핵심 가치에 맞게 ‘시장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죠. 저희의 타깃은 여성 건강에 있어서 불편함이 많은 소비자였어요. 이런 시장의 요구에 맞는 기술들을 연구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건강기능식품과 미용기기로도 제품이 확장됐죠.

“타고난 사업가는 아니에요”
갑자기 사업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놀라진 않았나요.가족들은 제가 충분히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흔쾌히 응원해줬어요. 반면 교수님들께 “생리대 스타트업을 한다”고 말씀드리면 3초 정도 정적이 흐르더라고요. 다들 놀라긴 했지만 이내 응원의 말을 건네주셨죠. 다만 투자자분들이나 공장 사장님들이 저희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셨어요. 다들 입을 모아 “기술 개발해서 제품 만들겠다는 청년들을 많이 봤는데, 좋은 결과를 얻은 친구들을 못 봤다”고 말씀하셨죠.
지난해 11월 이재명 대통령에게 이러한 창업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건의한 장면이 화제가 됐어요.
좋은 기술을 가진 과학자들이 창업에 나서야 우리나라도 해외 빅테크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창업을 결심하기까지의 문턱이 너무 높죠. 실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여전히 냉담하고, 창업 지원 역시 이제 막 시작한 기업보다는 이미 성과를 낸 기업에 더 집중되는 구조예요. 지원이 특정 산업군에 편중돼 있다는 점도 한계고요. 물론 정부 예산이 한정돼 있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새로운 기회가 터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잖아요. 이를테면 국내에 ‘코스맥스’나 ‘콜마’ 같은 기업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K-뷰티 산업의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각 분야에서 ‘퍼스트 무버’가 등장할 수 있도록 보다 폭넓은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 지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에도 창업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요.
돈이 아닌 ‘우리의 기술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보자’가 목표였어요. 그래서 제품 개발을 위해 하는 일들이 힘들지 않았어요. 논문을 연구할 때는 정확도를 1%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이 기술에 대한 흥미를 잃게 했는데, 창업 이후에는 기술이 실제 제품이 되고 그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가 있다는 점이 재밌었어요. 지금도 저는 모든 제품 개발 회의에 참여하며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습니다.
원래 도전적인 성향인가요.
사업을 시작하면서 MBTI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원래는 ESFP였는데 지금은 INTJ가 됐습니다. 원래는 현실적이고 꿈도 크지 않았어요. 저는 사업을 시작할 때 매출이 1억 원이라도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대표님들은 나스닥 상장, 글로벌 진출이 목표더라고요. 대표의 목표가 작으면 회사의 방향과 실행 역시 그 안에 머무른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그래서 사람도 만나고 책도 읽으면서 큰 목표를 상상하고 수립하는 N 성향이 됐죠. 또 대표는 큰 방향을 제시하고, 그에 맞는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는 걸 배우면서 계획적인 사람으로 변했어요.
펨테크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펨테크는 여성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분야인 만큼 시장성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겪는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충분히 성숙한 시장은 아니어서 소비자에게도, 투자자에게도 낯설 수 있다는 점은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험난한 과정에서 사업을 지속하려면 결국 본인이 선택한 아이템에 대한 애정이 가장 중요해요. 저 역시 많은 사람이 회의적으로 바라봤던 고가 생리대 사업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제품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예비 창업가분들은 본인의 아이템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너시아 #펨테크 #김효이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사진제공 이너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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