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로부터 13년이 흘러 두 사람이 발칙하고 도발적인 39금 코미디 영화 ‘윗집 사람들’로 다시 만났다. 스페인 영화 ‘센티멘탈’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층간소음 문제를 계기로 윗집 부부와 아랫집 부부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벌어지는 예측 불허의 하룻밤을 그린다. 매일 밤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내며 ‘밤 생활’을 즐기는 윗집 부부와 달리, 아랫집 부부 정아(공효진)와 현수(김동욱)는 4년 넘게 각방을 쓰며 대화까지 단절되는 등 깊은 권태기에 빠져 있다. 정아는 위층을 향해 불편함보다 묘한 부러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식사 자리에서 윗집 부부가 건네는 황당하고 대담한 제안에 점차 마음이 흔들린다.
이 작품은 하정우가 ‘롤러코스터’ ‘허삼관’ ‘로비’에 이어 연출한 네 번째 영화다. 하정우는 윗집 남편 김 선생을, 이하늬는 윗집 아내 수경을 연기했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조용한 미술대학 강사이지만 내면은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조금씩 비어 있는 정아는, 4명의 등장인물 중 관객들이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캐릭터다. 공효진은 이 복합적인 감정을 섬세한 호흡과 리액션으로 밀고 가며 이야기의 중심축을 단단히 잡았다.

영화 ‘윗집사람들’ 포스터.
하정우의 “여우주연상 타게 해줄게”란 말에 낚여
4명의 배우가 특별한 사건 없이 한정된 공간에서 말로 치열하게 맞붙는 ‘대사 배틀’이 영화의 가장 큰 감상 포인트. 촬영은 대부분 아파트 내부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루어졌다. 집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네 인물의 감정이 조금씩 비틀리고 폭발하는 영화적 장치를 위해서였다. 제한된 공간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니는데, 공효진은 “같은 세팅과 조명 덕분에 놓친 컷을 다시 찍기 좋았지만, 세트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피로감이 높았다”고 털어놓았다.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아크로요가와 아파트 안내 방송 장면 같은 아이디어를 직접 제안하기도 했는데, 그는 “장면 환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괜찮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전작인 ‘577 프로젝트’에서는 ‘재충전’을 미끼로 공효진 캐스팅을 성사시켰던 하정우가 이번에는 “여우주연상 타게 해줄게”라는 새로운 미끼를 던졌다. 공효진은 촬영 3회차쯤 접어들었을 때 작품이 가진 힘을 직접 느끼면서 단순한 의리에서 시작된 참여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하정우 오빠 코미디가 약간은 식상하긴 하지만 저는 여전히 재미있고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요. 네 배우가 말로 치열하게 주고받는 영화라는 점도 욕심이 났어요. 대사 능력 좋은 배우들과의 호흡은 큰 자산이라고 생각했고, 정우 오빠가 감독이라면 어느 방향으로든 잘 끌고 갈 거라는 믿음도 있었죠. ‘재미있게 만들어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못 먹어도 고’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하정우에 대해 그는 “섬세한 표정과 작은 감정 변화를 기막히게 캐치한다”고 말했다. 배우 출신 감독만이 짚어낼 수 있는 디테일 덕분에 현장에서의 소통이 쉽고, 편집 과정에서도 배우의 감정선을 정확하게 뽑아낸다는 하정우의 장점을 높이 평가했다. 공효진과 하정우의 관계는 ‘절친’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는 “일할 때만큼은 존댓말을 쓴다”며 “남매 같기도 한데, 일할 때는 경계를 지키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우 오빠는 사자처럼 강한 리더십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엄청 소심하고 잘 삐치기도 해요.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많고 약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 감독으로서 스트레스가 큰 탓인지 가끔 현장에서 뒷모습이 처연해 보일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힘내세요’ 하고 토닥여드렸죠(웃음).”
윗집 아내 수경을 연기한 이하늬의 캐스팅에도 공효진이 힘을 보탰다. 당시 이하늬는 드라마 ‘원더우먼’과 ‘밤에 피는 꽃’ 출연으로 피로가 누적된 데다 촬영 중 얻은 부상으로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효진은 이하늬에게 여러 차례 안부 전화를 걸며 자연스럽게 동기를 북돋웠다. 그는 “제가 캐스팅했다기보다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셈”이라며 “생각해보면 이하늬가 윗집 역할을 맡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이하늬의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과 멘토 같은 이미지가 캐릭터와 너무 잘 맞았다”고 말했다. 드라마 ‘파스타’ 이후 15년 만에 다시 만난 이하늬는 공효진에 대해 “현장을 품는 에너지가 훨씬 커졌다”고 평했다. 공효진 역시 그 말을 인정하며 “그때는 정말 바쁜 시기였고 촬영이 너무 고됐다. 지금은 더 어른이 됐고 현장을 바라보는 눈에도 여유가 생겼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영화 ‘윗집 사람들’은 권태기를 겪는 아랫집 부부에게 윗집 부부가 스와핑을 제안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권태기 연기 혼란스러워”
소심하고 거절 못 하는 미술대학 강사인 아랫집 여자 정아에 비해, 정신과 의사인 윗집 여자 수경은 욕망에 충실하고 또 그걸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애초 하정우는 공효진에게 작품을 제안하면서 “윗집 여자, 아랫집 여자 어느 쪽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며 선택을 맡겼다. 그는 정아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정아는 ‘배려가 병이 된 사람’이다. 아파트에서 싸우고 싶은데도 남들이 들을까 봐 미루고, 좋은 부부처럼 보이려고 하고…. 나 역시 ENFP라 거절을 잘 못 한다. 친구가 밥 먹었다고 하면 나도 먹었다고 하고, 안 먹었다고 하면 같이 안 먹었다고 하는 스타일이다.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무조건 화부터 내기보다 ‘이유가 있겠지’란 생각을 한다. 나는 누군가 상처받지 않고 혼자 남지 않도록 습관적으로 배려하는 성격인데, 그런 점에서 정아와 비슷하고 연기하기도 편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영화 속 정아의 “나도 (스와핑을) 할 수 있어”라는 대사를 두고 이하늬가 “사실은 ‘나도 좀 사랑해달라’는 말처럼 들렸다”고 해석한 데 대해 공효진은 깊은 공감을 드러냈다. 공효진은 “부부는 결국 가까워지면 가족 같아지고, 가족이 되면 또 대화가 줄어든다더라”고 주위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엄마랑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오늘 나 이랬어, 저랬어’ 다 말하지는 않잖아요. 엄만 100%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인데 왜 그럴까요? ‘남편이라는 존재도 그런 관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까워지면 섭섭함이 쌓이고, 풀지 않으면 그냥 삐친 채로 가는 거죠.”
공효진의 실제 결혼 생활은 영화 속 ‘아랫집 부부’와는 거리가 멀다. 2022년, 열 살 연하의 뮤지션 케빈 오와 결혼한 뒤 남편의 군 복무 때문에 곧바로 ‘롱디 신혼’을 겪었다. 그는 그 시기를 떠올리며 “남편이 휴가 나왔다가 복귀할 때마다 엄청나게 울었다. 헤어질 때 운 순간도 결국은 인생에서 오래 남는 특별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또 “남편 면회를 가기 위해 긴 시간 운전을 하고, 작은 것까지 챙기던 과정이 내 삶에도, 연기에도 감정을 풍부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남편의 전역 이후 본격적인 신혼 생활에 들어섰을 때는 오히려 “권태기를 연기하는 게 혼란스럽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남편은 아직 아내의 멜로 연기에 “기분이 이상해진다”는 사랑꾼이다.
“우리 영화가 혹시 20대 관객이 가진 사랑에 대한 환상을 너무 빨리 깨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연애를 1년 이상 안 해본 사람들은 ‘왜 저러지?’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몇 년씩 함께 살다 보면 대화가 줄고, 예전엔 웃겼던 게 지금은 안 웃기고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마치 타이머가 있는 것처럼 3년, 5년 지나면 서로가 꼴 보기 싫어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고 하더라고요. ‘결혼 생활 오래 하면 진짜 그렇게 되는 걸까?’ 싶기도 해요.”

“2세 소식 곧 전하고 싶어요”
임신 중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 이하늬는 공효진에게 큰 자극이 됐다. 그는 “남편이 제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혼을 충분히 즐기고 싶지만, 아이에 관한 생각도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주변에서 기대하는 눈빛도 많고, 아이를 낳은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해요. 곧 기쁜 소식으로 인사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코로나 팬데믹 시기 자연스럽게 찾아온 공백은 그의 연기 인생에도 변곡점이 됐다. “쉬는 게 너무 좋아서 ‘다시 연기할 수 있을까?’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너무 하고 싶어지더라”고 했다. 이후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 영화 ‘윗집 사람들’과 ‘경주기행’을 연달아 만나면서 그는 예전보다 훨씬 세밀하게 디테일을 들여다보는 배우가 됐다. 그는 “예전엔 힘을 빼는 게 자연스러운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더 정성을 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는 “특별한 원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신경 쓰는 부분이 생기고, 지금의 내 연기가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진다”고 밝혔다. 주변 부부의 모습을 보며 ‘사는 게 녹록지 않아 대부분 무료하게 지내더라’ 느꼈다는 그는 “이 영화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해주면 좋았겠지만, 부부 솔루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부부가 화해한 것으로 방송이 끝났다고 해서 그게 진정한 화해가 아니듯, 답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저 이들의 싸움과 당혹스러운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감정은 건드려질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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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바이포엠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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