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이 오면’ 대표 김혜진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논현동 골목길로 접어들어 벽면 초록색 동판 위에 새겨진 코끼리 부조와 ‘MOSS’(아래 가는 필기체로 garden이 있다)라는 영문이 보이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밖에서 보면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 같지만 돌계단 몇 개만 오르면 금싸라기 땅을 자연에게 양보한 초록의 중정이 펼쳐진다. 이곳은 ‘15초의 마술사’로 불렸던 CF 감독 박명천 대표가 이끄는 ‘매스메스에이지’ 사옥으로 2003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을 받았다.
이 골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박 대표의 아내이자 30년째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김혜진 대표의 회사 ‘꽃피는 봄이 오면’(꽃봄)이 있다.
김 대표는 1995년 2월 말 홍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선배들과 함께 반지하에 사무실을 얻고 디자인 회사 꽃봄을 차릴 만큼 도전적이었다(그는 “무모했다”고 말한다). 1999년 영화 ‘박하사탕’ 포스터 작업을 시작으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집으로’ ‘시월애’ ‘박쥐’ ‘후궁’ ‘도둑들’ ‘암살’ ‘아가씨’ 등 흥행 성적만큼이나 화제를 뿌린 영화 포스터들이 줄줄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최근엔 드라마 ‘더 글로리’ ‘마이네임’ ‘인간수업’ 등 OTT 플랫폼 포스터 디렉팅 작업을 했다. 지금까지 그가 작업한 영화와 드라마가 300편이 넘는다.
2016년 10월 중국에서 유학 중인 아들이 복통을 호소해 급히 서울로 데려왔다. 처음 입원한 병원에선 장중첩증 같다고 했고, 다른 병원에선 악성종양이라고 했다. 정확한 병명을 찾기까지 아들은 두 번 수술대 위에 누웠다.
“오랫동안 아들을 괴롭혔던 변비가 소장과 대장 연결 부위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서 암 덩어리가 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 죄책감으로 휩싸여버렸어요.”
항암 치료를 위해 세 번째로 옮긴 병원에선 종양 제거를 한 수술 부위가 터지면서 복막염이 왔다. 6시간에 걸친 수술 후 아들은 변을 내보내기 위해 장루(인공항문)까지 달았다. 간단한 맹장염 수술이 2년 4개월하고도 40일에 걸친 긴 투병 생활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63일간 금식 끝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김혜진 대표가 아들을 위해 개발한 1 명란 대파 두부면 파스타 2 강황 감자칩 3 잔멸치감태주먹밥 4 연어 파피요트 5 건강주스 3총사
“먹는다는 게 굉장히 성스럽고 귀중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먹고 싶지만 금식을 해야 하는 아들과 괴로움과 두려움에 밥을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엄마, 그런 저에게 ‘엄마가 밥을 많이 먹어야 아이를 간호할 수 있다’며 위로를 건네던 다른 환우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했죠.”
아들의 발병 이후 허둥지둥하기만 했던 엄마는 암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다. 반복되는 약물치료로 식욕을 잃은 아이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자연에서 얻은 좋은 식재료로 정성껏 만든 한 끼 식사였다. 식재료의 효능과 레시피, 특히 아들의 병에 좋은 재료와 요리법을 파란색 노트에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제품의 성분 표시에도 예민해졌다. 연어와 장어에 별표가 붙었고, 핵산엔 동그라미가 쳐졌다. 성분 표시는 짧을수록 좋다는 것도 알아챘다. 그만큼 합성 첨가물이 적게 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전 5시 30분 새벽예배를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은 ‘바다의 보물들’을 건지러 노량진이나 가락동 수산시장에 들렀다. 핵산이 많이 들어 있는 연어와 등푸른생선들을 골랐다. 생선 비린내가 아들을 살릴 수 있는 건강한 향기 같았다. 장을 보고 돌아와 식기를 소독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조리한 음식을 서둘러 병원으로 챙겨 보내고 곧바로 다음 끼니 준비에 들어갔다. 도돌이표 같은 생활이었지만 조리대 앞에서 엄마는 끊임없이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했다.
“입맛 없는 아이를 위해 세 끼를 다른 메뉴로 만드는 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연어는 아무리 좋은 식재료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레시피가 많지 않았어요. 시소 강황 연어 밥, 연어 솥밥, 한라봉 소스를 넣은 마늘 연어 파피요트, 연어 참치 아보카도 층층이 까망쌀 케이크밥 등이 그때 개발한 레시피입니다. 퇴원 후에도 한참 동안 ‘1일 1연어’를 한 아들은 요즘 연어만 봐도 고개를 돌리지만 제게는 아들의 목숨을 살린 너무나 고마운 음식이죠.”
붉은 육류도 암환자에겐 기피 식품이다. 당장 먹일 수 있는 고기는 닭. 무항생제 유기농 닭도 중요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닭고기만 먹어야 하는 아이가 질리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했다. 강황 듬뿍 탄두리 치킨, 쌀가루 닭봉 튀김, 멸치 육수 한 그릇 삼계탕, 마늘과 허브로 마리네이드한 로스트 치킨이 그렇게 탄생했다.
‘좀 더 맛있게’ 다음은 ‘좀 더 행복하게’
일회용 플라스틱과 종이 박스를 대신해 모스가든에서는 최대한 재활용할 수 있는 틴 케이스 패키지를 선택했다.
레드 리넨이나 꽃무늬 패턴이 화사한 테이블 매트를 깔고 음식을 올리면 잠시나마 마음까지 화사해졌다. 남들이 보면 유난을 떤다 싶겠지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엄마의 애달픈 마음이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서은영 대표(모스가든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리한 사진을 전부 찍어두면 어때요?” 이렇게 정성껏, 아름답게 차린 건강한 음식을 알리는 일이 대표님의 소명이 아닐까 싶어서요. 사진만 찍어주시면 제가 사이트로 정리해볼게요.”
그 말에 설득돼 음식 사진을 찍다가도 문득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필요하실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번엔 남편이 한술 더 떴다.
“작은 식당을 내서 사람들이 먹어보면 좋겠네.”
레스토랑 굿사마리안레시피 내부.
“미친 짓 같았죠. 당시는 아들의 암이 재발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거든요. ‘뭘 하고 있는 거지?’ 수없이 자문했죠. 그때 깨달았어요. 주님은 대단하시구나. 고속도로도 있지만 좁은 길도, 가파른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구나. 만약 이런 고난이 없었다면 나는 목표도 없이 그저 하던 일만 계속하고 있었겠구나. 여전히 일이 신앙이었을 겁니다. 저는 이 모든 과정을 ‘주님의 초대’라고 말해요.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암 병동에 입원했을 때 아들의 식탁을 본 주치의 선생님이 ‘우와! 이렇게만 먹으면 병이 금방 좋아지겠다’라며 응원해주시던 것이 생각났어요. 그때는 기쁘기보다 자기 아이에게는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소아암 병동의 다른 엄마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죠.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들은 직접 요리를 할 수 없으니까 독한 치료로 입맛이 떨어진 아이들에게 빵이나 라면이라도 먹게 해서 에너지를 보충해주려 했거든요. 식당을 열어 항암 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사명감이 생기더군요.”
2017년 12월 17일 모스가든이 탄생했다. ‘모세의 정원’이란 뜻에 맞게 바람과 비,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공간이다.
“신은 곧 자연이고, 가든은 자연의 집약체이자 축소판이잖아요. 우리는 신의 정원을 꾸미는 가드너인 셈이죠.”
모스가든 한쪽에 레스토랑 굿사마리안레시피를 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음식을 만든다’는 뜻을 담은 식당 작명은 서은영 대표가 했다. 서 대표는 미국 출장 중 ‘굿 사마리탄 호스피털(Good Samaritan Hospital)’이라는 간판을 보고 떠올랐다고 했다. 실제로 굿사마리안레시피의 메뉴는 사마리아인들이 거주하던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아랍, 지중해를 중심으로 러시아와 북유럽, 아시아, 남미의 가정식을 기본으로 한다. 두 사람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건강한 로컬 식재료를 찾아내고, 셰프들은 ‘전 세계 엄마들의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었다.
“암환자, 그중에서도 특히 아들처럼 장 쪽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은 밀가루를 절대 피해야 해요. 백색 밀가루는 면역력 암살자라고도 하잖아요. 처음엔 메뉴에 파스타가 없었어요. 레스토랑을 운영하려면 파스타가 꼭 필요하다는 홀 매니저의 강력한 요구에 넣기는 했는데 100% 통밀, 쌀국수, 두부, 퀴노아로 만든 면을 사용하죠. ‘쌀국수로 파스타를 만들라고 하면 셰프들이 그만둔다’고 초기엔 주방에서 볼멘소리도 했죠. 그러나 항암 치료 중이거나 면역력이 저하된 고객들이 안심하고 드시는 걸 보면 저의 레시피가 ‘쓰임’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좋더라고요.”
굿사마리안레시피가 입소문이 나자 옆 공간에 영국 애프터눈 티룸 콘셉트의 카페 세인트루크마리를 열었다. 누가복음의 ‘루크’는 원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유명한 시골 의사였다. ‘마리’는 영국에 애프터눈 티 문화를 개척한 애나 마리아의 이름에서 따왔다. 카페 이름에서부터 목표는 분명했다.
“마트에서 쇼트닝과 팜유가 안 들어간 과자를 고르려다 보니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아들은 빨간 통에 든 감자칩을 간절히 먹고 싶어 했죠. 튀기지 않고 바삭바삭한 맛을 낼 방법이 없을까. 건강한 디저트를 만드는 건 ‘미션 임파서블’ 같았죠. 감자를 얇게 썰어 뜨거운 오븐에 넣었더니 바로 타버리고 저온으로 구웠더니 딱딱해졌어요. 온갖 시도 끝에 슬라이스한 감자를 끓는 물에 3분 정도 넣었다 빼서 다시 한 장씩 잘 펼쳐 키친타월로 물기를 꾹꾹 닦은 뒤 강황 가루와 표고버섯 가루, 복분자 소금을 솔솔 뿌려 식품 건조기에 넣고 6시간 정도 돌려줬어요. 드디어 원하는 감자칩이 나왔을 때 먹고 기뻐할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죠.”
세인트루크마리는 전국 농장에서 찾아낸 식재료를 사용하고 설탕 대신 사탕수수 원당과 꿀을 고집한다. 문경 오미자 티와 에이드, 제주 청귤 주스, 함안 백자 멜론 팥빙수, 제주 구좌 당근주스. 특히 무안 팥으로 만든 팥치즈케이크는 가정간편식(HMR)으로 판매될 만큼 인기다.
최근 김혜진 대표는 ‘굿사마리안레시피’(서은영 공저·포스트페이퍼)라는 책을 펴내 파란색 노트에 꼼꼼히 기록해둔 레시피를 공개했다. 잔멸치 감태 주먹밥, 미역귀 로열젤리 꿀 경단, 아귀지리죽, 페스카토레 옹심이, 명란 대파 두부면 파스타, 채소즙으로 색을 낸 밤앙금 오색 떡 등 온갖 실험 끝에 탄생한 건강한 레시피가 요리할 때 찍어둔 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완성된 책을 보며 그때는 미친 짓 같았지만 결국 이렇게 쓰이는구나 싶어 또 눈시울을 적신다.
같이 잘 살고 싶어 세상을 디자인하다
긴 투병 생활을 마치고 3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간 아들은 어엿한 청년이 됐고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어린 아들에게 한 술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애면글면하던 엄마는 이제 아들을 통해 경험한 ‘기적’을 세상과 나누고자 한다. 굿사마리안레시피의 수익금을 떼어 소아암 환자들을 돕는 데 기부하고, 세인트루크마리는 동물과 자연을 위해 기부한다. 모스가든에서 파생한 ‘인디고가든’(갤러리아)은 재능은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티스트들을 돕고, ‘로얄테라스가든’(잠실 롯데)은 해외 노동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예정이다.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에 따라 선과 악으로 나뉘게 된다’는 경영 철학을 이렇게 실천하고 있다.논현동 모스가든 계단을 오르며 초록색 동판 위에 새겨진 코끼리의 의미가 궁금했다. 궁금증은 서은영 대표가 풀어줬다.
“코끼리는 부모를 잃은 아기 코끼리를 암컷 코끼리들이 조직적으로 돌보는 보육원 시스템을 가진 포유류다. 코끼리는 커다란 몸집에도 불구하고 작은 짐승이 앞에 있으면 길을 비켜 지나간다고 한다. 우리는 코끼리처럼 서로를 이끌어주고 기다려주며 상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코끼리를 심벌로 정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디자인하고, 삶을 디자인하고, 공간을 디자인하고, 음식을 디자인하고, 집을 디자인하며 같이 잘 살고 싶다.”(책 ‘굿사마리안레시피’에서)
모스가든의 모든 브랜드 뒤에 붙는 1919라는 숫자의 정체도 궁금했다.
“너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19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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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 사진제공 굿사마리안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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