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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패션계가 다시 신문을 펼쳐 든 이유 

안미은 프리랜서 기자

2025. 05. 27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시대. 누구의 편도 아닌 그러나 모두의 편일 수 있는 신문이 이번 시즌 런웨이 1면을 장식했다.

2025 S/S 시즌 런웨이에서 에디터의 눈에 띈 것은 요란한 프린트도, 기발한 재단도 아니었다. 뜻밖에도 신문이었다. 모델들은 마치 신문 인쇄소 한가운데를 걷는 듯한 모습으로 무대를 가로질렀고, 런웨이는 종이 위를 떠다니는 활자들로 가득했다.

대표적인 예로 미우미우는 아예 가상의 신문을 무대장치로 활용했다.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쉼 없이 돌아가는 종이 더미들은 폴란드 출신 아티스트 고스흐카 마추가가 고안한 장치로,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채 살아가는 현시대의 허점을 날카롭게 짚어내고자 설계했다. 모든 좌석에는 ‘진실 없는 시대(The Truthless Times)’라는 가상의 신문이 놓여 있었고, 지면 곳곳에 실린 QR코드 중 하나는 방글라데시 태생의 철학가 슈몬 바사르의 에세이 ‘우리는 엔드코어의 시대에 살고 있다(We’re in the Endcore Now)’로 연결됐다. 그는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여기던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난 지금, 우리는 끝이 언제 올지 모르는 시대를 초조하게 견디고 있다”고 설명하며 현대사회의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되새겼다. 미우미우는 가장 전통적인 미디어인 신문을 활용해 진실 없는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담담히 컬렉션을 이어갔다. 

‌그런가 하면 스텔라맥카트니는 ‘더 스텔라 타임스(The Stella Times)’라는 진짜 신문을 쇼에 등장시켰다. 쇼의 오프닝은 배우 헬렌 미렌의 낭독으로 시작됐다. 미국 작가 조너선 프랜즌의 2018년 에세이집 ‘지구의 끝의 끝(End of the End of the Earth)’에서 영감을 받은 선언문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켜라(Save What You Love)’를 연설하며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어 모델들은 일종의 퍼포먼스로 반으로 접은 ‘더 스텔라 타임스’를 손에 쥐거나, 토트백 핸들 위에 얹은 채 런웨이를 걸었다. 이번 컬렉션 대부분은 지속 가능한 소재로 구성됐으며, 동물성 가죽과 깃털, 모피 등을 완벽히 배제함으로써 환경보호에 대한 브랜드 철학을 분명히 드러냈다. JW앤더슨 역시 영국의 예술 평론가 클라이브 벨의 1914년 저서 ‘아트(Art)’의 인용문을 새긴 실크 드레스를 다수 선보이며 활자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한편 밀라노 패션위크에서는 모스키노가 신문이란 모티프를 과장된 퍼포먼스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쇼의 클로징에는 모델의 얼굴이 큼직하게 인쇄된 ‘모스키노 타임스(Moschino Times)’를 든 모스키노 걸이 등장해 하우스 특유의 익살스러움을 드러냈다. 디자이너들의 이런 시도들은 패션이 단순한 의복을 넘어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묵직한 신문 활자가 주는 힘 

패션계가 신문을 펼쳐 든 순간은 생각보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의 지면을 패턴으로 활용한 ‘뉴스페이퍼 드레스’로 일명 신문지 패션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신문은 2000년대 초반, 존 갈리아노의 손에 의해 다시 하이패션 무대 위로 소환된다. 특히 그가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재직 중이던 시절 선보인 2000 S/S 오트쿠튀르 컬렉션은 프랑스 파리의 센 강변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든 노숙자의 모습을 모티프로 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모델들은 찢어진 신문지로 만든 듯한 드레스를 입고 일부는 얼굴에 흙을 묻히거나, 비닐 쇼핑백과 고급 가죽 백을 동시에 드는 식의 과장된 연출로 등장했다. 이는 노숙자의 현실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노숙인의 생존력과 창의성을 기리려 했다는 갈리아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디올 매장 앞에서 실제 시위가 벌어지는 해프닝이 일었다.

‌이후 갈리아노는 2005 F/W 컬렉션에서 다시금 신문을 꺼내 들었다. 온몸을 신문지로 감싼 듯한 모델들의 옷차림은 단순한 그래픽이 아닌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한발 더 나아가 2018 F/W 컬렉션에서는 신문 프린트 위에 디지털 그래픽을 덧입힌 디자인으로 진실이 왜곡되는 시대에 대한 은유적 비판을 담으며 전보다 성숙한 태도를 보였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읽고 또 무엇을 입는가?” 시대가 변해도 갈리아노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발렌시아가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이끌던 2010 F/W 컬렉션에서는 신문 프린트를 활용한 톱과 드레스가 주를 이뤘다. 특히 신문을 펼친 듯한 독특한 실루엣의 프린팅 톱은 전통적인 패션 요소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색다른 시도라는 찬사를 받았다. 2018 S/S 컬렉션에서는 더 노골적이고 날카로워졌다. 수장 뎀나 바잘리아는 신문 프린트는 물론 달러 지폐와 유로 통화, 스크린세이버 풍경 등을 끌어와 현대 소비문화에 대한 풍자적인 메시지를 뒤틀어 보였다. 같은 해 헬무트랭 역시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신문지 형태의 종이 가방을 든 모델들을 쇼에 등장시키며 미디어와 익명성에 대한 상징적 제스처를 취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셰인 올리버는 “신문을 더는 읽는 대상이 아닌 도구로 사용하길 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외에도 신문 프린트를 적용해 복고적인 무드를 강조한 2019 S/S 베르사체, ‘I Say I’라는 흑백 타이포그래피로 메시지를 던진 2020 F/W 크리스찬디올, 신문지를 말아 쥔 듯한 가죽 클러치 백으로 절제된 유머를 더한 2024 S/S 보테가베네타까지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신문을 써 내려갔다.

신문은 늘 시대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어떤 이는 정치적 입장을, 또 다른 이는 자아의 해석을 그 안에 담아낸다. 신문은 그 누구의 편에 서지 않는 동시에 모두의 편일 수 있는 공공의 오브제다. 날카로운 제목, 잉크 냄새, 종이의 질감. 활자를 읽고 맥락을 따라가는 일은 우리가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지적 사치이자 태도다. 스크롤은 점점 더 빨라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넘쳐나는 디지털 전환 시대를 겪고 있는 우리가 신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매 시즌 신문을 펼쳐 든다. 미우미우가 외친 ‘진실 없는 시대’처럼, 포기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묵직한 활자가 주는 힘을 믿기 때문이다.

#신문패션 #뉴스페이퍼스타일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크리스찬디올 존갈리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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