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동 꽃누나 한혜숙 씨
한혜숙(68) 씨는 시니어 모델 업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우리마포복지관에서는 우리마포시니어클럽을 운영 중인데 그곳에서 지난 2012년부터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시니어 액터스’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씨는 현재 시니어 액터스의 실장직을 맡아 60여 명의 소속 모델들을 이끌고 있다.“처음엔 복지관이 사회적인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보니 제가 기존에 생각했던 ‘노인복지관’이 아니라 ‘평생교육복지관’이더라고요.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여러 프로그램 중 시니어 모델을 양성하는 시니어 액터스 프로그램에 눈길이 갔죠.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물어봤더니 모델 워킹이나 메이크업, 발성, 연기 등의 직무 교육을 받고 모델이나 배우로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이 나이에 잘해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반신반의하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한평생 아이들을 키우면서 교육청의 학부모운영위원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한씨에게 복지관의 시니어 액터스는 딱 맞는 옷이었다. 한씨는 그동안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와 MBN 〈신세계〉 등에 출연했으며, 지난 2015년부터는 KBS 토크쇼 〈황금연못〉에도 고정으로 출연 중이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니 마음에 활력이 생기더라고요. 나름대로 모델이니 관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역 스포츠 센터에서 운동도 더 열심히 배우게 됐고요. 자식들은 저를 보고 모델 일을 하고부터 더 젊어 보이는 것 같대요(웃음).”
근래 들어서는 주변에서 어떻게 하면 시니어 모델이 될 수 있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한씨가 하는 대답은 “언제나 문은 열려 있습니다”다. ‘나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물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시니어 액터스에서는 해마다 10명의 모델을 선발하는데 올해엔 지원자가 40명이 넘었어요. 그만큼 모델 일을 하고 싶어하는 노년층이 많다는 거죠. 요즘은 점점 시니어 모델도 많아지는 추세라 오디션 경쟁률도 치열한 것 같아요.”
현재 시니어 액터스는 만 60세 이상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지원 가능하다.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 앞에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즉흥 대본 연기, 카메라 테스트 등을 치러 선발된다. 현재 시니어 액터스 소속 모델 중 최고령은 88세이며, 보통 시니어 모델 전성기는 65세에서 70대 초반까지라는 것이 한씨의 설명이다.
“예전에는 환갑이라고 하면 ‘할머니’하고 불렀는데 요즘 시대에 환갑은 청춘이죠. 지금 시니어 모델들은 앞으로 20년은 더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건강한 분들이세요. 시니어 모델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만큼 관련 단체나 지역사회에서 좀 더 관심을 갖고 이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많이 늘렸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흑석동 꽃할배 양성훈 씨
양성훈(72) 씨가 시니어 모델이 되기로 결심한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은퇴 후 서점을 운영하던 그는 온라인 서점과의 경쟁, 출판계의 불황 탓에 노후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신선한’ 제안을 해왔다. 대학에 개설된 시니어 모델 관련 평생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였다. ‘환갑도 넘었는데’ 하는 걱정이 앞서긴 했지만, 젊었을 때 꿈꿨던 연예계 활동을 해볼 수 있겠다 싶어 도전을 결심했다.“젊었을 땐 주변에서 배우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죠. 그런데 제 세대에 그게 어디 쉬운 결정인가요.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 가정을 꾸렸으니 그때부터 쭉 아내와 자식 챙기느라 연예계 활동은 쳐다보지도 못했죠. 그런데 마음 한구석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아 있더라고요. 서점을 운영할 때 ‘중견 배우가 운영하는 책방’이라고 헛소문이 나는 해프닝도 있었는데 그런 상황들을 겪으면서 연예인에 대한 꿈이 더 커졌던 것 같아요.”
1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친 그는 크고 작은 패션쇼 무대에 오르며 시니어 모델로서 신고식을 치렀다. 급속도로 성장한 실버산업 덕분에 그가 모델로 설 자리는 무척 많았다. 보청기나 가발 광고는 물론이고 보험사 광고, 전자제품 광고, 공공기관의 공보물 등에도 모델로 등장했다. 연극 무대며 드라마, 영화계, 홈쇼핑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당시 후보자 신분이던 문재인 대통령의 TV CF 영상에 출연하기도 했다.
“동창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해요. 40, 50대 때는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돈 잘 버는 친구들이 부러움을 사지만, 이 나이 정도 되면 다들 집에서 TV 보며 시간 보내기 일쑤잖아요. 저는 자식에게 손 안 벌리고 생활비를 직접 벌어서 쓸 수 있으니 이만한 행복이 또 어디 있겠어요.”
양씨가 모델 일을 시작한 후로 서점 관리는 아내가 도맡아줬다. 모델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남편의 모습이 부러웠는지 지금은 그의 아내도 서점을 접고 시니어 모델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 처음 모델 활동을 권했던 아들은 이제 영어 공부를 추천한다. 국내에선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으니 이제 할리우드에 진출할 차례라는 것.
“얼마 전에 한 골프 용품 브랜드의 CF를 찍었는데 자세가 잘 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파트 단지 내 골프 연습장에 레슨을 등록했어요. 혹시라도 다음번에 또 기회가 생기면 그땐 더 잘해보려고요. 모델 일이 단순히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일흔 살이 넘은 제가 계속 발전적인 방향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죠.”
그는 시니어 모델에게 건강관리와 외모 관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어디서든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이라고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내가 최고’라는 생각이 ‘프로 시니어 모델’의 길을 열어준다고 덧붙였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건 항상 두렵기 마련이죠. 노인들 중엔 많은 사람들 앞에 가면 괜히 주눅 들어하는 이가 많아요. 그런 두려움을 없애야 해요. 좋은 인상을 위해서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젊어 보이기 위해 일부러 노력하진 않아요. 하얗게 센 머리카락도 염색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걸요. 시니어는 시니어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법이에요. 시니어 모델 업계에선 오히려 저 같은 있는 그대로의 백발을 선호한다니까요(웃음).”
사진 홍중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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