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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격’ 헤로인 ‘칼린 쌤’ 박칼린에게 궁금한 것들

글·정혜연 기자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출판사 달’ 제공 || ■ 참고도서·그냥(출판사 달)

입력 2010.12.16 16:34:00

지난여름 대한민국은 이 한 사람의 지휘봉 아래 울고 웃었다. KBS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 - 남자의 자격’에서 오합지졸 아마추어 합창단을 쥐락펴락하며 조련한 음악감독 박칼린. 무섭게 날카롭다가도 한순간 인자한 모습으로 변하는 그를 보노라면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절로 들었다. 최근 그는 에세이집 ‘그냥’을 펴내 팬들과 소통에 나섰다.
‘남자의 자격’ 헤로인 ‘칼린 쌤’ 박칼린에게 궁금한 것들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했다. 지난 7월 KBS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 -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을 만들기 위해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들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두 달 뒤 이들이 완전한 합창단의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한목소리를 냈을 때 사람들은 감격의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남자의 자격’ 합창단은 꽤 오랫동안 화제에 올랐고, 그중 더러는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그 중심에 이들을 진두지휘했던 박칼린(43) 음악감독이 있었다.
언뜻 봐도 보통은 아닐 것 같은 눈빛의 소유자인 박칼린은 방송 초부터 오디션을 보러 온 멤버들을 하나하나 날카롭게 바라보며 진지하게 평가를 내렸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서 ‘도대체 누구지’ 하는 의문을 가졌고 덕분에 그는 방송 내내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에 대한 정보라고는 뮤지컬 ‘명성황후’ ‘페임’ ‘오페라의 유령’ 등의 음악감독을 맡았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인터뷰를 꺼려하는 터라 몇 개 매체를 제외하고는 그에 대해 탐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 중순 그가 에세이집 ‘그냥’을 내고 자신을 조금 내보이며 사람들의 곁으로 한발 다가섰다.

뮤지컬, 운명처럼 다가와 삶의 전부가 되다
박칼린은 국내 뮤지컬 음악감독 1세대. 1996년 초연된 뮤지컬 ‘명성황후’에 들어갈 음악을 만들어 실력을 인정받은 후 지금까지 뮤지컬 음악감독이라는 타이틀로 살아오고 있다. 지금은 무대 뒤가 익숙한 박칼린이지만 그도 원래는 무대 위에 섰던 사람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칼린은 70년대 초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부산 초량에서 몇 년간 살 때 그는 처음으로 음악을 접했다. 당시 그의 집 근처 초량시장에 무용 견습소가 있었는데 그 안에 피아노실이 있었다고. 무용을 배우러 갔던 그는 피아노실에 난로가 있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따뜻한 곳에 있고 싶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아홉 살 때 고향인 LA로 돌아가 바이올린을 하던 언니의 권유로 첼로를 배웠다. 그는 “자세부터가 불편한 피아노보다 첼로가 몸에 자연스레 흡수되는 듯해 내게 참 잘 맞는 악기였다”고 회상한다.
첼로는 박칼린이 음악에 눈을 뜨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에 사는 동안 영어를 잊었던 그는 다시금 미국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연히 첼로에 몰두하게 됐다. 서서히 실력이 쌓이자 학교 오케스트라에 발탁, 연주에 참여하는 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 연극부와 합동공연을 하면서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연극반 담임이었던 미스터 영 선생이 조용히 앉아 첼로를 연주하는 그를 눈여겨봤고 연극에 투입시킨 것. 그때 박칼린은 1인5역을 연기하며 처음으로 뮤지컬 무대에 섰다.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미스터 영 선생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준 것에 대해 “그는 내가 이러한 길을 반드시 갈 거라든지, 아니면 가야만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저는 누구보다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어요. 말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영 선생은 그런 절 눈여겨보았고 제게 스스로 빛이 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힌트를 주셨어요. 그때 무대에 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첼로는 그럭저럭 잘 켜는 연주자가 됐겠지만 인간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건 알지 못했을 거예요.”
캘리포니아대에서 첼로를 전공한 그는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에서 국악작곡 석사 학위를 땄다. 한국 생활을 시작하며 틈틈이 정극, 뮤지컬, 음악극, 무용(작곡) 등 기회가 주어지면 가리지 않고 공연에 참여했다. 대학원 세미나에서 우연히 만난 판소리 명창 박동진 선생의 눈에 띄어 소리를 배울 기회도 얻었다. 그의 이런 삶의 궤적은 자연스레 음악을 중심으로 뮤지컬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사람, 소중한 인연을 통해 삶을 배우다

‘남자의 자격’ 헤로인 ‘칼린 쌤’ 박칼린에게 궁금한 것들




‘남자의 자격’ 합창단 편이 방송되는 동안 ‘박칼린 리더십’ 또한 화제가 됐다. 그는 소통과 신뢰 속에 자율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각자 맡은 임무를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또 한 가지,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중요시하고 사람이 바탕이 되는’ 합창단이 되길 주문했다.
“20년 동안 일하면서 사람 보는 눈이 생겼어요. 전 오디션 때 늘 기술보다 인격과 인성을 보려고 해요. 사람이 안 돼 있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다한들 결과가 좋지 않기 때문이죠. 뮤지컬은 모든 것을 최소로 압축해 통합시킨 장르예요. 음악을 연주하는 인원도 오케스트라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이 중요하죠. 스태프는 배우를, 배우는 스태프를 항상 소중히 여기라고 강조하죠.”
뮤지컬 배우들 사이에서는 그를 두고 공공연히 인정하는 하나의 정설이 있다. ‘칼린 쌤은 누구든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곧바로 사람의 성격과 인성을 꿰뚫어본다’는 것. 그 역시 “노래를 듣지 않아도 문만 열고 들어오면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고 말한다. 수년간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좋은 작품을 위해선 좋은 사람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그가 이러한 철학으로 발굴한 배우들은 현재 뮤지컬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그중 배우 조승우도 있다. 박칼린은 조승우에 대해 “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하는 배우”라고 평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6년 뮤지컬 ‘명성황후’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고 재공연에 들어가면서 고종 역할을 할 배우가 필요했다. 박칼린은 적절한 배우를 찾기 위해 다른 뮤지컬 작품을 관람하며 사람들을 조용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의형제’라는 작품을 보러 갔고 그중 ‘떠벌이’ 역할을 맡은 배우가 기억에 남아 ‘명성황후’ 제작사 대표에게 그를 추천했다. 알고 보니 그는 제작사 대표의 학교 제자였는데 오디션을 보는 과정에서 박칼린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아 고종 역할에 캐스팅됐다.
“승우는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는 데다 굉장한 노력파여서 연습을 하는 동안 제가 더 좋은 음악인이 되도록 긴장시켰어요. 이후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고 몇 년 뒤 승우는 영화와 뮤지컬 쪽에서 대스타가 됐죠. 그는 누가 ‘발견’할 그런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모든 걸 다 하는 사람이에요. 혼자서 뭔가를 끊임없이 개척해나가기 때문에 저는 그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만 도움을 줄 뿐이죠. 이렇게 멋진 친구들을 만날 때면 저 또한 굉장한 자극을 받아요.”
박칼린은 언제 어디서 좋은 사람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열어둔 채 삶을 살아간다. 타인을 위한 배려가 몸에 밴 것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통해 교육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에서 ESL 교수로 일했는데 때문에 주변에 늘 외국인 유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남자의 자격’ 헤로인 ‘칼린 쌤’ 박칼린에게 궁금한 것들


“어머니는 자신의 학생들 중 어리거나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학생, 특별히 신경 쓰고 싶은 학생이 있을 때 우리 집에 하숙을 시키셨어요. 저희 세 자매는 어린 시절 다양한 인종의 언니 오빠들과 수년을 함께 살았죠. 저녁식사 시간에는 원형 식탁에 둘러앉아 꼬박 3시간씩 식사를 했는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엿볼 수 있었어요. 하루는 여자와 남자의 역할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는데 브라질, 멕시코에서 온 남학생들이 남성우월주의자로 일본 여학생에게 ‘여자의 영역’을 가르치려 하자 멕시코 여학생이 ‘공룡시대에 살고 있냐’며 문화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죠.”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동서양의 문화를 체득하고, 다양한 만남을 통해 인생의 폭을 넓힌 덕분에 박칼린은 지금 현재 ‘좋은 리더’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의 자격’, 예능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가슴에 박히다

‘남자의 자격’ 헤로인 ‘칼린 쌤’ 박칼린에게 궁금한 것들


지난 6월 박칼린은 ‘남자의 자격’ 제작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연기자들과 함께 9월에 열릴 거제전국합창대회에 나가주실 수 있을까요?”
일복 터진 인생, 언제나 잠시 쉴 짬조차 내기 어려웠지만 신기하게도 때마침 2~3개월간 스케줄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작품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시간이 비어 있는데 없다고 거짓말할 수 없어 승낙을 했다”고 한다.
“예능프로그램은 평소 거의 보지 않아 ‘남자의 자격’을 찾아봤는데 ‘이경규 쌤’이 출연하시더라고요. 오래전 무대 뒤에서 그분을 뵀는데 앞에서는 코미디를 하시고 뒤에서는 너무나 진지하게 계시는 모습이 뇌리에 박혔었죠. 경규 쌤, 도전, 음악이라는 코드가 흥미롭게 다가와 승낙을 했어요. 제작진에게 내 군단을 끌고 갈 것, 일부러 각본 짠 예능은 안 할 것이라는 두 개 조건을 걸었는데 그들도 오케이를 했죠.”
뮤지컬 업계에서는 6~8주의 짧은 시간 안에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방송을 위해서도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여덟 번이 전부였다. 박칼린은 “여덟 번의 연습으로 오합지졸을 무대 위에 올리기란 불가능해 보였기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어진 연습시간을 100% 활용했고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던 사람들까지 점차 진지한 눈빛으로 박칼린의 지휘를 따라갔다.
‘남자의 자격’ 최고의 히트곡은 ‘넬라 판타지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칼린은 선곡에만 한 달을 보냈다고 한다. 온갖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수많은 상황 속에서 곡을 추리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릿속에 ‘넬라 판타지아’가 남아 있었다고. 그는 ‘명성황후’의 편곡을 담당했던 호주 유명 음악가 피터 케이시에게 편곡을 요청했고 합창단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곡이 탄생했다. 그리고 합창대회 직전까지 박칼린을 비롯한 멤버 전원은 연습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슨 하모니냐~”며 지루해했던 이경규도 연습을 하면서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그리고 이거 나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다고. 합창에 참여한 모든 멤버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졌고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거제도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노래연습을 혼자 하기 시작하면 옆에서 차곡차곡 음을 쌓기 시작했고 그게 또 한 번의 전체 연습이 되곤 했다. 박칼린은 이들이 들뜨지 않도록 휴대전화 사진 찍는 것조차 자제하도록 당부했고, 무대에 오르기 전에도 “우리는 프로입니다. 어떤 반응에도 움직이지 말고 자기 자리에서 기다려야 하고 흐트러짐 없이 집중해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는데 이를 어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관객의 환호와 박수는 연예인의 등장에 치는 박수가 아니라 죽어라 연습한 아마추어 합창단에게 ‘너희들 해냈구나’라는 응원과 격려의 박수였어요. 무대생활을 30년 했지만 이런 감동은 처음이었습니다. 무슨 느낌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후유증이 커서 어떻게 이걸 싹 접어두고 다른 작품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른 작품으로 넘어갈 때 클렌징 기간을 갖는 데 한 3~4일 여행을 하며 전 작품을 씻어내거든요. 이번에는 잘 안 가시네요. 혹시나 내가 다음 작품에서 이런 감동을 또 기대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살짝 들어요. 그만큼 이번에 느낀 감동은 크고 낯설고 뜨거웠습니다.”

‘남자의 자격’ 헤로인 ‘칼린 쌤’ 박칼린에게 궁금한 것들

1 그의 나이 스물일곱. 엄마와 여행길에 찍은 사진. 2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똑 닮은 세 자매. 현재 언니들은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매년 만나 수다 떠는 시간을 꼭 갖는다. 3 중학교 때 음악을 가르쳐준 은사들과 함께.



여성동아 2010년 12월 5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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