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희가 찍은 사진은 2D 지면에 갇히지 않고 대중에게 회자되며 곱씹힌다. 최근 그가 찍은 ‘관상’ 포스터는 “9백만 흥행 성적의 절반이 포스터 덕”이란 평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쯤이면 ‘내가 제일 잘나가’라며 어깨에 힘을 줘도 될 법한데, 오히려 ‘스타 작가=조선희=기가 세다’는 묵은 이미지를 조금씩 벗겨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룩해놓은 완장을 풀고 상대방과 마주 앉아 걸쭉한 웃음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무모했지만 뜨거웠던 시작
조선희는 TV에 처음 모습을 비칠 때부터 이미 화려했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만큼 많은 연예인들과 작업하며 그들을 친구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사진작가. 독특한 뿔테 안경을 쓰고, 걸걸한 목소리로 화통하게 소리치는 저돌적인 포토그래퍼 조선희. 하지만 그에게 당시는 화려함보다 무모함에 더 가까운 시절이었다.
“학교 동아리에서 사진을 시작해 김중만 선생님 어시스턴트를 3년쯤 하면서 모은 2천만원을 들고 1998년 무작정 뉴욕에 갔어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그는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를 졸업했다)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던 거죠. 아무 준비 없이 떠난 터라 막상 두 달 정도 지내보니 제가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입학 준비를 해나가는 과정이 결국 시간 낭비 같더라고요.”

“무모하게 시작했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서울 합정동 집에서 압구정 스튜디오까지 오가는 비용이나 시간을 계산해보니 스튜디오에서 살아야 절약이 되겠더라고요. 스튜디오가 지하에 있어서 한겨울에는 너무 추웠죠. 천장은 높지, 사람의 온기는 없지, 한 2년은 스튜디오에서 살았는데 춥고 배고팠죠.”
그가 경제적으로 어깨를 펼 수 있었던 때는 2002년쯤. 그때까지 화려한 스타들과 어울리면서도 가끔 소주 값 내는 정도 외에는 명품 한번 산 적 없이 검소하게 살았다. 스튜디오 살림이 피기 시작하자, 아예 땅을 사서 지금의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갖고 있는 돈보다 빌린 돈이 더 많아서 남들 눈에는 무모하게 보였겠지만 세상 물정에 눈이 어두워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제가 5남매 중 셋째거든요. 저희는 어릴 때부터 거저 받은 용돈이 없어요. 제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오랫동안 장사를 하셨는데, 물엿 24kg을 배달하면 1천원을 주셨어요. 가게에서 물건을 팔면 자기가 판 물건 값의 5%를 주셨죠. 일한 만큼 돈을 받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경제 관념이 정확히 박혔죠.”
갚아나가야 할 돈이 많아서 버는 데 급급했을 것 같지만, 그는 한 번도 사진을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이는 단지 자신의 순수성을 주장하려는 변명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그 뒤에 명성과 돈이 따라온다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제 꿈이 한 달에 50만원만 버는 사진가가 되는 거였어요. 20년 전 기준으로 식비, 차비, 월세를 계산해보니까 50만원이면 살겠더라고요. 사진 찍는 거 자체만 순수하게 하다 보면 이름도 알려지고 그다음에 돈이 따라오는 거지, 그 반대가 되면 오래 할 수가 없을 것 같았죠. 지금까지 수많은 유혹들이 있었거든요. 웨딩 사진을 찍자, 가방 사업을 하자,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자 등등.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거고, 제가 아끼는 피사체를 팔아서 유명해지는 건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클라이언트의 입맛에만 맞추지 않겠다는 것.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를 때, 단순히 돈을 벌려고 했다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사진만 잘 찍어서 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도 찍고 제가 원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아요. 둘 다 잘 찍어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결국 사진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쪽이 더 잘 나올 수밖에 없거든요.”

“어떤 날은 몸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어요. 그래도 무작정 찍는 거예요. 하지만 정작 몰입해서 찍다 보면 그 사진 안에 답이 들어 있더라고요. 첫 번째 컷을 한 3백, 4백 장 찍어놓고 쭉 보면 그 안에 제가 담고자 했던 사진이 있거든요. 그럼 다음 컷을 찍을 수 있는 거죠. 구해야 얻어지는 거지,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어요.”
결국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는 다른 말이었다. 이는 그가 여전히 목말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를 써니라 불러다오

“예전에는 남들도 나랑 똑같을 거라는 생각에 상대방이 힘들어하는 줄도 모르고 오직 좋은 사진 한 장 찍겠다고 경주마처럼 막 달려갔죠. 한번은 헤어와 메이크업이 제 의도와는 달라서, 어떻게 찍어도 원하는 사진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담당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걸 더 잘할 만한 사람을 섭외해서 바로 불러왔어요. 그렇게 무사히 촬영을 마쳤는데, 그 후로 그 배우는 다시는 저와 사진을 찍지 않았죠. 건너 들은 이야긴데, 자신의 스태프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도 맞아요. 사진을 잘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다고, 이제는 생각해요. 그분에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어요.”
반면 열대야에 시달리던 한여름 밤 화학 약품 냄새가 진동하던 도색 상자 속에 들어갔던 정우성, 물에 빠지고 얼굴에 페인트를 뒤집어써야 했던 이정재 등 많은 스타들이 그를 친구·누나·언니·동생이라 부르며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같이 술을 마시고, 다시금 그의 카메라 앞에 선다.
“저는 뛰어난 화술가도 아니고, 관계를 잘 이끌어가는 지략가도 아니에요. 예쁘다, 멋있다는 말도 잘 못하고요. 저는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못해요. 세월 지나면 다 친구가 되죠. 제가 욕을 잘한다는 말 들으셨죠?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못하는데,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한테는 막 욕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는 아직도 답을 내지 못했다.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전히 사회성을 위해 좋은 사진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진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는 눈을 가지면서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그것을 사진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포스터를 1996년에 처음 찍었는데, 본격적으로 찍은 건 2011년부터였죠. 어렸을 때 영화 포스터를 많이 안 찍은 건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확실히 어렸을 때보다 지금 더 많은 것이 보이거든요.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차이일 수 있지만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그 말, 그게 명언인 것 같아요. 디테일의 차이가 사진 한 장의 가치를 결정짓거든요.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생각의 범위가 발전해가는 거죠. 일을 하면서 경험으로 배우는 것이 훨씬 많아요.”
‘일하기 쉽지 않은 사진작가’란 이미지를 가졌던 그에게 배려와 사회를 둘러보는 시각을 가져다준 것은, 부인할 수 없이 그가 엄마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를 낳은 후 포토그래퍼로서 위기를 맞았고, 그 위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조선희는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2006년 아이를 낳고 10개월 정도 쉬고 복귀를 했는데, 이런 말 하면 아무도 안 믿지만 한 3개월 동안은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당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도 쟁쟁해서 힘들었죠. 그래서 약간의 우울증도 있었고요. 그래도 디지털 카메라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계속 준비를 했죠. 일이 하나, 둘 들어왔을 때 저는 그 전보다 훨씬 열심히 했어요. 열정적으로 달려들었죠. 아마 그때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조선희는 없었을 거예요. 오만해졌겠죠.”
2004년 대한축구협회 전임강사 송경섭 씨와 결혼해 낳은 아들 기휘는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된다. 아들에게 그는 ‘무서운 엄마’이자 ‘든든한 엄마’다. 밤늦은 귀가로 아이의 숙제를 돌봐주지 못하는 날이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엄마랑 숙제를 하고 싶다”는 아들이다.
“아직까지는 엄마 노릇은 진심만 있으면 문제 될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또 아내 노릇은 달라요. 진심이 있어도 같이 이야기할 시간이 부족하거나 하면 부부 간에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로 싸우기도 하고요. 남편은 운동을 해서인지 굉장히 남자답거든요. 서로 이기려고 하면서도 서로 더 많이 양보하고 있다고 생각하죠(웃음).”
“들리는 말로는, 남편 앞에서는 애교 많은 아내라던데?”라고 물으니 24년 지기 친구 서수민 PD 이야기를 꺼낸다.
“대학생 때부터 어울리던 친군데, 그 친구는 항상 저한테 ‘천생 여자’라고 해요. 겉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여리고 눈물도 많다는 걸 그 친구는 알죠. 어찌 보면 결핍에서 오는 감수성이죠. 형제들이 많은 탓에 조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 생긴 감수성이 사라지진 않더라고요. 제 아들은 아빠의 영향 때문인지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데, 한편으론 여린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저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일하기 불편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냥 ‘써니’라고 불리면 좋겠고요. 언제까지 살진 모르겠지만 70, 80세가 넘어서도 써니라고 불리며 필드에서 활동하는 작가이고 싶어요. 그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 참고도서·조선희의 영감(민음인)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