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 들어서면 “큐티, 섹시, 키티, 낸시. 앙!” 하고 특유의 발랄함으로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다. 그러면 “나도, 앙!”이라고 화답할 터였다. 하지만 인터뷰를 약속한 그 시간, 그곳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 시간,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가 등장했다. 팝아티스트 낸시 랭(35·본명 박혜령)이다. “죄송해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낸시 랭은 맥없이 기다리는 취재진의 모습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거듭 사과의 인사를 전했다.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연신 가쁜 숨소리를 내쉬었고 두 뺨은 붉게 상기된 채였다.
3월 14일 서울 청담동 TV12 갤러리에서 낸시 랭을 만났다. 이날은 그의 13번째 개인전 ‘낸시 랭과 강남 친구들(3월 14일~4월 6일)’의 오프닝 날이었다. 갤러리에 도착한 낸시 랭은 숨을 고를 새 없이 분주하게 오가며 인터뷰와 사진 촬영에 응했다. 특별히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기자들의 어떠한 질문에도 술술 답변을 내놓는다. 그럼에도 워낙 많은 취재진이 몰려 오프닝 시간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분신인 고양이 인형 ‘코코 샤넬’도 함께였다. 낸시 랭은 의자에 앉자마자 “실은 아침에 링거를 맞았다”며 전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소에도 스케줄이 많지만 어제는 유난히 많았어요. TV 프로그램 생방송과 녹화, 그리고 인터뷰까지 겹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스케줄을 마친 뒤에는 전시회 디스플레이를 하느라 밤늦어 귀가했고요. 새벽에서야 침대에 누웠는데 긴장이 쫙 풀리면서 몸살기가 돌았어요. 순간 큰일이다 싶었죠. 오늘 오프닝은 물론이고, 해외 촬영과 인터뷰 등의 일정들이 꽉 차 있었거든요. 그래서 날 밝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 링거를 맞았어요.”
듣는 사람마저 숨이 턱 막히게 하는 낸시 랭의 빽빽한 스케줄. 이쯤 되면 그만의 인사말에 ‘비지(Busy)’를 추가하는 게 맞지 싶다. ‘큐티, 섹시, 키티, 비지, 낸시. 앙!’ 하고 말이다.
풍자의 대상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홍익대 미대 출신의 팝아티스트 낸시 랭. 그만큼 일거수일투족이 매번 큰 화제가 되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국내외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와 그림은 물론이고 말과 행동, 패션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것이 대중의 레이더망에 포착되곤 한다. 또 예능 프로그램이건 보수 논객과 설전을 벌이는 시사 프로그램이건 방송에 출연했다 하면 인터넷 검색어 1위는 그의 차지다. 낸시 랭은 말한다. “그동안 어마어마한 욕을 들어봤다”고. 실제로 낸시 랭을 바라보는 사람들 십중팔구는 “왜 저래?” 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4·11 총선 투표 독려 앙 퍼포먼스’와 ‘12·19 대선 투표 독려 앙 퍼포먼스’ 그리고 SNS를 통한 정치적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에게 ‘종북’이라는 꼬리표까지 달렸다. 이에 낸시 랭은 “사회·정치적인 콘셉트의 퍼포먼스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이번 개인전에 대해서는 전시의 의미와 더불어 꼭 정정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개인전 ‘낸시 랭과 강남 친구들’은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드로잉, 콜라주, 사진, 오브제 등을 주로 선보인 이전 작품들과 달리 유화 작업은 처음이거든요. 유화의 특성상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고요.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서 작업에 몰두했는데도 꽤나 오래 걸렸죠. 이번 작품들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를 비롯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마이클 잭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그야말로 거물급 인사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전혀 없고요(웃음). 그런데 왜 강남 친구들이냐? 국적과 인종과 신분을 떠나 자연인으로서 함께 강남에서 놀아보자는 의미예요. 저의 분신인 코코 샤넬을 어깨에 올리고 팝아트로써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었고요. 한데 혹자는 이들 인물을 풍자한 것이 아니냐고 묻더군요. 심지어 기정사실인 양 보도한 매체들도 많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아니고요,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를 풍자한 것입니다.”
작품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낸시 랭은 최근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중 하나가 과다노출 경범죄 처벌과 관련해 올린 SNS 글과 사진이었다.
“얼마 전 TV에서 과다노출을 범칙금(5만원) 부과 대상으로 신설한다는 뉴스를 봤어요. 때마침 지갑에 5만원권 지폐가 있기에 ‘나 잡아봐라, 앙!’이란 글과 사진을 SNS에 게재했죠. 이를 본 네티즌들은 제가 신사임당을 모독했다며 맹비난을 퍼부었어요. 아티스트로서 퍼포먼스를 한 것인데 말이죠. 이전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를 통해 백만 안티를 다시 한 번 실감했고요.”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낸시 랭은 꼭 해보고 싶은 퍼포먼스로 ‘전 세계 역사적인 장소에서 알몸으로 전력 질주’를 꼽은 바 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숨소리와 시간 등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낸시 랭의 의도보다 ‘역사적인 장소’와 ‘알몸’에 집중하며 욕을 해댔다.
“아무런 생각 없이 미친 여자처럼 알몸으로 뛴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담과 이브처럼 자연인으로서,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옛 시간들을 느끼고 싶은 아티스트의 마음이자 행위를 표현한 것이죠. 가만 보면, 팝아티스트 낸시 랭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하기보다 어떻게든 이슈 거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듯해요. 이제는 제발 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지 말고 달도 봐주면 좋겠어요.”
도전하거나 혹은 도전적이거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 구분하고 규정짓기를 참 좋아한다. 그래서 아트와 미디어를 넘나드는 낸시 랭의 정체성을 궁금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는 작품 활동을 해오는 동안 ‘아티스트냐, 연예인이냐’란 질문을 숱하게 받아왔다. 그럴 때마다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대답을 한껏 쏟아냈지만 편하게 이해하는 이가 별로 없었단다. 그래서 정한 수식어가 ‘국내 최초 연예인형 아티스트’다. 이와 함께 자칭 ‘걸어 다니는 팝아트’라 칭하며 자기 자신이 하나의 작품이 돼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지난해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통해 연극에 처음 도전한 것도 그래서다. 사실 캐스팅 제안을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정통 연기자도 아닐 뿐더러 연기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반면 제작진은 낸시 랭의 퍼포먼스를 지켜보며 연기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겼다.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세계적인 작품인 데다 국내 최고의 연극·뮤지컬 배우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용기를 냈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죠? 제가 딱 그랬어요(웃음).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든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고, 정말 좋은 경험이었죠. 특히 이지나 연출가가 ‘배우 기질을 타고났다’고 칭찬해줘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낸시 랭은 캐릭터가 자신과 맞는다면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할 것이라고 했다. 상상하고 도전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해서다. 이렇게 낸시 랭이 도전을 즐기는 데는 부모의 영향이 지대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무역업 등으로 성공한 부모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낸시 랭.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그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인생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부모는 자식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관심사를 인정해주었다. 그 덕분에 낸시 랭은 또래들보다 오감이 빨리 열리고 자유로운 사고를 갖게 됐다고 한다.
1 낸시 랭이 2년간 작업한 회화 작품들. 마이클 잭슨, 오바마 대통령 등의 어깨에 자신의 고양이 인형 ‘코코 샤넬’을 얹었다. 전시 제목은 ‘낸시 랭과 강남친구들’. 2 자신의 작품 앞에서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재미있는 모습을 연출한 낸시 랭.
연애는 열정적으로, 결혼은 클래식하게
올해로 서른다섯이 된 낸시 랭. 문득 나이를 깨닫고는 그의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 계획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요즘 연애하세요?” 하고 다짜고짜 물었더니 “저는 항상 사랑을 합니다”라는 알쏭달쏭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동안 방송과 인터뷰에서 수없이 말해왔듯 낸시 랭의 이상형은 ‘뇌가 섹시하고 인류애적인 마인드를 가진 남자’다. 그리고 낸시 랭의 연애 스타일은 한마디로 열정적이란다. 상대가 마음에 들면 고백도 서슴지 않는데 이왕이면 남자가 먼저 고백하는 게 좋다고. 열정적으로 연애하는 낸시 랭도 밀당(밀고 당기기)이란 걸 할까 싶어 물었더니 “그런 거 싫어해요. 설령 밀당을 한다 해도 나중에 다 들키고 마는걸요”라고 한다.
“제가 꿈꾸는 결혼식이요? 의외로 저는 보수적인 면과 개방적인 면이 공존하는 스타일이에요. 결혼식의 경우 보수적인 제 성향에 따르려고요. 아주아주 클래식한 결혼식!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서 언론 비공개로 진행할 계획이에요. 최대한 복잡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피하고 싶거든요.”
낸시 랭은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부모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 자식에게 최고의 환경,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또 자신의 부모가 그러했듯 자식이 어릴 적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가치관을 확실히 심어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저의 부모님처럼 기본적으로 부(富)를 갖춰야겠죠. 그렇다고 해서 돈을 목적으로 살지는 않으려고요. 돈이라는 것은 꿈을 좇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평생을 좇은 꿈은 아트예요. 죽을 때까지 아트를 하고 싶어요.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리라 믿어요.”
‘나는 실행할 거야’라는 인생 모토처럼 가슴에 품은 꿈, 머릿속에 그린 상상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팝아티스트 낸시 랭. 예술과 자유로 세상과 콜래보레이션하는 그의 발걸음이 오늘도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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