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금속디자인을 전공한 노 대표는 1980년대 단추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요식업계를 거쳐 40대에 첫 직장 생활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웰빙 레스토랑 ‘마켓오’ 브랜드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오리온 임원이 된 것. 이후에는 CJ 등 가는 곳마다 대박을 터뜨리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노 대표는 자신의 커리어 하이 비결에 대해 “공채 출신도 아니고 대기업에서 얼마나 서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았겠냐”면서 “그때마다 전략과 치밀함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자신이 ‘금수저’임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던 것도, 그 과정에서 글로벌한 감각과 남다른 안목을 갖출 수 있던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금수저라서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럼 부잣집 자녀들은 다 성공하냐’고 되묻곤 한다”면서 “오히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헝그리 정신이냐’고 말한다”며 웃음 지었다. 30년 가까이 브랜딩계 ‘미다스의 손’으로 평가받는 노 대표에게 그가 써 내려온 직장 성공사와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직 생활 팁을 물었다.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던데 봄꽃 구경은 하셨나요.
따로 시간을 내서 꽃구경을 다녀온다거나 하지는 못하죠. 오며 가며 틈틈이 구경하고 있어요(웃음).
여전히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냥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브랜딩을 하는 게 곧 제 삶의 이유 같아요. 성향상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 즐겁거든요. 만약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라고 했으면 이렇게는 못 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단추 디자이너에서 갑자기 요식업계로 넘어간 것도 도전이네요.
옷 전체로 봤을 때 단추는 주인공이라기보다 디자인에 잘 어울리는 하나의 요소인 거잖아요. 그래서 좀 더 확장된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식당은 메뉴, 인테리어, 테이블 세팅, 접객까지 모든 것을 내가 꾸밀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일종의 종합 예술인 거죠. 그러고 나서 오리온이나 CJ에 간 것도, CJ 이후에 YG FOODS에 들어가서 다양한 브랜드를 만든 것도 결국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한 결과 같아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내가 계기를 만들었냐, 아니면 계기가 발생했느냐 하는 건 있지만요.
직장 생활 초반에 겪은 설움은 어떤 건가요.
처음 오리온에 롸이즈온(오리온 외식 계열사) 콘셉트개발담당 이사라는 직함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이사라고 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1년에 한 번씩 재계약하는 자리예요. 내부자들이 보기에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인 데다, 밖에서 자기 브랜드를 갖고 왔다니 초록이 동색이 안 되는 거죠. 일단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니 조직에 스며들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렇다고 오너들이 그런 상황을 봐주려고 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한동안은 말 그대로 혼자였어요. 같이 밥을 먹어도 혼자 먹는 것 같고, ‘이들은 나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노희영 히노컨설팅대표가 CJ 재직 시절 기획을 주도한 브랜드들. 올리브영, CGV 매장과 ‘마켓오 브라우니’ ‘비비고 만두’ 제품 이미지(왼쪽부터).
“마켓오·비비고, 치열한 시장조사 결과물”
힘든 시기를 어떻게 버텨냈는지 궁금해요.사실 ‘마켓오’ 레스토랑을 준비할 때부터 이걸 확산형 모델로 만들어서 대기업에 팔겠다는 전략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내 딸을 데리고 대기업에 시집가서 그 집에서 뭔가 이루고야 말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감정보다는 계획대로 움직이려 했어요. 지금 돌아가라고 하면 그렇게 못 할 것 같기는 해요. 그때는 정말 무서울 것도 없고,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렸거든요.
오리온에서도, CJ에서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면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은 어디서 얻었나요.
당시 소비자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챈 거죠. 마켓오 브라우니를 만들었을 때 국내 비스킷 시장 1~5위 제품이 모두 초콜릿 비스킷이었어요. 그래서 같은 초콜릿이되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한 브라우니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비비고 만두는 한식 세계화를 위한 메뉴로 만두를 초이스하면서 만들게 됐어요. 중국 딤섬, 일본 교자, 인도 사모사, 이탈리아 라비올리처럼 전 세계인이 이미 만두를 먹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죠. 국내에서도 업계 1위이던 해태 ‘고향만두’가 슬슬 식상하게 느껴질 시점이었어요. 전국 만두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레시피를 연구한 끝에 채소 함량을 높여 채즙이 풍부하면서도 담백한 만두를 완성할 수 있었죠.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이런 걸 어떻게 딱 찍어서 맞추겠어요. 끊임없는 시장조사와 치열한 고민으로 성과를 냈던 거죠.
주변 반대가 심했다면서요. 자기 의견을 끝까지 관철한 방법은 뭐였나요.
큰 틀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 걸 설득했죠. “해오던 대로 했는데 소비자들이 반응을 안 하고 있지 않냐”고요. 근데 설득도 막무가내로 하는 게 아니에요. 특히 실무 영역에서는요. 예를 들어 내가 슬리퍼 만드는 공장에서 구두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고요. 그러면 슬리퍼 공장에는 애초에 구두 뒷굽을 만드는 설비가 없잖아요. “절대 안 된다”고 할 거예요. 그때 무조건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뒷굽만 핸드메이드로 해서 붙이면 어떨까요” “가동 안 하는 설비를 일부 개조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협의를 해나가야 해요. 때로는 읍소도 필요하죠. 내가 안 해본, 지식이 없는 영역이면 그들 아이디어가 필요하거든요. 그들이 직접 생각을 해내게끔 해야 해요. 또 상사나 경영진을 설득할 때는 심기를 살피는 것도 중요해요(웃음). 평소에 살짝 떠보기도 하고, 남이 깨지는 걸 보면서 배우기도 하고 눈치가 있어야죠. 참 피곤한 일이지만, 인생이 원래 피곤한 것 아니겠어요?
매번 성공만 할 수 없잖아요.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실패하면 뒷수습은 어떻게 했나요.
저도 사람인데, 당연히 실패하죠. 다만 저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렬하게 반성했으면 빨리 잊어버리자’ 주의예요. 실패를 곱씹고만 있으면 다시 못 일어서거든요. 지금까지도 실수는 계속 나와요. 인터뷰 전에 저희 팀원들이 심각하게 회의하고 있었잖아요? 그것도 누가 잘하는 회사라고 소개한 곳에서 일을 진행했는데 결과물이 영 아니어서 비상이 걸린 거예요. 그러면 저는 클라이언트한테 “죄송하다. 저희가 책임질 테니 처음부터 다시 하자”고 하고 ‘앞으로는 내가 부하 직원들한테 더 집요하게 질문해야 한다’ ‘세상에 100%라는 건 없으니 반드시 더블 체크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요. 이렇게 인정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돼요.

“질문 잘해야 상사에게 ‘일잘러’ 평가받아요”
설득을 수월하게 하려면 일단 직장에서 신뢰받아야 할 것 같아요. 자기 브랜딩을 위한 팁을 준다면요.무조건 일을 잘하는 거죠. 구체적인 방법론을 묻는다면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리더는 부하 직원한테 실타래(일)를 던져놓고 나중에 다시 그걸 회수해요. 그러면 직원들 간에 차이가 확 드러나죠. 누구는 실을 생각보다 많이 잘 감아 오고, 누구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걸 혼자 만들고 있고 그래요. 이때 직원으로서 실을 잘 감으려면 처음부터 방향을 명확히 하고 가야 해요. 상사가 성가셔할 것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시장조사는 올해 데이터만 하면 될까요, 아니면 작년 것까지 비교해 올까요?”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는 거죠. 그걸 안 물어보면 10년 치 시장조사인지, 100년 치인지 어떻게 알아요. 근데 대부분은 안 물어보거든요. 이렇게 확인해서 정확한 결과물을 내면 상사들이 처음에는 ‘내가 얘기하면 한 번에 찰떡같이 좀 알아듣지’ 하다가도 나중엔 까먹고 ‘중간 점검 안 해도 똑 부러지게 해 오네’라고 생각하게 돼요.
옷 잘 입는 것도 직장 생활에서 중요하다는 건 무슨 얘기인가요.
이것도 눈치의 연장선이에요(웃음). TPO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거죠. 클라이언트와 중요한 미팅이나 저녁 자리가 있다고 했는데 너무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온다거나, 광고대행사랑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하러 가는데 정장을 쫙 빼입고 오면 상사로서 불편해요. 또 회사는 공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무실에서 슬리퍼 신는 것, 화장실에 칫솔 꽂은 양치 컵 두는 것 반대해요.
조직 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조언해주세요.
우선 상사를 인성으로 평가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나쁘게 보자면, 제 상사였던 대기업 회장님들도 인간인데 왜 흠이 없겠어요. 근데 그런 흠을 잡을 바에야 그 회사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의 성과, 배울 점을 보면서 스스로 발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죠. 제가 멋지지 않은 보스를 안 모셔봐서 그런지는 몰라도요. 아무리 재벌 2세, 3세라고 해도 재계 순위를 계속 지킬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YG FOODS에 있을 때도 저는 양현석 대표가 GD라는 대한민국 음악, 패션의 아이콘을 키워냈다는 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저런 건 닮지 말아야지, 한 게 있나요.
칭찬 안 하는 거요(웃음). 근데 이건 ‘자기 고백’이기도 해요. 저도 부하 직원들한테 따뜻하게 못 대했어요. 사실 아직도 ‘사람을 좀 긁어야 일에 속도가 난다’는 생각이 있어서 제 안에 갈등이 일어요. 그래도 이제는 철저히 일에 대해서만 혼내려고 하고, 혼내더라도 마지막에는 “수고했다” “고마웠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죠. 옛날에는 진짜 못 했거든요. 온갖 짜증을 내놓고 갑자기 그러는 게 쑥스러워서요.
“CJ에 노희영 DNA 못 남긴 것은 아쉬워”
직장 생활에서 또 후회가 남는 점이 있다면요.요즘 정말 행복한 게, CJ에 있는 후배들이 저한테 “노 고문님이 계실 때가 우리 화양연화였어요” “노 고문님이 키워주셔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라는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니까 제 진심을 알아주는 거죠. 그렇다 보니 당시에 제가 했던 노력을 CJ에 DNA로 남기지 못하고 나온 게 너무 아쉽더라고요. ‘왜 나 같은 애들을 더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욕먹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왜 못 만들어놓고 나왔나’ 싶은 거죠. 제가 떠나고 나니까 모든 게 원상 복귀돼서 다들 둥글둥글해진 것 같아요. “그래도 노희영 있을 때는 뛰어갔는데” 하는 얘기가 들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진짜 옳은 일을 했다면 자기를 복제한 후배를 많이 길러내는 것까지가 좋은 리더십에 포함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집안 재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뭐든 과감하게 도전하고 성취할 수 있던 것’이라는 항간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혜택을 받은 것도 있죠. 근데 그렇게 치면 금수저는 다 성공하게요(웃음)? 오히려 금수저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요. ‘아니면 말고’ 해버리죠. 또 인생에서 한번 큰 성공을 거뒀으면 그다음에는 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보다시피 저는 계속 새로운 일을 찾아 헤매요. 여기 책꽂이가 꽉 차서 책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 보이죠. 저는 새로운 책, 트렌드, 여행 이런 게 아직도 너무 궁금해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빨리 알고 싶고, 가보고 싶죠. 심지어 저는 새벽같이 일어나요. 내가 자는 동안 지구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매일매일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법, 특히 브랜딩·마케팅 직군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제너럴하게는 일단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해요. 이런 말을 하면 욕먹겠지만, 그런 일을 찾았다면 워라밸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안 되죠. 일은 일이고 라이프는 라이프인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어요. 남들과 똑같이 하면서 성공하겠다는 건 모순이에요.
마케팅 직군 종사자에게는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저는 팀원들한테도 맨날 물어봐요. “그래서 이란 전쟁 어떻게 될 것 같아?” “트럼프는 대체 왜 저럴까?” 하고요. 그게 세계 경제, 기업 활동, 소비 성향 등 곳곳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하다못해 동네 새로 생긴 식당에 사람들이 왜 오픈런을 하는지까지 궁금해야 해요. 정말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죠. 분야를 가려서는 아무것도 안 돼요.
마지막으로 인간미 있는 모습도 하나만 알려주세요. 쉴 때는 뭘 하는 편인가요.
어떡하죠. 저는 잘 안 쉬어요(웃음). 성격상 피부과도 못 가요. 누워 있는 게 힘들어서 팩을 올려주면 빨리 떼어달라고, 나가야 한다고 해요. 가만히 쉬는 법을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웃음).
#노희영 # 브랜딩 #커리어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뉴시스 사진제공 CGV 오리온 C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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