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니 핑크’에는 주인공인 30대 여성 파니 핑크의 비수 같은 독백이 있다.
“여자 나이 서른에 좋은 남자를 만나기란 길을 걷다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더 어렵다.”
‘파니 핑크’가 나왔던 1994년과 지금은 20년이라는 세월 차가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여자의 서른에 ‘처녀와 노처녀’의 경계라는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림으로 풀어내 또래 여성들에게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화가 조장은(29)이 7월 초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여자 서른-아무도 내게 청혼하지 않았다’. 한국 나이로 서른을 맞은 그가 미혼 여성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다뤘다는 말에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갤러리토스트를 찾았다. 작품 속 주인공과 똑 닮은 인상, 하지만 실물이 더 예쁜 조장은 작가는 이번 개인전이 2011년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기획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작년 말 결혼정보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지금 아니면 힘들다며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들르시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서른이 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나빴어요. 이런 곳에서는 외모나 직업, 재산뿐 아니라 나이까지 객관적 평가 기준이 되는구나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기분은 좀 떨떠름했지만 결혼정보회사의 전화 한 통과 나이 ‘서른’은 조 작가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꾸려볼까 하다가 주변의 미혼 여성뿐 아니라 자신 역시 주말마다 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매번 이리저리 살피며 좋은 신랑감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이번 전시의 부제이자 대표작인 ‘아무도 내게 청혼하지 않았다’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작품을 위해 주변의 미혼 남성 30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각 남성들의 특징을 잡았다. 모범생 스타일, 패션 리더, 자유로운 영혼 등 이들 미혼 남성은 각자 개성이 있었지만, 미혼 여성들은 이들을 단순히 ‘잠재적 결혼 대상자’라는 프레임으로만 보고 있음을 떠올리며 모든 초상화를 같은 크기의 증명사진처럼 그렸다. 이들 중 조 작가의 남자 친구도 있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누군지는 비밀이에요”라며 웃어넘긴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미혼 여성들이 `‘아무도 내게 청혼하지 않아서 슬프다’고 생각하기보다 30명이나 되는 남자들의 초상화를 보고 ‘어떤 스타일을 만나고 싶다’라거나 ‘전에 만났던 사람이 딱 이런 스타일이었는데’라고 수다를 떨면서 재미도 느끼고, 공감하는 기회를 가지길 바라며 이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서른 살 여성을 그려낸 조장은 작가의 작품에는 주로 작가 본인이 등장한다. 1 이번엔 잡고 말 테다 2 부케는 됐거든 3 아 퓔이 안 온다 4 아무도 내게 청혼하지 않았다
여자 나이 서른, 또 다른 시작
조장은 작가는 2007년에 첫 개인전 ‘색시한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골 때리는 스물다섯’(2008)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2009) ‘엄마라서 예쁘지’(2011) ‘여자 서른’(2012)까지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주로 자신의 일상과 주변인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는다. 2009년에는 개인전 작품에 글을 더해 ‘골 때리는 스물다섯’이라는 그림일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프리랜서라는 그럴싸한 호칭이 따라붙었지만 알고 보면 ‘청년백수’인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신을 희화화한 내용이다. 책과 작품을 통해 마니아층을 확보한 그는 2010년 전통주 업체인 배상면주가와 함께 산사춘 아트 콜래보레이션 광고를 작업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 문득 고개를 드니 서른. 앞자리 숫자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사람들은 20대와 30대는 몸부터 시작해 모든 게 다 다르다는 말을 한다. 특히 한국 여성들에게 30대는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 나이로 여겨지기도 한다. 조 작가에게 서른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대 후반일 때는 20대가 끝나간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어요. 그런데 정작 서른이 되니까 0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생각에 앞날도 기대되고 자신감마저 생겼죠.”
그는 나이가 서른이 됐을 뿐 여전히 꿈을 꾸고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말한다. 매일 자아를 찾고, 그 속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음이 행복하다고. 무작정 헤매던 20대를 지나 뭘 좀 알 것 같은 나이인 서른이 되자 자신을 더 사랑하고 멋진 여성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보인 작품이 `‘내 팔자가 상팔자’다. 스스로 삶이 행복하다고 느껴서 그럴까, 다른 작품에도 유쾌함이 가득하다. 결혼식 부케 장면을 그린 ‘이번엔 잡고 말 테다’는 실제 친구의 결혼식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그렸다.
“친한 친구 결혼식 날 신부가 뒤로 부케를 던졌어요. 아무나 받으라는 뜻에서였죠. 부케를 받길 기다리는 여자들이 많아 간절한 마음에 점프를 했는데 뒤에 있던 남자가 손을 뻗어 부케를 낚아채가더라고요. 부케 받으면 6개월 내에 시집, 장가 가야 한다는데 그분 아직 결혼 못하셨대요(웃음).”
이 밖에도 결혼을 주제로 한 작품 ‘부케는 됐거든’은 작가의 자화상으로 일명 ‘썩소(씁쓸한 웃음을 표현한 단어)’를 통해 부케 받기 지겨운 미혼 여성의 설움을 그렸다. ‘아 퓔이 안 온다’는 아무리 멋진 남자를 만나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30대 여성이 짝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그린 작품들이다.
자신만의 색이 깃든 작품 평생 그리고 싶어
조장은 작가의 작품은 강렬한 색감이 독특해서 얼핏 서양화처럼 보이지만 한국화다. 수묵화가 아닌 채색화를 주로 그리기 때문이다. 먹의 농담으로 표현하는 수묵화와 달리 채색화는 장지(한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나서 여러 번 물감을 칠해 색을 먹인 후 완성한다. 수묵화보다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공들인 만큼 예쁜 색이 나오기에 완성품을 보면 힘든 과정을 다 잊게 된다고 한다.
“처음 한국화를 접했을 때는 옛 그림에 매력을 느끼고 시작했어요. 새로운 재료를 접하고, 또 전통 화법을 공부할수록 내가 관심 가지고 있는 일상이나 현실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됐죠.”
조 작가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며 주제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떠오를 때마다 드로잉을 한다. 드로잉들이 모이면 그 당시 생각을 떠올려 콘셉트를 잡는다. 화판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작업한다고.
그는 자신의 일상뿐 아니라 엄마의 일기까지 화제로 활용한다. 2011년 5월 어머니 이행내 씨와 함께 낸 그림일기 ‘엄마라서 예쁘지’는 이씨가 소녀 시절부터 쓴 일기에 조 작가가 그림을 덧붙여 낸 책이다. 방배동에서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 이씨는 이화여대 도예과를 졸업했으나 24세에 결혼한 뒤 쭉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조 작가는 어머니의 끼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그림을 그리시니까 집에 있는 화구들이 제겐 장난감이었어요. 엄마 옆에 꼭 붙어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꼭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다 엄마 덕분이죠.”
사진이라면 부끄러웠을 텐데 그림 속 자신의 얼굴은 다소 망가지더라도 즐겁게 그릴 수 있다는 작가 조장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그가 추구하는 작품은 어떤 방향일까.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감성과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요. 결혼을 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가 너무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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