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ENCIAGA
1967년 이후 무려 54년 만에 열린 발렌시아가의 오트 쿠튀르 쇼를 위해 안나 윈투어, 카니예 웨스트, 벨라 하디드까지 세기의 패션 피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패션 하우스의 전통적인 살롱을 옮겨온 듯한 런웨이에는 그 어떤 배경 음악 없이 묘한 긴장감이 흘렀고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포플린 셔츠, 실크 넥타이, 가죽 장갑 등 창립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이니셜 C. B.가 새겨진 메종의 상징적인 아카이브 룩이 줄지어 등장하며 적막을 깨트렸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는 이번 시즌 컬렉션에서 과장된 디테일과 건축적인 실루엣 등 본인의 주특기와 동시대적인 코드를 반영한 쇼피스를 통해 브랜드 창립자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오트 쿠튀르 역사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특히 54년 전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선보였던 마지막 쇼피스 웨딩드레스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룩은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과거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도 늘 현재를 사는 뎀나 바잘리아의 마법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이유다.CHANEL
“1880년대에 유행한 모노톤 드레스를 입은 가브리엘 샤넬의 자화상을 처음 본 순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떠올랐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가 공개한 쇼 노트 속 문장처럼 이번 컬렉션은 베르트 모리조, 마리 로랑생, 에두아르 마네 등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부터 접근했다. ‘가브리엘 샤넬: 패션 매니페스토’ 전시가 열리고 있는 파리의 의상 박물관 팔레 갈리에라에서 펼쳐진 이번 런웨이에는 담대한 붓 터치가 느껴지는 트위드 코트, 예술 작품같이 반짝이는 시퀸 소재 머플러, 플라워 장식을 더한 드레스까지 그야말로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이 연상되는 피스들이 줄지어 등장했고, 매번 웨딩드레스로 끝을 맺는 쇼의 클라이맥스 피날레 룩은 배우 마거릿 퀄리가 장식했다. F/W 시즌이 무색할 만큼 따뜻하고 화사한 파스텔컬러 팔레트로 힘든 시기에 지친 관객들에게 낭만적인 위로를 선사한 버지니 비아르. 그녀는 위기 속에서 패션이 우리에게 주는 순기능이 무엇인지 고민한 듯 보였고,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헤리티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컬렉션으로 오트 쿠튀르 강자의 자리를 지켰다.CHRISTIAN DIOR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가상 세계가 주목받는 지금, 현실의 존재를 강조하고자 로댕 미술관으로 관객들을 초대했다. 자수 장식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공간에서 펼친 이번 컬렉션은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든 섬세한 텍스처의 코트,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라마틱한 핸드메이드 드레스, 숄더와 버스트라인을 깊게 커팅해 데콜테가 드러나는 드레스 등 직접 보고 듣고 몸으로 느껴야만 공감할 수 있는 정교한 쇼피스를 차례로 선보이며 매순간 압도적인 무드를 자아냈다. 동시대의 현란한 테크닉을 사용하지 않고 공방 장인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담긴 제작 방식이 쿠튀르에 등장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이번 시즌은 좀 더 대담하게 활용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둘 만하다. 특히 시스루 패브릭 위에 깃털을 수놓은 낭만적인 피날레 룩의 잔상은 지금까지 이어질 정도로 강렬했다.FENDI
펜디 하우스에 합류한 뒤 두 번째 쿠튀르 쇼를 선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킴 존스는 이탈리아 시인이자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시선을 빌려 런웨이를 펼쳤다. 로마의 역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파솔리니의 정신을 다채로운 실루엣과 컬러로 구현해낸 것. “과거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곳에 살았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며 쇼 노트를 전한 그는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로마의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을 구성하는 요소를 압축한 룩으로 공간을 채웠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마블의 텍스처를 모티프로 한 트롱프뢰유 실크 드레스, 펜디 사옥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의 아치를 연상시키는 슈즈의 힐,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제작한 주얼리 등 룩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식적 요소에도 수많은 문화가 교차했던 고대 로마의 모습을 투영시켜 새롭게 재해석했다. 이토록 매혹적인 쇼를 보다 밀도 있게 감상하고 싶다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서스페리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가 제작한 패션 필름을 찾아보길 추천한다. 로마의 현재와 과거로부터 찾아낸 펜디의 새로운 비전을 특유의 서정적인 무드로 풀어낸 영상물로 펜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GIAMBATTISTA VALLI
로맨티시즘의 대명사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트렌드와 상관없이 본인만의 세계를 굳건히 지켜내는 디자이너지만, 이번 시즌에는 기존과 사뭇 다른 무드를 선보이며 새로움을 추구했다. 팬데믹 시대에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현재 상황을 ‘Le gout du louche(위험에 대한 취향)’이란 테마에 담아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 것. 시폰 소재를 층층이 쌓아 올린 멀티 레이어링 드레스, 로맨틱한 디테일의 튈 소재 드레스, 깃털 장식 드레스 등 그의 장기인 로맨틱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시그니처 룩을 활용한 것은 동일했지만 풍성한 깃털로 장식한 셔츠와 턱시도, 슈트와 케이프를 매치한 룩 등을 통해 남성들에게 패션 판타지를 부여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특히 장례 미사에서 주로 쓰이는 모차르트의 ‘라크리모사(눈물의 날)’를 배경 음악으로 선택해 대서사시의 정점을 찍은 것은 신의 한 수.JEAN PAUL GAULTIER
지난해 오트 쿠튀르 쇼를 마지막으로 단독 쇼를 은퇴하고 매 시즌 게스트 디자이너와 함께 캡슐 컬렉션을 발표하겠다고 선언한 장 폴 고티에. 그가 첫 번째 파트너로 선택한 주인공은 컬래버레이션의 귀재로 등극한 사카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베 치토세였다. 고티에는 기존 컬렉션의 가치를 뛰어넘는 새로움을 포용하기 위해 그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그 결과 고티에 전성기 시절의 시그니처였던 코르셋부터 패브릭을 여러 겹 겹쳐 만든 드레스, 해체주의적인 실루엣이 돋보이는 항공 점퍼, 드레스로 변형시킨 트렌치코트 등 두 디자이너의 코드가 조화를 이룬 룩이 탄생했다. 해체와 분해를 통해 건축적인 형태의 옷을 완성하는 일에 탁월한 사카이의 기술력이 장 폴 고티에의 아카이브에 스며들어 세기의 컬렉션이 탄생한 것. 이번 쿠튀르 쇼를 기념하기 위해 출시한 기성복 컬렉션은 오픈과 동시에 완판의 쾌거를 이뤘고, 두 브랜드의 가치를 높인 결과물로 찬사를 받으며 이 둘은 최고의 듀오로 꼽혔다. 오랜 역사를 서로 관통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대 협업의 가장 이상적인 지향점이 아닐까.MAISON MARGIELA
존 갈리아노는 옛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를 누구보다 실험적으로 풀어내는 디자이너다. 이번 쿠튀르 컬렉션에서도 대과거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제 8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분장상을 수상한 영화 ‘라 비 앙 로즈’의 감독 올리비에 다앙과 협업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 결과 작은 사이즈 재킷, 통이 넓은 바지, 빈티지 스웨터, 나막신 등 네덜란드 어부들의 전통 의복에서 영향을 받은 코스튬 룩과 중세 시대 잉글랜드 왕위를 쟁취했던 크누트 왕의 전설을 극적인 스토리로 풀어낸 ‘A Folk Horror Tale(포크 호러 이야기)’이라는 테마의 단편영화가 탄생했다. 한계를 두지 않는 존 갈리아노가 영혼의 단짝인 올리비에 다앙을 만나 무한한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한 것. 또한 안감을 뒤집은 재킷과 마감 처리가 안 된 밑단, 뒤틀린 패브릭으로 만든 아우터 등 1990년대 마르지엘라 룩을 떠올리게 하는 리사이클 쿠튀르 쇼피스를 선보이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트렌드 그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민함까지 놓치지 않았다.SCHIAPARELLI
오트 쿠튀르의 세계에 화려하고 정교한 드레스만 있는 건 아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로즈베리는 전통적인 쿠튀르 형태에서 벗어난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장인이 만든 옷 그 이상의 새로운 것을 구현한다. 이번 시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장 폴 고티에가 떠오르는 콘 브라, 가슴과 복근을 강조한 뷔스티에,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룩, 난해한 치아 모티프 이어링, 메탈릭한 네일 액세서리까지 신선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모은 이번 쇼는 공개되자마자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최근 칸영화제에서 베스트 포토제닉으로 뽑힌 벨라 하디드가 입은 가슴 부분에 폐를 연상시키는 골드 주얼 장식 드레스와 미국 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의 취임식에서 레이디 가가가 입은 골드 비둘기 브로치 장식 드레스 역시 스키아파렐리의 오트 쿠튀르 쇼피스라는 사실만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니엘 로즈베리의 상상은 늘 현실이 된다.VALENTINO
메종의 수장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는 패션과 아트 두 영역을 결합한 ‘발렌티노 데 아틀리에’를 만들기 위해 아트 큐레이터 지안루이지 리쿠페라티의 도움을 받았다. 두 사람이 함께 현대미술 분야의 아티스트 17명을 선정한 뒤 그들과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런웨이의 영감을 얻은 것. 피치올리는 지안루이지 리쿠페라티, 아티스트들과 수차례에 걸친 실시간 미팅 끝에 하우스의 축적된 기술에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더해진 피스들을 완성해냈다. 그는 이번 오트 쿠튀르 쇼를 ‘Just Couture’로 정의하며 예술과 패션이 만나 교집합을 이룬 아트 피스에 집중했다. 플라밍고 핑크, 아쿠아, 바이올렛, 코코아 등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컬러의 풍성한 볼 가운 룩은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고, 자유분방한 드레이프와 장인의 손길이 닿은 유연한 소재로 제작된 견고한 룩이 줄지어 등장할 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가들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일까. 눈부신 컬러 팔레트의 룩을 선사한 피치올리 덕분에 쇼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와 활력이 충만했고, 쿠튀르의 낭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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