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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diva

정수라의 슬기로운 가수생활

EDITOR 조윤

2019. 11. 10

‘라이브의 여왕’ ‘전설의 디바’ 정수라가 대중 앞에 성큼 다가왔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와 호흡하는 정수라의 음악 그리고 열정.

‘이제 그대 기쁨을 말해주오. 이제 그대 슬픔을 말해주오. 우리 서로 아픔을 같이할 때 행복할 수 있어요.’ 

노래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기쁨을 고조시키고, 슬픔을 위로해주고, 아픔을 다독여주는 존재. 1988년 발표된 가수 정수라(56)의 대표곡 ‘환희’의 가사는 마치 노래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게도 읽힌다. 노래와 같이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그 시절 정수라의 많은 곡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고, 대중은 응답했고, 세상은 환호했다. 1983년 ‘바람이었나’로 데뷔한 정수라는 그해 발표한 ‘아! 대한민국’이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며 KBS·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 곡은 당시 모든 가수의 앨범에 건전가요를 한 곡씩 넣게 한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혹자는 정수라를 두고 “엄혹한 시대에 숙명처럼 얽혀 슈퍼스타가 된 가수”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풀잎이슬’ ‘도시의 거리’ ‘난 너에게’ ‘환희’ 등을 꾸준히 히트시키며 ‘가요톱10’ 1위를 21번이나 거머쥐었다. 

근거 없는 악성 루머 등으로 활동이 뜸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발라드, 모던록, 트로트, 댄스, EDM까지 정수라는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며 꾸준히 신곡을 발표해왔다. 그리고 지난해 데뷔 35주년을 기념해 10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개최했다. 기존의 노래를 새롭게 편곡한 것과 신곡을 합해 열여덟 곡이 담긴 정규앨범 발매와 함께였다. 올해 11, 12월에도 서울과 부산에서 단독 공연을 연다. 공연의 제목은 ‘딜라이트(delight)’, 환희다. 

필라테스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와 두 귀를 시원하게 보여주는 경쾌한 쇼트커트, 치아를 활짝 드러내는 환한 미소로 강한 첫인상을 전한 그가 인사를 건넸다. 2019년, 정수라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고.



매스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어요. 어떻게 지내셨나요. 

가수니까 노래했죠(웃음). 9, 10월은 행사가 많아 정신없이 바빴어요. 지방 행사나 방송은 많이 하는데 활동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무래도 공중파 방송에 많이 출연하지 않기 때문인 듯해요. KBS ‘열린음악회’ ‘가요무대’ 정도밖에 제가 출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요. 그걸 제외하면 나갈 만한 게 예능 프로그램뿐인데 노래하는 방송이 아니면 선호하지 않는 편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 데뷔 35주년 기념 콘서트는 의미가 남달랐겠군요. 

이왕 할 거면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제가 생각한 그림이 나오려면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 쉽지 않았죠. 그런 가운데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도 겪어야 했어요. 가정사 등의 문제로 2012년부터 5년여간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전혀 여유가 없었어요. 이후 조금씩 회복하면서 데뷔 35주년을 맞이하게 됐는데 이번에도 안 하면 앞으로는 더 못 할 것 같아 용기를 냈죠. 공연 제목이 ‘뷰티풀 데이’였는데 이전까지는 험난하고 힘든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날들은 행복하게 채워가자는 의미였어요. 콘서트를 위해 7개월 전부터 무대 연출을 기획하고 제 노래들도 편곡을 새롭게 했어요. 마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노래, 신나는 댄스 스타일 곡, 기존에 하지 않았던 트로트까지 여러 장르에 도전했죠. 감사하게도 이틀간 열린 공연 티켓이 전부 매진됐어요. 

지난해 콘서트가 성공적이었던 만큼 올해 공연에 더욱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요. 

지난해 오신 관객들이 이런 디너쇼는 처음 봤다고들 하더군요. 보통 디너쇼 하면 앉아서 식사하면서 점잖게 공연을 관람하는 분위기잖아요. 저는 ‘수라나이트’라는 코너를 만들어서 모두가 일어나 클럽에서처럼 노는 분위기를 연출했어요. 한두 분이 일어나기 시작하니 나중엔 다들 엉덩이를 떼시더군요. 많은 분이 이 코너가 가장 좋았다고 하셨죠. 나이 때문에, 또 나이 든 외모 때문에 행동을 조심하는 건 있지만 음악을 통해 에너지를 주고받는 건 나이와는 상관없다고 느꼈죠. 사실 우리 모두 마음은 청춘이잖아요. 이런 공연을 매해 했으면 좋겠다는 팬들의 의견을 받아 ‘수라나이트’ 2탄을 준비 중이에요. 또 지난해에는 제 삶과 음악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엔 팬들과 함께하는 기쁨과 감동을 주제로 해요. 사실 어렸을 땐 발라드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건전가요로 뜨는 바람에 힘차고 밝은 이미지가 굳어져버렸어요. 제가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죠. 콘서트에서만큼은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곡들을 보여드리려 해요. 공연을 보고 나면 제대로 놀다 온 느낌, 힐링되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도록요.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느닷없이’ 슈퍼스타가 된 것에 대한 부담을 느끼나요. 

그땐 제 의사가 아니라 시스템이 모든 걸 결정했어요. 나이가 어리니 그저 시키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죠. 당시 정부의 사회정화위원회란 곳에서 온 국민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건전가요를 만들라면서 옴니버스 앨범을 제작했는데 제 데뷔곡 작사를 해주신 박건호 선생이 참여하면서 제가 ‘아! 대한민국’을 부르게 된 거예요. 당시엔 ‘바람이었나’ 같은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던 터라 전혀 다른 스타일의 곡을 시키니 하기 싫었어요. 가사 길이도 긴 데다 시대와는 맞지 않는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가사대로 세상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젠 좋아하게 됐어요. 다른 감성적인 곡도 많이 부르고 싶은데 워낙 이 노래로 굳어진 이미지가 강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요. 하지만 덕분에 저를 찾는 분들도 많고, 특히 해외 교포분들이 많이 좋아해주세요. 

왕성하게 활동했던 1980년대와 지금, 가수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뭔가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 긴장되는 건 지금도 똑같아요. 오히려 지금이 더 떨리기도 하고요. 물론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과 하나가 됐단 느낌을 받으면 긴장감은 사라지지만요. 저는 LP부터 CD, 디지털 음원을 다 경험한 세대예요. 음악이 디지털화되면서 사운드의 퀄리티가 업그레이드된 건 가수로서 좋은 일이에요. 이전에 한 곡을 완성하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던 데 비하면 지금은 매우 간소화됐죠. 하지만 라이브 밴드와 함께했던 예전의 무대가 훨씬 재미는 있었어요. 2009년 정수라밴드를 결성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공연에서는 라이브 연주와 디지털 연주를 섞으면 풍성한 사운드를 연출할 수 있어요. 지난해 발매한 35주년 앨범도 아날로그 방식(리얼 테이프 방식)으로 녹음한 걸 디지털화해 만들었죠. 디지털 방식으로 음악을 듣되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요. 


시원시원한 가창력이 트레이드마크지만 발표한 곡들을 보면 발라드, 모던록, 라틴댄스, EDM까지 장르가 다양해요. 

제 롤 모델이 조용필 선배님이에요. 대중가수 중엔 거의 유일하게 모든 장르를 섭렵하셨죠. 포크, 록, 발라드, 팝, 심지어 민요까지도요. 저도 그런 선배님처럼 되고 싶었어요. 어떤 한 가지 장르만 고집하고 싶은 마음은 없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장르의 곡에 계속해서 도전해보는 거예요. 35주년 기념 앨범만 봐도 굉장히 정적인 발라드도 있고(‘사랑을 다시 한 번’ 등), 정수라밴드를 결성했을 때 작업한 모던록(‘뷰티풀 데이’)도 있어요. 타이틀 ‘업 고! 업 고!’는 요즘 세대에게 익숙한 EDM 스타일의 라틴댄스 곡이죠.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뭔가요. 

‘아버지의 의자’요. 박건호 작사가님이 써주신 곡이죠. 그분을 처음 본 게 중학생 때예요. 제가 광고 CM송 녹음하는 모습을 보고는 꿈이 뭐냐고 하시기에 가수라고 했더니 성인이 되면 같이 작업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땐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죠. 그런데 정말로 데뷔곡 ‘바람이었나’를 함께했고 이후에도 ‘도시의 거리’ 등 제 곡 가사를 많이 써주셨어요. 제 가정사까지 다 아는 막역한 사이였죠.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이 써주신 곡이 ‘아버지의 의자’예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가사를 많은 분이 공감하시죠. 

오랫동안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 ‘효녀 가수’라 불리기도 해요. 

저는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요. 사실 오랫동안 가족과 살다 보니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 시간도 있었죠. 솔직히 그럴 수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혼자 살아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 결혼이 그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혼 후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지금은 ‘이게 나의 운명이다’ 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요(웃음). 어머니는 내년에 연세가 아흔이신데 아직도 제 밥을 직접 차려주세요. 엄마들 마음은 다 그런가 봐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짠하죠. 저도 예전엔 어머니께 살갑게 못 했어요. 저 효녀 아니에요. 자기 부모에게 잘하는 건 당연한 거죠. 

국제위러브유운동본부에서 주최하는 새생명 사랑의 콘서트에도 6년째 참여하는 등 재능 기부와 이웃 사랑 실천에도 적극적인 걸로 유명해요. 

처음엔 단순한 음악 콘서트로 알고 참여했어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고 정말 놀랐죠. 어떤 곳인지 알아보니 50여 개국에 1백 곳이 넘는 지부를 두고 아동·노인복지, 긴급구호, 환경복지 등에 힘쓰는 글로벌 단체더군요. 30여 년간 복지 활동을 해오셨다고 해요. 다들 열정이 대단하세요.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께 에너지를 드릴 수 있어 저도 보람을 느껴요. 

지난해엔 에티오피아 해외 봉사도 다녀왔어요. 특별한 경험인 만큼 느낀 바가 컸을 듯해요. 

국제 구호단체를 통해 일주일 동안 에티오피아 어린이 3명을 만나고 왔어요. 항상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단 생각은 해왔지만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선 건 처음이었죠. 사실 가기 전까지는 먼저 눈물을 보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컸어요. 힘들게 사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데 그들을 동정하는 것처럼 보여선 안 되잖아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에서 흙탕물을 마시며 사는 아이들의 환경이 제가 겪어온 힘든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죠. 그런데 그런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을 생각하더군요.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최근에는 아이들이 집도 다시 짓고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 나이가 돼서야 조금이라도 남을 돕는 일을 했구나 싶었죠. 

가수로서, 또 인간 정수라로서 앞으로의 목표는 뭔가요. 

가수가 아닌 정수라는 생각할 수 없어요. 다시 태어나도 가수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연기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노래하는 정수라로서의 삶과 함께 다른 길에서 다양한 인생을 살아보고 싶거든요. 인생을 되돌아보면 크게 변화가 없었던 것 같아요. 내 안에 있는 걸 다 보여주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어요. 사실 무대 위에서의 순간적인 감정 표현은 가수도 배우 못지않거든요. 물론 지금도 제 안의 다양한 감정을 음악으로 다 표현하고 있는 셈이에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다 해보고 있으니까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보라고요? 어휴, 전 예능감도 없고 예능을 하기엔 겁도 많고 여리답니다(웃음).

기획 김명희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제이뮤직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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