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한 화실에서 서은정(18) 양을 만났을 때 그저 말수가 적고 수줍음 많은 소녀로만 보였다. 서울예술고등학교에 다니는 은정 양은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이곳을 찾아 작업에 몰두한다고 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예닐곱 시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단다. 그런 노력은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첫 개인전을 열며 빛을 보았다. 그것도 입주 작가나 기성 작가 중에서도 엄격한 심사 기준을 통과한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준다는 성북예술창작센터에 당당히 자신의 작품을 걸었다.
사실 고등학생이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것도 어렵지만 미술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이른바 ‘입시 미술’을 준비해야 한다. 은정 양도 ‘입시 미술’에 열을 올려야 할 시기지만 아직은 그가 원서를 낼 수 있는 학교가 국내에는 없다. 실기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은정 양의 어머니 조순옥(49) 씨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은정 양을 지도해온 정선주 작가는 은정 양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대학 졸업장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재능을 가진 아이에게 정당한 대학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함이다.
“최근 다운증후군 학생이 한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 측에 문의를 했더니 미술학과는 해당 사항이 없더라고요. 하지만 계속 두드리면 문이 열릴 거라고 믿고 있어요.”
조순옥 씨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는 대학 입시가 딸이 넘어서야 하는 또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은정 양은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통합교육 유치원에 보내려고 경기도 일산에서 서울 강동구 천호동으로 이사를 했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교육청과 인권위원회 문턱이 닳도록 뛰어다닌 것을 생각하면 ‘두드려서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는 믿음이 생길 만도 하다.
“법 규정에는 장애인도 ‘각종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고 돼 있는데, 지원 가능한 고등학교 배치도에는 예술고를 비롯한 특목고가 제외돼 있더라고요. 교육청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안 된다는 말씀뿐이었죠. 결국 인권위원회를 통해 장애인에 대한 특수목적 고등학교 입학 거부는 간접적인 차별이라는 진정서를 제출했어요.”
서울예고 지적장애인 최초 입학생
따지고 들면 장애인의 특목고 진학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법에 차별금지가 명시돼 있고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장애인의 경우 학생 상황을 고려해 시험 시간을 확대하거나 도우미를 배치하는 등의 특례를 적용해 입학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험이라는 게 대학 입시와 마찬가지로 여지없이 중학교 내신 성적을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걷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라는 것과 같아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불쌍하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보다 어느 분야에서는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었죠.”
은정 양은 비록 세상과의 소통은 서툴지만 그림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바람은 인권위원회 담당자를 움직였다. 은정 양의 그림을 보고는 영화 ‘레인맨’이 생각난다며 조씨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인권위원회의 도움으로도 교육청까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세 번에 걸친 시도가 물거품이 됐을 때, 때마침 서울예고에서 열린 ‘전국미술실기대회’가 그 단단한 옹벽을 허물어줄 물꼬가 돼주었다. 은정 양의 작품이 입선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전국의 재능 있는 학생들이 모두 모인다는 대회에서 실력만으로 인정받았고, 어머니는 당장 딸의 작품을 들고 교육청을 찾았다. 장애인 미술대회가 아닌, 비장애인들이 경합을 벌이는 대회에서 당당히 입선한 작품이 철옹성 같은 교육청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은정 양은 남들보다 힘들게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물론 은정 양의 학교생활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친구가 없는 걸 가장 힘들어했어요. 은정이는 친구도 좋아하고 사람들도 참 좋아하는데,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주지 않으면 은정이가 먼저 다가갈 수가 없대요. 불안지수가 높고, 두려움이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쉬는 시간에도 그림만 그리다 보니 친구들이 다가오지 않고, 그런 악순환의 연속인 거죠.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애잔하기도 해요. 친구들이랑 어울려 재잘거리고 놀러 다니는 게 자연스럽고 예쁠 때잖아요.”
1 딸의 재능을 발견하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조순옥 씨. 2 목사인 아버지 서경원 씨는 모녀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3 4 5 6 7 은정 양은 지난 11월 기성작가들도 작품을 걸기 어렵다는 성북예술창작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작품 활동에서만큼은 또래들에게 뒤지지 않았고 실력도 날로 향상됐다. 개인전을 열 만큼 여러 작품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방학이 끝날 때마다 제출해야 하는 실습 작품에서 늘 최고 점수를 받고 있다. 정선주 작가도 은정 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은정이는 재능도 있고,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앞으로 비장애 예술인들의 무대에서 은정이가 어떤 작품으로 어떤 관계를 형성해갈지 기대가 돼요.”
다섯 살 때 발달장애 진단… 화가가 되기까지
정선주 작가와 은정 양은 서울문화재단에서 시행하는 ‘예술로 희망드림 프로젝트-꿈나무 키움’을 통해 만났다. 저소득층 가정 자녀에게 순수예술 실기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예술 전공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선발해 학원 수강료를 지원해주거나 멘토를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전국적으로 대여섯 명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멘토 작가들도 서울시 창작공단 입주 작가 및 관련 작가들로만 구성돼 있다. 그 ‘꿈나무 키움’ 프로젝트에 중학교 3학년인 은정 양이 선발됐고, 멘토 매칭을 통해 정 작가와 만났다.
“비 오는 날, 남산에서 은정이를 처음 만났죠(웃음). 사실 처음에는 걱정도 됐지만 막상 만나보니 너무도 맑고 순수한 모습에 안심이 됐어요. 은정이는 전문 미술 용어도 몰랐고 기법도 서툴렀지만 분명 재능이 눈에 보이는 아이였죠.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교육시키려고 했어요. 오히려 은정이의 특별한 사연 때문에 특혜를 준다고 오해하는 시선이 있을까봐 그게 더 조심스러웠죠. 물론 여러 번 반복적으로 설명해야 했지만 한 번 습득한 내용은 절대 잊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은정이 스스로가 한계를 극복하더라고요.”
정 작가와의 만남은 은정 양의 인생을 뒤흔드는 기회였다. 지적장애인 중에는 예술적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많고, 예술가로 활동하는 작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장애인의 특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예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장애인 예술가들만이 갖는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그런데 은정 양은 정 작가를 만나면서 ‘장애인’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멘토 지원 기간이 애초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 작가는 ‘작업실’ 차원에서 지금까지 멘토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조순옥 씨가 딸에게 발달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림 때문이었다.
“은정이가 너덧 살쯤 됐을 때 매일 혼자 앉아서 색종이를 오리고 그림을 그렸어요. 방 안이 온통 색종이 천지였죠. 그려놓은 그림은 특정한 형태가 없었고 단순히 검은색처럼 짙은 색깔로 빽빽이 칠해놓은 게 전부였어요. 보통 아이들도 단순한 행동을 반복한다지만 은정이는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아서 발달아동장애센터에 찾아갔죠. 자폐 성향이 있는 발달장애 2급 판정을 받았어요.”
조순옥 씨는 당시 심정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많이 울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했다. 딸을 임신했을 때 조씨는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태아로 인해 더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 위험한 선택을 했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좌절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남자의 자격-패밀리 합창단’ 멤버들과 함께한 은정 양 모녀. 은정 양에게 합창단에서의 따뜻했던 경험은 세상으로 한 발 내딛는 좋은 자극이 됐다.
“장애는 극복되는 게 아니에요. 극복할 수 있는 거라면 그건 장애가 아닌 거죠. 지금 은정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도 장애를 극복한 것은 아니잖아요. 장애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발견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한참을 펑펑 울었던 기억도 있어요. 한강에서 자가용 핸들을 돌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분노, 좌절, 원망은 비슷한 경험을 한 부모들에게 비슷하게 찾아오는 감정이죠. 거기에서 누군가는 포기를 하고, 누군가는 희망을 찾는 것 같아요.”
딸 재능 찾기 위해 발레·피아노에도 도전
조순옥 씨가 분노, 원망, 좌절의 시기를 건너 선택한 것은 딸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잘하는 것’을 찾는 것이었다. 처음 시도했던 것은 발레였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생활비가 70만원일 때, 그는 25만원의 강습료를 내며 딸에게 발레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랑 플리에와 드미 플리에를 구분하지 못하는 딸이 하루 종일 벌만 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포기했다.
그다음 도전은 피아노. 딸은 천재적이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는데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한 것이 미술이었다.
“처음 아이가 스케치북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놓아서 ‘이것도 아닌가’ 싶어 좌절했어요(웃음). 그런데 생각을 바꿔보니 그림을 좋아해서, 집착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미술을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어요. ‘미술 치료’를 하는 곳이 있었지만 미술 기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미술로 심리를 치료하는 곳이었죠. 동네 미술 학원도 보내봤지만 아이의 창작 능력에 힘을 실어주기에는 역부족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입시 미술 학원에 보냈어요. 거기에서 미술의 기초를 배웠죠. 중학생 때는 방과 후 미술 수업을 받았고요.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갑자기 예술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꿈나무 키움’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여러 방법을 모색하게 됐죠.”
지금 은정 양은 여전히 계산이 서툴고, 어려운 단어는 잘 이해하지 못하며, 또래의 학과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딸의 지갑에 만원짜리를 넣어준다. 몇백원짜리 물건을 사면서도 만원을 내야 마음이 편한 딸을 위한 배려다. 셈이 틀려 돈을 덜 내게 됐을 때 겪는 사소한 일상이 은정 양에게는 두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이 일상적인 일들에 천천히 적응하기를 바랐다. 부모가 늘 곁에 있어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서툴더라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부모의 바람대로 은정 양은 얼마 전 자폐 성향이 없는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자폐증은 완치될 수가 없다고 했지만 경증이어서 그랬는지, 부모의 노력 덕분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회 속에서 융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은 것만은 사실이다.
“애시당초 학습은 포기했던 것 같아요. 물론 특수교육을 통해 학습 능력을 조금 더 발달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한계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 한계적인 학습 능력을 빨리 발달시키려고 특수교육 대상자들만 모여 생활하다 보면 일반 사회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울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죠. 조금 더디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죠. 그래서 특수교육이 아닌 비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통합교육을 선택했어요. 그래서인지 사회생활에 더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 같아요.”
조씨의 말처럼 은정 양은 화실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말이나 눈빛, 표정으로 건네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서툴렀지만 엄마나 선생님, 화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큼은 여느 여고생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은정 양의 그림에도 그런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어렸을 때는 전철이나 기차 소리도 듣지 못했던 아이가, 밥솥의 추가 울리는 소리도 무서워하던 아이가 이제는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수줍은 소녀가 됐다. 그 여유로움은 볼이 발그레한 금발 인형에서, 고운 레이스에 폭 쌓인 소녀 인형에서, 소담스러운 꽃에서 포근함으로 표현된다. 세상과 소통하는 데 서툴다던 은정 양이었지만 그 두려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은정 양의 노력이 엿보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려요. 인형, 꽃, 또 먹고 싶은 것들이요. 그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면 좋겠어요.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려고 해요. 그림 그리는 게 힘들지만 행복해요.”
행복한 작가가 그린 그림은 보는 이에게도 행복을 선사한다. 은정 양의 그림 또한 인형의 머리를 빗겨주고, 팔베개를 해주며 잠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그 시절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패밀리 합창단’으로 세상과 인사
얼마 전 은정 양은 그림이 아닌, 노래로 세상으로 과감한 외출을 시도했다. KBS ‘남자의 자격-패밀리 합창단’에 오디션 신청을 한 이는 어머니 조순옥 씨. 오디션이 있던 3일 전까지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은정 양을 설득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끝까지 망설였던 방송 출연이었지만 막상 오디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은정 양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단다.
“오디션을 보고 나서, 연습하는 내내 은정이가 그렇게 행복해할 수가 없더라고요. 학교에서는 본인이 다가가지 않으면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지만 합창단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다가와 은정이에게 말을 걸어 주었으니까요. 너무 착한 형빈 씨, 가장 친하게 지낸 재민이, 아이비 씨가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셨는지 몰라요. 김태원 씨와는 비슷한 처지라 그런지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었고요.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들께 감사할 뿐이죠. 형빈 씨는 은정이 개인전에도 찾아주셨어요. 너무 감사하죠.”
은정 양도 ‘패밀리 합창단’ 이야기가 나오자 배시시 웃음부터 지어 보였다. 은정 양은 “너무 재미있었어요. 웃겼어요” 하며 합창단원들과 MT를 갔을 때 아침 방송을 하던 개그맨 김준호 흉내를 냈다.
“이준 오빠, 준호 아저씨, 형빈 삼촌, 윤조 언니, 아이비 언니, 재민이, 주상욱 오빠 다 보고 싶어요.”
누구는 삼촌이고, 누구는 아저씨고, 누구는 오빠라고 구분 짓는 은정 양의 재치가 유쾌했다. 9월부터 시작해 11월까지 3개월간의 여정은 은정 양에게 특별한 추억이 됐다. 학교생활 하랴, 개인전 준비하랴, 합창 연습하랴, 거기에 금난새 지휘자에게 선물할 초상화도 그리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힘든 줄도 모를 만큼 들뜨고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금난새 지휘자에게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선물하던 순간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은정 양은 “(금난새 지휘자의) 움직이는 팔을 그림으로 그리는 게 힘들었어요”라며 웃었다.
방송 출연 이후 은정 양은 더 밝아졌다. 학교생활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방송 봤다”며 먼저 말을 건네는 친구들이 생겼고 어느 날은 ‘친구와 함께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었다’며 즐거워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은정이에게는 친구와 함께 팔짱 끼고 매점에 갔다는 사실이 엄청 큰 사건이었겠죠.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못하고 올 때도 많았으니까요. 얼마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을지…. 장애인 가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에요. 물론 저부터도 장애인에게 먼저 다가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거든요. 그것은 낯설고 어색하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장애인이 드라마나 영화 또는 광고 등에 더 자주 등장하면서 비장애인에게 익숙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남자의 자격’ 오디션에 참가했던 거죠. 은정이뿐 아니라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시선으로 바뀌지 않을까요. ”
조순옥 씨는 딸이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자신이지만 자신에게 그런 용기를 준 것은 딸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그 문을 열기까지 도움의 손길을 보태준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딸을 키우며 어머니 자신도 공부를 해야 했고, 그것을 토대로 지금은 일반초등학교에서 특수교육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적장애인이 세상과 소통하는 데 서툴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서은정 양을 만나보니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데 서툰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다가가는 법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럼에도 은정 양은 세상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말이나 눈빛, 표정은 수줍었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이토록 맑고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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