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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물 & 화제 │ 이 가족이 사는 법

지리산 자락에서 음악과 벗하며 사는 한치영·김경애 부부 & 아들 태주

“태주를 학교가 아닌 자연과 함께하도록 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인 것 같아요”

■ 글·이서영 ■ 사진·박성배

2002. 10. 09

세상의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지리산 자락에서 ‘음악으로 사는’ 한치영 김경애씨 부부와 아들 태주. 기타와 흙피리, 그리고 바람과 계곡은 이들 가족에게 넉넉한 재산이다. 자연을 학교 삼아 소리를 배우고 그것을 음악으로 옮겨가고 있는 이들도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음악과 벗하며 사는 한치영·김경애 부부 & 아들 태주
‘지리산 흙피리 소년.’오카리나(흙피리)를 부는 태주(16)를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경남 함양군 악양면 신흥리, 지리산 자락에 사는 태주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대신 매일 산자락을 오르내리면서 흙피리를 분다. 태주에게는 산과 들, 바람과 계곡이 교과서다. 자식을 세상에 어거지로 꿰맞추지 않고 자신들 역시 마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부모 한치영(47)·김경애씨(46)가 태주에게는 큰 학교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중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그 시간에 음악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거예요.”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은 태주의 선택이었다. 태주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불기 시작한 오카리나에 푹 빠져들었다. 마치 한지가 먹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태주는 음악을 흡수했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제 음악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태주를 보면서 한씨 부부는 ‘아들의 길’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태주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좋은 대학, 좋은 돈벌이’가 기준이 되는 학교 교육은 별 의미가 없겠구나, 판단했죠.”
‘학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분명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태주의 생각이었다. 태주는 음악에 대해 진지했고, 음악 하는 것을 행복해 했다.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결정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인 것 같아요.”
부부는 눈에 띄게 성숙해가는 태주를 보면서 자신들의 판단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한씨 가족의 하루는 겉으로는 헐거워 보이지만 자신들만의 리듬으로 잘 짜여졌다. 그 안에서 태주는 씩씩하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팝 음악을 들으면서 영어공부를 했고, 한자를 익히고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배우기도 했다. ‘섬진강은 흐르고 싶다’란 음악회와 ‘지리산 음악회’ ‘산상음악회’ ‘2001 봄 연어의 꿈’ 등 크고 작은 음악회에 참여하면서 세상에서 지켜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도 배워갔다. 하지만 무엇보다 태주가 열중한 것은 음악공부다. 태주는 매일같이 산에 오르고 계곡에 나 앉았다. 나무와 바람 그리고 새와 물소리를 벗삼아 음악을 듣고 연주했다. 태주가 오카리나를 불고 있으면 간혹 새들이 날아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 3년여 만인 올해 생명의 숨결 가득한 음반 <하늘연못>을 세상에 내 놓았다. <하늘연못>은 태주의 연주를 사랑하는 이들의 후원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소중한 음반이다.

“태주의 음악을 들은 후 태주를 만나본 이들은 다들 깜짝 놀라요. 이렇게 어린 아이의 음악이 왜 그렇게 철학적이냐고들 하죠.”
자연 속에서 흡수한 투명하고 자유로운 영혼 때문일까. 자연뿐 아니라 그의 부모 역시 태주의 자유로운 영혼에 적잖이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아버지 한치영씨는 한때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했다. 여느 사람들처럼 틀 짜인 삶 속에 있었다.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82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후. 음악을 향해 뻗어나가려는 영혼의 촉수를 어쩔 수 없었다. 기타 하나에 목숨을 걸고 잘 나가던 직장도 때려치웠다.
“그때 난 정말 음악이 좋았고 잘할 자신이 있었지만 직장을 그만둘 용기는 없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러더군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남 좋아 보이는 것만 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라고….”
집안의 소개로 선을 보고 그후로 몇번 만난 김경애씨의 말이 그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두 사람의 만남은 도중에 끊겼지만 한씨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경호실을 그만뒀다. 겨울날, 아침에 일어나면 영하 16도의 추위가 마음까지 얼어붙게 하고 4분 간격으로 전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2평짜리 골방. 그는 그곳에서 음악으로 먹고 음악으로 살았다. 동네에서 기타를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받은 돈으로 입에 풀칠을 하고 그외의 시간에는 기타만 끼고 살았다.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서른이 넘어 ‘딴따라’가 되겠다고 나선 아들을 부모님이 용납할 리 없었다. 천하에 불효막심한 아들이 됐고, 김경애씨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려왔다.
“직장 그만두고 집을 나가 음악을 한다고 하니 어찌 지내나 궁금하더라고요.”
김씨는 애써 수소문해 한씨를 찾아왔다.
“하는 말과 사는 모습이 다르지 않은 정직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뭔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고 창의적이었고요.”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던 김씨에게 자신의 꿈을 위해 세상의 옷을 훌훌 벗어던진 한씨의 삶은 의미있게 다가왔다. 골방에서의 만남 이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결혼했다. 생계는 무대책이었다. 집안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첫 만남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김씨의 부모 역시 결혼에 반대했다.
“덕분에 제주도에서 신혼여행을 제대로 즐겼죠.”
신혼여행을 간 두 사람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서 염치 불구하고 한달여를 버텼다. 돌아갈 집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 지인의 도움으로 경기도에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서야 제주도를 떠날 수 있었다.
“열심히 음악 공부를 하고 음반을 내면 금방 생활이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첫아이가 태어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무일푼이었다. 출산 축하 방문객들이 십시일반으로 병원 퇴원비를 조달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아차!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여기저기 도움을 받아 기타교실을 시작한 두 사람은 그런대로 돈을 벌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간중간에 음악공부를 하는 것으로 생활의 고통을 위로했다. 김씨 역시 건반주자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디사이저를 구입해 함께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럴수록 음악에 대한 갈증은 더 커졌다.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의왕시 청계산에 있는 후배 집에 놀러 갔다가 한밤중에 산에 홀려버렸어요. 자다가 밤중에 일어났는데 적막한 가운데 들리는 산의 소리가 마음을 마구 흔들더군요.”
한씨는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나 2년만 여기서 음악 공부하면 정말로 음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김씨는 그 말에 기타교실이며 집을 정리하고 태주를 데리고 청계산에 들어갔다. 하지만 청계산에서 음악공부를 하면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음반제작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박대만 당했다. 상심해서 돌아온 그는 혼자서 며칠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기타 반주에 음악을 담았다. 그리고 당시 안양에 있던 음반제작사 오아시스를 노크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제작사에서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왔다.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뻤다.
“첫 음반이 나오고 처음 3개월 동안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더라고요.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 위대하게 느껴지던 제 음악이 너무도 형편없이 들리는 게 아니겠어요.”
세상에 ‘한치영’ 이름 석자 박힌 음반이 나온 것으로 공부가 다 된 줄 알았던 그는 오만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고 갑갑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후 그들은 청계산을 떠났다. 진정한 음악과 마음자리를 찾아 떠도는 이 가족의 유랑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삶과 음악의 새로운 속살들을 만나게 된다. 충청도 덕산의 문화공동체를 거쳐 옮겨간 강원도 강릉의 한 농촌에서 진지한 삶의 결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과 논, 밭을 갈고 여름엔 바닷가에서 장사를 하면서 몸을 움직여 하는 노동의 진실함과 상쾌함, 사람들 사이의 질척한 감정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약한 베짱이’를 졸업하고 진짜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얻었다. 강릉을 떠난 그는 무등산 자락 빈집에 터를 잡았다. 전남 화순군 수말리에서 보낸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땔나무를 해서 방에 불을 넣고 얼음장을 깨 빨래를 했다.
“유난히 햇빛이 눈부신 겨울날이었어요. 산에서 나무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물었는데 찬물에 손 담그고 빨래하는 집사람이 보였어요. 겨울 햇빛은 따뜻한데 한없이 시려 보이는 아내의 손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곧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과 삶의 애틋함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 그는 그렇게 외롭고 힘든 시절에 미친 듯이 음악에 빠져들었고 나름대로 행복했다. 하지만 다시 떠나야 했다.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했기 때문. 육지에서의 방랑을 끝내고 싶었다. 더 이상 음악의 상업적 시스템에도 기대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은 다음 거처를 섬으로 정했다. 완도 청산도로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완도로 가던 중 너무나 근사해 보이는 두륜산을 구경하자고 해서 들른 해남 땅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죽염을 구웠고 태주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태주는 날이면 날마다 들판으로 쏘다녔다. 태주를 초등학교에 보낸 것은 또래들과 함께 즐겁게 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고 그런 의미에서 태주의 초등학교 시절은 성공적이었다. 죽염을 굽는 일은 나름대로 돈벌이가 됐다. 그렇게 죽염을 구어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자비로 음반을 내고 그 음반을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나눠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마자 2집 제의가 들어왔다. 첫 음반인 <할미꽃> 작업을 함께했던 세션맨들이 음반을 내주겠다고 한 것. 한씨는 2집 <이것 참 잘돼야 할 텐데>를 내고 대학로 등 거리에서 대중을 만났다. 삶과 가슴 깊은 곳에서 뽑아내는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장인, 장모를 돌보기 위해 경기도 광명으로 삶터를 옮겼다.

태주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날마다 들짐승처럼 들판을 쏘다니던 태주도 도시에 오자 ‘텔레비전 키드’가 됐다. 일일연속극의 줄거리를 쫓아가는 태주를 보면서 김씨는 ‘아차!’ 싶었다. 태주를 TV 앞에서 끌어내야 했다. 한번 들으면 금방 아버지의 노래를 따라 부를 정도로 음감이 뛰어난 태주를 위해 경애씨는 오카리나를 선물했다. 오카리나는 유럽에서 사랑받는 악기지만 그 뿌리는 한반도에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이웃마을과 연락을 주고 받기 위해 만들어 불었던 오래된 전통 악기다. 태주는 곧 그 청아하고 깊은 소리에 빠져들었다. 다른 이들의 곡을 연주하다가 어느새 스스로 곡을 만들어 보곤 했다.
농촌냄새가 그리웠던 한씨는 양평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3집 <아, 해남>을 발표했다. 상업적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기타를 메고 공연을 떠나곤 했다. 그의 옆에는 오카리나를 챙긴 태주와 아내 김씨가 늘 함께했다. 한씨의 무대에서 수줍게 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한 태주는 공연이 거듭되면서 사랑받는 연주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타를 메고 길 위에서, 혹은 자연에 머무르면서 만난 사람들은 한씨에게 모두 음악적 화두가 됐다. 민족의 기상을 노래하게 한 동국대 윤명철 교수나 역사의식을 일깨워준 동이학교 박문기 선생님은 그의 음악에 깊이를 더했다.
“윤명철 교수님이 만주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쓴 고구려 시를 들고 저를 찾아 오셨어요. ‘10년 전에 당신이 음악 공부한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하고 있으면 제대로 하겠구먼. 이 시들로 곡 좀 만들어보면 어떻겠소’ 하시더군요.”
4집 <광개토대왕>은 그렇게 탄생했다. 음반이 나오기 전부터 그는 크고 작은 음악회에서 자신이 만든 ‘고구려’를 노래했다. 윤교수의 말처럼 이 노래들은 IMF로 힘이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힘을 줬고 한씨 역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속 깊이 가라앉았던 용기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진실을 만들고, 생명을 찾고, 삶을 위로하는 현장의 무대들’에 끊임없이 서면서 지치기보다는 오히려 더 활력을 얻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곁에서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태주 역시 그에게 큰 힘이 됐다. 현장의 무대들은 한씨나 태주에게 새로운 음악과 더 의미 있는 인연들로 나아가는 통로였다.
“지난해 봄 광양의 청매실 농원에서 보름 동안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것을 계기로 악양과 인연을 맺게 됐죠.”
당시 그는 순창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공연을 본 악양 토박이 중 한 사람이 악양에 들어와 살지 않겠냐고 권했다. 지리산 자락의 맑은 기운이 감도는 악양에 사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태주는 자연이라는 커다란 학교를 얻었고 한씨 부부는 생명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계곡의 깊은 소(沼)에서 목욕을 하고, 하늘 아래 가장 투명할 것 같은 새벽이슬의 생기도 맘껏 누렸다. 태주는 지리산 자락에서 음악과 생각의 키를 훌쩍 키웠다. 산양처럼 뛰어다니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슴도 넓어졌다.
한씨 가족이 사는 악양에는 가끔 세상살이의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찾아오곤 한다. 한씨 가족은 그들과 함께 아주 소중한 물결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현대문명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온전하게 돌려놓기 위한 작은 시작을 꿈꾸고 있는 것. ‘온우리’ 운동이라 이름 붙이고 서로 모여 이야기하고 노래도 부르는 작은 행사를 몇 차례 가졌다. 태주는 누구보다 그런 일이 신난다.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한씨는 ‘생명’이 살아있는 태주의 음악이 ‘영혼’을 찾으려 하는 이들에게 작은 불빛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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