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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사람 좋아하지만 낯가리는 성격, 탱고에서 해방감 느꼈어요”

‘미사’에서 ‘보스’까지, 배우 정경호

김명희 기자

2025. 10. 29

영화 ‘보스’에서 탱고를 추는 조폭으로 등장해 큰 즐거움을 안긴 정경호. 그와의 인터뷰는
까칠한 얼굴 뒤에 가려진 배우로서의 고민, 인간적인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추석 연휴에 개봉한 영화 ‘보스’는 말 그대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작품이다. 조우진, 정경호, 이성민, 박지환, 이규형, 오달수, 고창석, 황우슬혜 등 충무로와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화끈한 액션과 호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조직의 차기 보스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양보전’이라는 기묘한 설정 위에서 배우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춤에 빠져 보스가 되길 거부하는 동강표 역할을 맡아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은 정경호(42)다. 라희찬 감독이 “발톱이 빠질 정도로 연습했다”고 증언할 만큼 정경호는 탱고에 진심이었다고. ‘보스’는 개봉 3주 만에 누적 관객 수 280만 명(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을 돌파하며 장기 흥행 조짐을 보였다.

정경호라는 배우를 말할 때 아버지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아버지 정을영 PD는 ‘목욕탕집 남자들’ ‘불꽃’ ‘부모님 전상서’ ‘내 남자의 여자’ ‘엄마가 뿔났다’ 등을 제작한 유명한 연출가다. 정경호는 자연스럽게 동화책보다 대본을 더 가까이 두게 됐고, 집 안 곳곳에 널린 비디오테이프를 교과서 삼아 성장했다. 덕분에 연기의 세계는 그에게 낯설지 않았고, 배우라는 길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단순히 ‘PD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안주한 적은 없다. 오히려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무게를 증명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첫눈에는 까칠하고 예민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낯을 많이 가리고 ‘사람’에게 전부를 거는 순수한 성정을 가진 그는 작품에서도 츤데레 캐릭터로 빛을 발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흉부외과 전문의 김준완,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교도관 이준호, ‘일타 스캔들’의 수학 강사 최치열까지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따뜻한 인물들이 정경호를 통해 설득력을 얻었다. ‘보스’의 동강표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차기 보스로 운명이 정해진 인물이지만, 정작 자기 욕망과 자유를 좇아 다른 길을 택하려는 강표의 모습은 정경호 자신의 ‘꿈’에 대한 태도와도 겹친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20년 경력의 배우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고, 금세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배우 정경호의 결을 느낄 수 있었던 인터뷰를 소개한다. 

영화 ‘보스’는 요즘 대세 배우들의 연기 경연장 같은 작품이다. 

영화 ‘보스’는 요즘 대세 배우들의 연기 경연장 같은 작품이다. 

영화 ‘보스’에서 오랜만에 막내뻘로 등장하는데, 작업은 어땠나요.

촬영하면서 조우진 선배, 박지환 형, 이규형 배우와 정말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부산에서 올로케이션으로 몇 달을 함께하다 보니 친형제처럼 끈끈해졌어요. 그때의 기억들이 너무 좋았고, 개봉을 앞두고 극장에서 그 순간들을 다시 공유할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럽습니다. 우진 형과도 “눈물 나게 애틋하다”는 얘기를 나눴을 정도예요.



‘눈물 나게 애틋하다’는 표현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 같네요.

코미디 장르가 사실 배우에겐 굉장히 어려워요. 찍는 사람들끼리만 즐겁고, 관객에게는 그 즐거움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을 온 힘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코미디 연기는 타고난 센스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재능을 타고난 배우들도 많은데, 저는 좀 애매한 편이에요(웃음). 정말 다행인 게, 지금까지 대본 덕을 크게 봤어요. 조금만 장난스럽게 표현해도 설득력이 있어 보일 만큼 탄탄한 작품들을 만났거든요. ‘보스’ 역시 너무 재미있고 코믹한 대본이었어요. 여기에 조우진 선배와 박지환 형, 오달수 선배 같은 배우들이 함께하면서 작품 자체가 풍성해졌습니다.

조폭이란 설정에 어떻게 접근했나요.

의사, 일타강사, 노무사 등 다양한 직업군을 연기했지만 조폭은 처음이었어요(웃음). 그냥 조폭도 아니고 춤에 빠진 조폭이죠. 원래는 피아노에 빠지는 설정이었는데 연습 기간이 너무 짧아 고민하다가 탱고로 바꿨습니다. 마침 감독님이 탱고를 배우고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대본 리딩보다 춤 연습을 더 열심히 했죠. 웃으실 수도 있지만 탱고에 제 혼을 갈아 넣었습니다.

탱고를 추는 장면이 자연스러워 보이더군요.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에요. ‘슬기로운 의사생활’ 때 신원호 PD님이 늘 “너는 음악은 없는데 흥은 있다”고 하셨거든요(웃음). 전 조정석 형이나 전미도 누나처럼 음악적 재능은 없지만 성실함과 꾸준함이 있습니다. 탱고는 특히 ‘하나의 심장, 네 개의 다리’라는 대사처럼 파트너와의 호흡과 리액션이 중요하더라고요. 촬영하면서 탱고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작업이 끝난 뒤에도 몇 번 더 개인적으로 레슨을 받았어요. 탱고를 배우면서 해방감을 느꼈달까요. 외국 여행을 가면 거리에서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종종 보잖아요. 예전엔 ‘저 사람들은 왜 저럴까’ 싶었는데, 이제는 그 자유와 열정을 이해하게 됐어요. 정말 매력적인 세계라 꼭 한번 경험해보시길 권하고 싶어요.

작품 선택 기준은 대본보다 사람

연인인 수영 씨에게 춤에 대한 조언을 구하진 않았나요.

전혀요. 감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웃음). 

영화 속 슈트 핏도 화제가 됐습니다.

슈트는 정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특히 탱고를 추는 장면에서는 옷 하나하나를 감독님과 꼼꼼히 의논했고, 손이 예뻐 보이도록 문신 디테일까지 챙겼습니다. 공교롭게도 대본에 ‘굉장히 마른 체형’이라고 써 있더라고요. 지금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tvN ‘프로보노’)에도 ’예민하고 까칠하다’고 적혀 있고요. 일부러 살을 빼는 건 아닌데, 마흔 중반이 되다 보니 몸무게가 막 늘지도 않더라고요. ‘뼈말라’는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아서 ‘프로보노’ 촬영이 끝나고 나면 제대로 운동을 해보려고 합니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궁금합니다.

좋은 대본과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하느냐를 더 많이 봅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에너지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경험이 값지기도 하거니와, 좋은 분들과 함께하면 작품도 더 커지거든요. 이번 영화도 워낙 훌륭한 배우들이 모여 있어서 주저 없이 선택했어요. 

배우로서 자신의 매력은 뭘까요.

늘 고민하는 부분인데, 신원호 PD님은 제 안에 ‘선함’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언젠가는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나이대의 장점이라 하시더군요. 제 생각엔 그 선함을 지키면서 캐릭터에 녹여내는 게 제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정경호 씨가 배우 되는 걸 아버지가 반대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누구보다 좋아하십니다. 이번 작품 VIP 시사회에도 모시려 했는데, “돈 내고 극장에서 보겠다” 하시더라고요. 아버지가 반대했던 건, 배우 일이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아들을 걱정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20년 넘게 연기하면서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기가 재밌고 좋아요. 좋은 배우가 되는 게 꿈이기 때문에 저 역시 강표처럼 여전히 꿈을 좇는 과정에 있어요

탱고에 빠져 조직의 보스 자리를 마다하는 강표 역할을 맡은 정경호는 춤 추는 장면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  

탱고에 빠져 조직의 보스 자리를 마다하는 강표 역할을 맡은 정경호는 춤 추는 장면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  

‘지락실’ 팬, ‘미사’ 폐인 퀴즈 재밌게 봐 

자연스럽게 연기를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그런 점이 꿈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맞아요. 어릴 때 동화책보다 대본을 더 많이 봤어요. 이순재 선생님이 대본 속 장면을 연기로 보여주시는 게 너무 신기했고, 그게 살아 있는 공부였죠. 집에 비디오가 널려 있어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새로운 역할을 맡으면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한 선배님들의 작품을 찾아서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인터뷰하러 오면서 보니 근처에 4대째 이어온 칼국숫집이 있더라고요. 제가 그곳 아들로 태어났다면 아마 칼국숫집을 이어받지 않았을까요?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순 있겠지만, 그만큼의 대가와 책임감이 따른다고 생각해요.  

20년 전 출연한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데, 소감은 어떤가요. 

제가 예능 프로그램 ‘뿅뿅 지구오락실’ 팬인데, 거기에 ‘미사’ 폐인 퀴즈가 나와서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아직도 어디선가 드라마 주제가 ‘눈의 꽃’이 들려오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함께한 소지섭 형, 임수정 누나, 서지영 누나와 만나면 서로 애틋해지고요. 근데 솔직히 좀 민망해서 드라마를 다시 보진 못하겠어요. 저는 제 작품 모니터링도 부끄러워서 잘 못 하는 편이거든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뭔가요.

지금까진 판타지적인 역할들을 많이 해왔는데요. 이제는 조금 더 땅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 냄새 나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추구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 일이 아니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진지하게 고민하고, 인간 정경호로서의 장점을 캐릭터에 녹여내려 노력하고 있어요. 다만 이제는 조금 변화를 준비해야 할 때라는 생각도 들어요. 공부도 더 하고, 제 안을 채워야만 감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표현할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거든요. 20년 넘게 배우로 살아오면서 저 자신이 상업적으로 소비된 부분도 분명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은 ‘이제는 채워야 할 때’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배우는 결국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내는 직업이니까요. 제 안에 쌓인 경험과 감정이 많을수록 더 진실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엔 주어진 역할에만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 역할을 표현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깊이 있는 사람인가를 먼저 돌아보려 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깊이’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나이를 먹으면서 철이 드는 것 같아요. 선배들과 함께하며 책임감 있게 연기를 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진 형은 철저히 책임감으로, 지환 형은 날것 같아 보이지만 철저히 계산된 연기거든요. 그런 걸 보며 저도 더 깊이 고민하게 된 것 같습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3를 기다리는 팬들이 많은데, 기대해도 될까요.

신원호 PD님께 매주 전화하고 있습니다(웃음). 구구즈(극 중 99학번 의대 동기로 나오는 조정석, 전미도, 유연석, 김대명) 모두 같은 마음이에요. 

#보스 #슬의생 #정경호 #여성동아

사진제공 하이브미디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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