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소설은 요즘 몇만 부 나가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문학 독자는 2만 명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몇만 독자가 몇십만, 몇백만 독자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처럼 인기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인기 작가로 불릴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니까요. 1993년 절필을 통해 시장에서 기득권을 스스로 반납했잖아요? 소설이 특별히 잘 팔리면 사회학적 이유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요.”
작가 박범신(66)이 떠났다. 2011년 11월 끝자락에 다시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고향 논산으로 떠났다. 50년 만의 귀향이자 등단 39년 만이다. 주소는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釣亭里). ‘낚시하는 마을’이란 이름처럼 작가가 사는 집 앞에는 둘레 30km가 넘는 탑정호(湖)가 자리하고 있다. 마치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듯이.
그의 문학 활동은 크게 3기로 나뉜다. 1기는 ‘여름의 잔해’라는 탐미주의적 단편소설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이 시기 청년 박범신은 군부 독재와 계급 갈등의 문제에 천착했다. 2기는 1979년 발표한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의 성공과 함께 시작된다. 이후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와 같은 세태 고발 소설을 통해 박범신은 스타 작가가 됐고 그의 작품은 발표하기가 바쁘게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1993년 인기 절정의 순간에 그는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스스로 유배 생활에 들어갔다. 1996년 중편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를 들고 돌아온 것이 3기의 시작. 이후 단편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빈방’과 장편소설 ‘나마스테’ ‘더러운 책상’ ‘외등’ ‘촐라체’ ‘은교’ ‘비즈니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등을 숨 가쁘게 발표했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2000년대를 요약하면 뿌리에 대한 욕망을 그린 ‘갈망의 시기’였다. 그리고 2011년 논산행을 택하면서 문학 인생 4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내가 왜 고향에 왔는지 스스로 묻고 있다”
작가는 고향에서 무슨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궁금증을 풀러 당장 논산으로 달려가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서울에 있었다. 막바지 추위가 한창인데 낡은 집 보일러마저 고장 나 이참에 집수리를 시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서울로 피한(避寒)을 왔단다. 2월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제일 먼저 50년 만에 귀향 소감을 물었더니 “고향 땅에 돌아오니 헛된 꿈이라도 한바탕 꾼 것 같다. 지금도 내가 왜 고향에 왔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많은 소설들이 머릿속에 흘러가고 있어요.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희한하게도 몸은 고향에 가 있고 마음은 평택이나 천안쯤 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고향으로 내려가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예전엔 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향에 있으면서도 ‘작가로서 나는 왜 고향으로 왔을까?’ 하고 자문하고 있어요. 그렇게 서너 달 지나다 보니까 어떤 날 밤에는 두런두런 귀신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앞에 큰 호수가 하나 있어 낮이면 경치가 참 아름답지만 밤이 되면 캄캄한 외딴집이 돼버려요. 그래서인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주술적인 기분도 들었지요.”
그의 고향살이는 남들이 기대하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보통 오전 9~10시 사이에 눈을 뜨는데 집 안인데도 코끝에 한기가 밀려든다. 음식 욕심은 없는 편이지만 혼자 챙겨 먹는 끼니가 입에 붙을 리 없다. 이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차를 몰아 계룡산과 논산 곳곳을 마구 돌아다닌다. 승리의 역사보다 패배의 역사가 더 많은 고향의 그림자도 줍고, 새로운 글도 줍기 위해서다. 그렇게 쏘다니다 저녁이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는다. 논산문화원에서 펴낸 ‘논산의 어제 이야기’를 읽기도 하고, 귀향할 때 챙겨온 논어·맹자·장자·창비 고전소설과 20여 권의 시집을 뒤적이기도 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습작 활동할 때 가장 밑바탕이 돼준 책들을 다시 읽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작가의 한 시기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1 2011년 11월27일 고향 논산으로 가기 위해 종로구 평창동 집을 나서는 박범신. 2 논산 고향집 집필실에서.
그러면서도 “책이 잘 안 읽힌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왜 그럴까? “혼자 캄캄한 어둠이 감싸고 있는 외딴집에 있자니 너무 적적하고, 글쓰기 또한 과도기에 있으니까 마음이 산란해서”란다. 그걸 핑계 삼아 오후 10시 무렵 술을 마신다. 주량은 소주 반병. 외로워서 술을 마시고 그 기운에 새벽 1~2시쯤 잠을 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에 굵은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난 듯하다. 그 주름엔 “내 손은 글을 안 쓰면 가시가 돋는 느낌이 들면서 말굽으로 변하는 것만 같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다”란 하소연이 새겨져 있다.
“문학은 내 인생의 방부제”
그는 2011년 등단 39년을 맞아 38번째 장편소설 ‘비즈니스’와 39번째 장편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펴냈다. 희한하게도 등단연도와 장편소설집 권수가 딱 맞아떨어졌다. 작가는 “그건 별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의미를 찾자면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썼다는 거죠. 거기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어요. 저는 전(前) 작가가 될까 두렵습니다. ‘영원한 청년 작가’로 늙고 현역 작가로 죽고 싶은 게 제 꿈이죠.”
‘영원한 청년 작가’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에겐 존재의 이유다. 박범신은 이런 말도 했다.
“나이 들어도 괄호 안에 묶이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아요. 여전히 사람들이 나를 미완성 작가로 생각해주길 바라고요. 그렇게 살 생각이에요. 청년의 감성으로, 죽을 때까지 불온하고 위험한 현역 작가로 살고 싶어요. 돌이켜보면 그동안 39권의 장편소설을 썼는데 ‘문학’이라는 단 한 명과 짧은 연애를 한 것처럼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습관에 따라 글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문학은 제 인생의 방부제입니다. 제가 이 나이에 정신이 나태해지거나 썩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문학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문학과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경계에 서 있지 않아도 되는, 내 출혈이 좀 적은, 그냥 유순하게 내 감수성을 따라가도 되는 그런 직업을 갖고 싶습니다. 목수 같은 거요.”
하지만 아무리 절필을 선언한다 해도 생살을 뚫고나오는 힘을 누가 막으랴. 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 안에는 늙지 않는 짐승 한 마리가 사는 것 같아요. 창조적 자아라고 해도 좋을 그 짐승은 나이도 없고, 시간도 가리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글을 쓰지 않으면 생살을 뚫고 나와요. 안 쓸 수가 없죠. 저는 살려고 글을 써요. 스스로 그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제게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오죽했으면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썼겠어요? 요즘 트렌드로 보면 이런 문예반 학생 같은 태도는 매우 촌스러운데요, 스스로 좀 민망하고 부끄러울 때도 있어요. 요즘 세상에 절대적 가치가 어디 있겠어요? 니체는 ‘절대성은 병이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뭐랄까, 평생 일관되게 내 삶을 떠받쳐온 것이 있다면 하나는 인간중심주의 가치이고, 또 하나는 일종의 문학순정주의·문학제일주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순혈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슬슬 농담하듯이, 즐겁게 문학을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네요.”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잔인하고 무참하게”
그는 벌써 열 달째 소설을 쓰지 않으니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고 마음이 분주하다고 했다. 더 깊은 본원은 ‘이 시기에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곤혹스럽고 의미심장한 문제 앞에서 좌초했다는 자학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50년 만의 귀향이 작가 박범신에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 어떤 비의적인 ‘이야기’가 나를 불러내린 것”이라며 “지금은 우연으로 보이나 나의 논산행은 결국 필연으로 만들 그 무엇”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앞으로 그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까. 최근작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말굽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말굽의 단점은 손금과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살인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강고해지는 건 진정으로 황홀하면서도 고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했다가 내 안에서 풍선처럼 부풀린 다음 우주까지 다시 확장시키는 경험이 그럴 터였다. / 나는 점점, 그러면서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 그 누구도 이제 내 육체를 유린할 수 없을 것이며, 샌드백처럼 다루게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둠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밤이 되면 명안진사도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칼날 같은 그믐달빛에 의지해 나는 랜턴도 켜지 않고 가볍게 암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열패감은 더 이상 없었다. 근육들이 산맥처럼 일어서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곧 암벽이고 암벽이 곧 나였다.”(‘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80~181쪽)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 여자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던 야수 같은 남자가 지닌 처절한 사랑을 ‘말굽’이란 마성(魔性)을 화두로 삼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잔인하고 무참하게”라고 마치 죄값을 치르듯이 되짚는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면서 많이 아프고, 악몽을 꾸면서 몸서리 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로 번지르르한 자본주의 문명 뒤에 은밀히 장전돼 있는 폭력성의 비정한 탄환을 가차 없이 발사했다고 느껴요. 도무지 내가 쓴 것 같지 않아요. 오늘의 이 문명이 나를 앞세워 썼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박범신은 요즘 거의 매일 페이스북에 ‘논산일기’를 쓴다. 서울과 논산을 오가며 떠오른 단상들을 그때그때 올리는 식이다. 몇 달 그렇게 썼더니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해서 올해 ‘논산일기’ 첫 권을 내고 앞으로 해마다 한 권씩 낼 생각이란다. 2월3일 오후 5시10분에 올린 ‘논산일기’는 시 ‘놀’이다.
정한 많은 / 어떤 산사람 있어 / 저물녘 날마다 / … 생피 쏟고 죽는다 // 나도 / 덩달아 골병든다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를 펴내기도 한 작가는 이 시 끝자락에 몇 줄 덧붙였다. “엊그제 서해에선, 해가 사진처럼 지더라고요. 오늘도 그렇듯이요. 놀에 다치지 않게 유의하시라고 ㅎ.” 작가는 “안 쓰면 병이 되니까 그렇게라도 쓰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논산일기’를 통해 작가가 살아가는 모습과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에 대한 그의 냉철한 분석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요즘 트윗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너무 시끄럽고 거칠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나꼼수’식의 수다가 점차 트렌드로 강화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풍속과 제도가 충돌할 때, 풍속이 타락했다면서 제도로서 더욱 엄격히 제재하자고 하면 보수가 되고, 풍속이 변했으니 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 진보가 된다. 가령 조선에서 과부가 애 낳는 일이 많아질 때, 애 낳는 과부를 더욱 엄격히 벌주자는 사람은 보수이고 애 낳는 과부도 존중하도록 법을 고치자면 진보일 것이다.” -2012년 2월6일 오전 11시 23분 서울
그렇다고 그가 인터넷이나 SNS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촐라체’는 그가 쓴 첫 인터넷 연재소설이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연재해 누적 방문자 수 1백만명을 훌쩍 넘겼다. 그는 “작가는 자기 작품과는 타협할 수 없지만 독자들에게는 늘 열려 있어야 한다”며 “SNS는 바로 그런 점에서 새로운 문명”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은 그동안 목소리 센 놈이 제 입맛대로 이끌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SNS는 그런 점에서 발언의 균형을 맞출 수 있어요. 우리 사회도 스스로 자정하고 스스로 그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숙돼 있다고 봅니다.”
강안 너른 공터, 그곳에 ‘까까머리 박범신’이 있었네
<b>박범신</b>은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마친 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대한민국문학상’(1981), ‘김동리문학상’(2001), ‘만해문학상’(2003), ‘한무숙문학상’(2005), ‘대산문학상’(2009), ‘최우수예술가상’(2010) 등을 받았다.
“저물녘의 강경 옥녀봉에서 내려다뵈는 금강은 평평하고 질펀했다. 바람 끝이 차가웠으나 강은 의연하기가, 흐르는 부처 같았다. 나는 젓갈축제가 열리곤 하는 강안의 너른 공터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예전엔 키 큰 갈대가 꽉 차 있던 곳이었다. 고교 땐 학교 간다고 집 나와선 자주 그 갈대밭 속에서 하루 종일 보내곤 했다. 도시락도 그곳에서 까먹었고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차례로 바로 인적 없는 그 갈대밭 속에서 읽었다. 가끔 울기도 하면서. 그곳은 오로지 나만의 학교, 나만의 도서관, 나만의 해방구였던 셈이었다. 옥녀봉에서 내려온 다음엔 아버지가 포목점을 하던 아랫장터 가겟자리로 갔는데 민물고기집이 되어 있었다. 반세기 전의 그 건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온존했다. 미닫이를 열면 유난히 등 꼿꼿했던 아버지가 옛날처럼 앉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 채산동 그 집. 내가 데뷔작 ‘여름의 잔해’를 쓰고, 연로하신 부모님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 집. 달라진 것은 함석대문이 철제로 바뀐 것뿐이었다. 나는 어스레해진 대문 앞에 잠시 등을 기대고 서보았다. 범신아, 하고 부르면 열다섯, 혹은 열일곱 살 된 우울한 청년이 금방이라도 슬리퍼 소리를 내며 다가와 말없이 문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장편 ‘더러운 책상’에서 ‘나의 관뚜껑’이라고 불렀던 대문은 그러나 굳게 닫혀 있었다. 회색빛 자의식으로 둘러싸인 십대의 내게 감옥문 또는 정말이지 ‘관뚜껑’ 같았던 문이었는데. 세계로 가는 길을 그땐 전혀 몰랐었으니까.” -2월16일 오전 1시 서울
‘논산일기’에는 작가가 어렸을 때 겪었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작가는 강경 옥녀봉에 서서 젓갈축제가 열리는 강안의 너른 공터를 바라보며 ‘까까머리 박범신’을 찾는다. 예전에 그곳은 갈대밭이었으며, ‘까까머리 박범신’이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던 곳이자 작가의 꿈을 키우던 곳, 곧 ‘까까머리 박범신 도서관’이자 ‘까까머리 박범신 해방구’였다. 작가는 그곳을 바라보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데뷔 시절, 신혼 시절을 떠올리고 깊은 회한에 빠진다. ‘영원한 청년 작가’ 박범신! 그는 오늘도 ‘박범신 문학’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한 시대를 또다시 열기 위해 ‘논산일기’를 쓰면서 ‘귀향’ 아닌 ‘귀향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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