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미소’란 수식어요? 저를 떠올릴 수 있는 단어니 당연히 좋죠. 제가 원조란 얘기니까요. 그동안 ‘김재원’ 하면 딱 떠오르는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 행운이 군 제대 후 찾아왔고, 지금 매일 쉬지 않고 촬영하느라 힘들 때도 있지만 응원해주신 여러분들 덕분에 연기의 참맛을 알아가고 있어요.”
며칠 동안 뿌옇던 황사가 걷히고 오랜만에 맑은 하늘이 드러난 5월5일. 어린이날을 맞이해 놀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경기도 포천 한 식물원에서 김재원(30)은 바쁜 촬영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어제도 새벽 3시에 촬영이 끝났어요. 보통 드라마를 촬영하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쉬었는데 이번엔 전혀 그렇지 못해요. 잠깐 쉴 때도 이게 쉬는 건지 촬영하는 건지 긴가민가할 정도예요(웃음).”
“미니시리즈 두 편을 한꺼번에 찍을 때보다 더 바쁘다”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대본이 늦어져 촬영 대기시간이 늘어나고 쪽잠을 자야만 하는 열악한 상황. 예전부터 앓던 위궤양까지 재발했다. 그는 속이 쓰린지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도 “약을 먹었으니 금방 괜찮아진다”고 오히려 기자를 안심시켰다.
“생방송처럼 드라마를 제작하는 현실이 힘들긴 하죠. 그런데 선배님들 말씀으로도 30~40년 전부터 이런 관행이 쭉 이어져 오는데 전혀 달라진 게 없대요. 일주일에 70분짜리 드라마 2편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촬영하면서 좋은 점도 있어요. 전 세계에서 시청자의 반응과 드라마가 직결된 시장이 우리나라밖에 없다 보니 현 시대의 트렌드를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거든요. 또 만드는 과정에서 평가를 주고받을 수 있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고요.”
그래서 김재원은 틈틈이 인터넷 드라마 게시판이나 트위터, 페이스북에 올린 시청자들의 평을 보면서 “보약 같은 기운을 얻는다”고 말했다.
“악플이나 부정적인 내용보다 ‘출생의 비밀이나 불륜, 폭행 등이 없는 착한 드라마다’ ‘보면 볼수록 따뜻한 줄거리에 빠져든다’와 같이 호의적인 내용이 많아서 힘들게 촬영하면서도 뿌듯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로 실업자 신세도 면하고, 시청자들에게 사랑까지 받고 있어서 힘들어도 저절로 웃게 돼요.”
‘내 마음이 들리니’는 팬들과 소통하는 드라마
김재원의 미소가 다시 활짝 피어난 이유는 군 제대 후 첫 작품이자 5년 만에 안방극장 복귀작인 MBC 주말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이하 ‘내마들’)’ 덕분이다. 2009년 입대해 2년간 국방홍보지원병으로 복무한 그가 지난 1월 제대한 뒤 휴식기 없이 바로 드라마 현장에 돌아온 것은 이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배우가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고르기는 쉽지 않다. 너무나 하고 싶은 작품이어도 조건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고,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도 있다. 김재원은 정말 끌리는 작품을 만나 출연하게 된 것을 ‘인연’이라고 했다.
“군 제대 후 복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나 부담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만약 할 수 있다면 ‘김재원’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의 작품을 하고 싶었죠. 오랫동안 연기생활을 하다 보니 주변 지인이나 팬들이 기존 캐릭터에서 변화된 모습을 원했지만 사실 제가 악하거나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진 않잖아요. 차라리 제 본래 이미지와 어울리는 따뜻한 휴머니즘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1 김재원은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황정음(봉우리)과 커플로 발전한다. 그는 “황정음의 연기 열정에 대해 배우는 바가 많다”고 말했다. 2 지난 5월5일 경기도 포천 식물원 안에 위치한 촬영장에서 김재원이 극중 자신의 어머니로 나오는 배우 이혜영과 연기 호흡을 맞추고 있다.
김재원의 이런 생각은 그의 전작들과도 연결된다. 2000년 시트콤 ‘허니허니’로 데뷔한 김재원은 이후 ‘로망스’ ‘형수님은 열아홉’ ‘위대한 유산’ ‘황진이’ 등에 출연했는데 이 가운데 소위 ‘막장’ 드라마는 하나도 없다. 특히 그는 군대 있을 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이 흥행하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가족이나 아이들이 볼 수 있는 따뜻한 작품이 부족하단 생각에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연기관은 더욱 확고해졌다.
“외국 배우들의 경우 휴 그랜트는 로맨틱 코미디, 로빈 윌리엄스는 휴먼 드라마 등 배우가 잘하는 장르가 구분돼 있잖아요. 이렇게 어떤 장르에서 그 작품을 대표할 수 있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이 제게 잘 맞고 또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니 연기하는 내내 즐거울 수밖에 없죠.”
‘내마들’은 청각장애인이지만 이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는 한 남자와 일곱 살 지능을 가진 아버지와 함께 사는 ‘캔디’ 같은 여자가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다. 이들을 중심으로 드라마는 장애와 관계없이 결국 ‘진정한 소통은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김재원은 이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아들이지만 청각장애가 있는 주인공 차동주 역을 맡았다. 그는 “단순히 후천적 장애를 딛고 착하게만 사는 청년이 아니다”라며 “극중 상대 캐릭터에 따라 그의 면면이 달라지는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 드라마에서 동주는 상대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죠. 청각장애의 원인이 된 사고를 일으킨 의붓아버지에 대해 복수심을 품고, 장애를 숨기라고 강요하는 어머니와는 대립을, 봉우리(황정음)의 아버지이자 바보인 영규에게는 순수함을 보여줘요.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차갑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속내를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데뷔 후 첫 장애인 연기가 만만치는 않다. 그는 “들리지 않는데도 들리는 척 말해야 하고, 그것이 너무 억지스럽지 않도록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역을 맡았을 때보다 몇 배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차라리 수화로 연기했다면 더 편했겠죠. 이 드라마에서는 장애를 들키지 않게끔 연기해야 하니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답답하더라고요. 연기할 때 상대 배우와 리액션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냥 바라만 보고 할 수밖에 없는 데다 실제 청각장애인들은 말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목소리 톤을 평이하게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려워요. 연기하면서 톤에 변화를 주고 싶지만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또 제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어머니나 마루와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이들이 제 입과 눈을 보며 연기하도록 해야 하니까 더 까다로워요.”
반전 캐릭터보다 이미지에 맞는 작품이 우선
쉽지 않은 역이라고 연방 고개를 저으면서도 ‘차동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의 눈이 빛났다. ‘강행군 촬영 일정이 힘들다’고 하지만 입꼬리는 한 번도 처지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그에게 “평소에도 이렇게 밝은 성격이냐”고 묻자 그는 “정말 그런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며 또 웃었다.
“제가 가만히 있으면 차가운 인상인가 봐요. 어릴 적 친구들도 ‘새침데기 같았다’ ‘마마보이 같았다’ 등 한마디로 재수 없는 캐릭터였다고 몇 번이나 저의 첫인상에 대해 말할 정도거든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나 재수할 때 여자친구들에게는 ‘예민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사실 그런 이미지와는 정반대예요. 물론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그렇게 까다로운 성격은 아닌 것 같아요. 저,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사기’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그는 몇 년 전 어이없이 당한 사건을 얘기하며 허탈하게 웃는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지인에게 덜컥 큰돈을 빌려줬다가 연락이 끊겨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고. 그래도 “사람 만나는 게 좋고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술자리를 참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도 넓어지더라고요. 그런 게 나쁘진 않았지만 군대에 있다 보니 생각도 많아지고 주변을 좀 정리하게 됐어요. 그래도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제가 여기까지 온 만큼 사람이 따르는 걸 복이라 생각하고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어느덧 김재원도 데뷔 11년째를 맞았다. 그는 “눈 깜빡할 사이에 세월이 지났다”며 “연기생활 11년이란 햇수를 들을 때마다 참 새삼스럽다”고 했다.
“처음 연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평생 해도 좋을 만큼 이상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맡은 역에 따라 다양한 인생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죠. 아마도 배우가 되도록 이끌어주고 지금까지 열렬히 응원해준 가족 덕분에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재수 시절 김재원에게 연극영화과를 지원해보라고 권유한 이들은 바로 그의 어머니와 누나였다. 특히 한 살 많은 누나는 작품 준비나 결정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줬다. 어떤 작품을 하겠다고 하면 누나는 ‘이런 것도 한번 참고해보라’며 틈틈이 챙겨줬다. 요즘도 종종 전화로 드라마 소감을 전한다고 했다.
“누나는 늘 신랄한 비판보다 ‘이번 회를 봤더니 이게 좋더라, 저게 좋더라’ 하며 격려를 해줘요. 전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어머니가 자취집에 오셔서 우연히 ‘내 마음이 들리니’ 시놉시스를 보시고 ‘꼭 했으면 좋겠다. 느낌이 좋다’고 강력 추천하셨는데 요즘 반응이 좋은 걸 보시곤 많이 뿌듯해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30대 젊은 미시족이나 40, 50대 아주머니들이니까 늘 누나와 어머니의 눈은 정확하다고 믿고 있어요(웃음).”
지금은 연기에 올인, 마흔 즈음 결혼하겠다
쌓이는 연기 경력만큼 그의 나이도 벌써 서른이 됐다. 홀로 사는 시간도 그만큼 늘었다. 좋아하는 연기를 한다지만 혼자 살기엔 청춘이 너무 외롭진 않을까. 문득 그의 결혼관이 궁금했다.
“배우로 살면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때예요. 아무래도 연예인이란 직업 자체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많이 받아야 하고, 저는 괜찮다고 해도 제 가족까지 일거수일투족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그리 반갑지는 않을 것 같아요. 또 아무리 남편이 연기자라 해도 상대 여배우와 애정신을 찍을 때 그 아내는 얼마나 괴롭겠어요(웃음). 그래서 인생을 80, 90세까지 길게 놓고 본다면 딱 그 절반인 마흔 즈음 결혼해서 가족을 위해 살고 싶어요. 아마 그때가 되면 제가 고르기보다 아내가 될 사람에게 ‘찜’ 당해서 끌려가지 않을까 싶지만요(웃음).”
촬영하느라 서울과 포천을 일주일에 몇 번씩 이동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지만 “군에 있을 때도 참 바빴다”며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김재원. “이번 작품이 끝나면 일단 한숨 돌리고 싶다”면서도 “좋은 작품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고 싶다”며 연기 열정을 내비쳤다.
“군대 있을 땐 국군방송 라디오 DJ를 하면서 청취자들에게 우스갯소리도 많이 하고 놀랄 만한 예능감을 선보였죠(웃음). 다시 활동하면서 느꼈지만 배우는 역시 연기로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데뷔 후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거의 드라마만 했는데 제 이름 석 자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 있다면 브라운관이든 스크린이든 좋은 연기를 계속 보여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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