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첫 방송을 시작한 채널A 주말드라마 ‘판다양과 고슴도치’는 슈퍼주니어 동해, 차세대 로코퀸 윤승아 등 요즘 가장 핫한 스타들의 출연으로 주목받는 드라마. 하지만 제작발표회에선 원로 배우 박근형(72)의 인기가 으뜸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그에게로 쏠렸고, 사진을 찍기 위에 포토월로 걸어갈 땐 박수가 쏟아졌다. 드라마 ‘추적자’에서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를 지닌 재벌 회장을 연기했던 그가 손자들을 바라보는 인자한 할아버지같이 웃었다. 순간 그의 본모습은 어떨까 궁금했지만 54년 동안 캐릭터에 묻혀 살아온 그다. 그의 내면엔 어쩌면 자연인 박근형보다 배우 박근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우의 재산은 상상력과 훈련
최근 종영한 ‘추적자’는 그의 연기 인생의 화룡점정이다. 이 드라마는 초반 손현주(백홍석)와 김상중(강동윤)의 연기 대결로 관심이 모아졌지만 뚜껑을 열었을때 정작 화제가 된 것은 박근형의 연기였다. 전화 한 통으로 대한민국을 주무르면서도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한 한오그룹 서 회장 역을 맡아 원로 배우로서 카리스마와 관록의 절정을 보여줬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재충전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인데 그는 전작과 정반대 캐릭터로 다시 시청자를 찾았다.
‘판다양과 고슴도치’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바짝 세우고 살아온 까칠한 청년 고승지(이동해)가 판다처럼 두루뭉술한 판다양(윤승아)을 만나 티격태격 싸우면서 사랑을 만들어가는 드라마. 사랑 이야기가 기본이지만 코믹, 감동 코드도 곁들여져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주말 드라마로 기대를 모은다. 박근형이 연기하는 박병무는 자신이 운영하는 제과점 종업원과 결혼한 외동딸이 못마땅해 절연한 후, 딸에게 불행이 닥치자 죄책감을 짊어지고 사는 인물. 속죄하는 마음으로 교도소 교정 활동을 하던 중 만난 승지를 거둬서 친손자처럼 의지하고 산다.
“제가 많은 작품을 했지만 가족 드라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추적자’도 찬찬히 살펴보면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까. 서 회장, 백홍석 등 인물들의 행동 뒤에는 한 자식의 아비로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었죠. 이번 드라마는 가족을 잃어버린 아버지로서 딸과 손주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명랑하고 활달한 작품이지만 가족들이 화합하는 부분이 눈물겹도록 감동스럽게 그려질 거예요.”
촬영장에서 그는 엄한 선배로 정평이 나 있다. 젊은 연기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선배 배우가 박근형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연습을 충분히 안 해 오거나 캐릭터 분석이 진부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친다. 극 중 그의 아들과 딸로 출연했던 배우들은 작품이 끝날 때쯤이면 연기력이 몰라보게 향상되곤 한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연기를 너무 배우고 싶은데, 이론도 빈약하고 장소도 없어서 그러지 못했어요.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됐던 게 늘 애가 달아서 후배들을 보면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하죠.”
이동해는 그와 호흡을 맞춘 후배들 가운데서도 가장 어린 축이다. 더군다나 연기 경험도 별로 없다. 대선배의 눈에는 애송이로 보였을 법도 한데 그는 의외로 후한 점수를 줬다.
“손자뻘 되는 친구들과 연기를 하다 보니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싶어 섭섭하기도 하고(웃음) 동해가 서슴없이 씩씩하게 자기표현 하는 걸 보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잘 못하는 부분은 야단도 치지만 젊은이들 사고방식을 많이 이해하게 됐어요. 연기력을 가지고, 특정 개인을 지칭해서 ‘어떻다’라고 말을 하는 게 매우 조심스럽고 어렵습니다만, 동해 같은 경우엔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연기하는 것이 귀엽고 보기가 좋습니다. 배우는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는데, 이 친구는 기본적인 재능은 갖고 있어요. 단지 훈련이 부족하지만, 그런 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좋아질 거라고 봅니다.”
방송국에서 연기 못하는 배우로 찍힌 적도 있어
돌이켜보면 수많은 캐릭터로 주름을 새긴 이 노배우에게도 동해처럼 풋풋했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전 그는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에 출연해 젊은 시절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전북 정읍 출신인 그는 부친이 영화관을 운영한 덕분에 어릴 적부터 무대와 친숙했다. 악극, 신파극이 공연되는 날이면 객석 맨 앞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져들었고, 좀 더 자라서는 프랑스 배우 장 마레의 연기에 반해 ‘미녀와 야수’ ‘무서운 부모들’ 등 그가 출연한 영화는 빠짐없이 봤다. 고등학교 때는 직접 친구들과 극단을 꾸려 연기를 시작했다. 대학에서 제대로 연기를 가르치는 곳이 없던 시절. 그는 곧 중앙대에 연극영화과가 개설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학 진학도 미룬 채 충무로 영화판에 엑스트라로 뛰어들었다.
54년간 2백 편이 넘는 드라마와 영화·연극에 출연한 박근형은 여전히 연기에 목이 마르다고 말했다.
“을지로에서 연극을 하고, 충무로에서 영화를 찍고… 그러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1기로 입학했는데, 연극에 빠져 학교 다닐 시간이 없었어요(웃음). 대학 졸업은 40년 만인 1999년에 했습니다. 저는 늦깎이로 젊은 친구들과 공부하는 게 좋았는데, 교수들이 자꾸 ‘부담스럽다’며 들어오지 말라고 하더군요(웃음). 그래도 기어이 수업을 들었습니다.”
열정은 넘쳤지만 그 시절 배우는 지금보다 훨씬 배고픈 직업이었다. 1년 동안 죽어라 무대에 서도 돈 3만원을 손에 쥐기 힘들었다. 수입만 보면 배우보다 연출이나 감독이 나을 것 같아 조연출에도 도전했지만 준비하던 작품의 배우가 갑자기 펑크를 내면서 그가 대신 무대에 섰고, 박근형은 그 작품으로 연극제에서 상까지 받았다. 연기가 천직인가 싶었다. 다시 배우로 돌아왔지만 궁핍한 생활은 계속됐다. 부모에게 쌀 좀 부쳐달라고 부탁하기도 미안해질 무렵 KBS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다. “그때는 드라마가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았어요. 연극보다 오히려 신통치 않더라고. 그러다 보니 방송국 관계자나 선배들 눈엔 별로 예쁘게 보이지 않았겠죠. 어느 날 대기실에 갔더니 칠판에 ‘연기 못하는 배우 박근형 김혜자’ 이렇게 써 있더라고(웃음). 그길로 다시 영화판으로 건너갔죠.”
이렇게 그는 연극, 드라마,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 당시 그의 사진을 보면 장동건도 울고 갈 꽃미남. 외모 덕을 봤을 법한데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지금은 꽃미남이 환영받지만 그 시절에는 안 그랬어요.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고 만날 바람피우는 역만 들어왔지.”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청춘의 덫’ ‘은빛여울’ ‘홍변호사’ ‘행복을 팝니다’ ‘관촌수필’ ‘모래시계’ ‘젊은이의 양지’ ‘형제의 강’ ‘보석비빔밥’ ‘대물’ 등 1백여 편, 연극과 영화는 각각 50여 편, 60여 편에 이른다. 이 정도라면 남부럽지 않게 부를 축적했을 것 같은데 정작 그는 먹고살 걱정을 안 하게 된 것은 10년 정도 됐다고 한다. 출연료를 제대로 받기 시작한 것도 마흔에 이르러서였다고.
“요즘 베이비붐 세대들이 명퇴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나도 그나마 마흔 줄에 들어서 먹고살 만해지니까 갈 데가 없더라고요. 주인공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고, 부모 역을 하기엔 너무 젊고. 이도 저도 어정쩡해서 한 2년 쉬고 있는데 우연치 않게 홍유진 교수의 ‘역할 창조에 관한 이론’이라는 논문을 접했어요. 조연이 자기 역을 극대화하면 주연의 비중이나 플롯을 흔들지 않고서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는 거죠. 요즘 소위 말하는 명품 조연인데, 그걸 접하고 ‘바로 이거구나’ 싶어 무릎을 쳤죠.”
이후 새로운 연기 세계가 펼쳐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선명한 ‘여명의 눈동자’(1991)의 악랄한 일본 형사 스즈키, ‘모래시계’(1995)의 카지노 대부 윤 회장은 이렇게 탄생했고 시청자들이 열광한 ‘추적자’의 서 회장 역시 그 변주의 연장선상에 있다.
“악역이라고 무조건 못된 1차원적 연기는 진정한 연기가 아니죠. 내면의 고민이 드러나야 보는 이들도 빠져들 수 있어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고, 이와 유사한 일들을 찾아내 자신의 체구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캐릭터로 승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연기라고 할 수 있어요.”
라이벌은 이순재, 그의 모든 배역이 탐난다
“정신이상자 빼고 웬만한 역은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연륜에 기대거나 혹은 지금까지 해온 관성으로, 조금은 쉬엄쉬엄 연기에 임해도 되련만 그는 요즘도 촬영장에 가장 먼저 나오고 뜻대로 연기가 되지 않을 때는 속상해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인물을 다른 사람이 연기하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최근 기획사(레젤이엔엠코리아)와 생애 처음으로 전속 계약을 한 것도 앞으로도 계속 연기에만 올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까지는 그의 아내가 코디 겸 스타일리스트 노릇을 했다. 그는 고향 선후배 사이로 “세 번 찍은 끝에 어렵게 결혼 허락을 받은” 아내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실제로 (연기한) 세월만 54년이지 부족한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수백 가지 캐릭터 중 실패한 것도 있었고요. 그래도 다시 도전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인생을 살면서 한두 번은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같은 직종은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이것밖에 못하나’라는 자괴감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기도 하죠.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끈기 있게 밀어붙이다 보면 아무리 두꺼운 벽이라도 뚫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순재 선배를 보면 늘 자극을 받습니다. 그분이 하는 건 나도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고…(웃음). 아무리 선배라도 후배가 우러러보지 않으면 존재감이 없기 마련인데 이순재 선배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존경을 하게 됩니다. 늘 서로 챙기며 그러고 있습니다.”
그가 최고 라이벌로 꼽는 인물은 역시 이순재다. 그 나이에도 질투를 한다니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도 놀랍다. 질투야말로 발전의 원동력이 아닌가. 배우가 너무 고돼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박근형. 혼신을 다하는 연기란 바로 그의 배우 인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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