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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히트 맨

까칠한 멘토 방시혁에게 이런 면이?

“재능은 센스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힘”

글·이혜민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MBC 제공

2011. 04. 15

누구나 부러워하는 학벌에 아이돌 못지않은 스타가 됐지만 여전히 비호감인 작곡가.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 대표. 하지만 상대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말만 골라 하는 ‘미운’ 모습이 전부는 아닌 듯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가 몰랐던 방시혁을 발견했다.

까칠한 멘토 방시혁에게 이런 면이?


시니컬한 눈빛과 매서운 말투. MBC 스타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독설가 방시혁(39)의 트레이드마크다. 멘티에게 “왜 웃어? 뭐가 웃기니? 무대에서는 안 틀릴 것 같지? 연습할 때 틀리면 무대에서도 틀려!” 하고 야단치는 그를 보노라면 ‘저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가 god ‘프라이데이 나이트’, 박지윤 ‘난 사랑에 빠졌죠’, 비 ‘나쁜 남자’ ‘I do’, 백지영 ‘총 맞은 것처럼’, 2AM ‘죽어도 못 보내’를 탄생시킨 ‘히트곡 제조기’란 사실을 떠올리면 프로의 세계가 그만큼 냉정한가 싶어 한편으론 수긍이 간다.
3월9일 낮 12시. 빡빡한 스케줄을 쪼개 인터뷰 시간을 잡았는데 하필이면 점심시간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인터뷰에 앞서 황급히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이것이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삶이구나 했다. 이윽고 작은 다이어트 콜라 페트병을 손에 꼭 쥔 방시혁이 냉소적 표정 대신 어린 지원자를 바라보던 ‘딸바보(딸을 각별히 아끼는 아버지)’의 얼굴로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따듯함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니 독설을 쏟아내는 이유부터 묻기가 민망해 요즘 화제가 된 ‘말놀이 동요집’(비룡소)을 펴낸 계기부터 물었다. 그러자 “이 시대에 노래를 만드는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들었다”는 자못 진지한 답이 돌아온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 데다 아이한테 관심도 없는 편이에요. 그러다 출판사 측에서 ‘좋은 동시가 있는데 거기에 곡을 붙여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순전히 일적으로 접근했죠. 그런데 작곡하려고 막상 동요시장을 살펴보니 상황이 너무 안 좋은 거예요. 최근 발간된 동요집이라고 해도 이미 5년 전 것이더라고요. ‘요즘’ 어린이들이 부르고 싶은 노래가 ‘따로’ 있을 텐데 그런 동요가 생산되지 않은 거죠. 우리 아이들이 나이에 맞는 예술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걸 보니까 그런 상황을 방치하는 건 ‘창작자의 직무유기다’ 싶었어요.”

동요 만들지 않는 건 ‘창작자의 직무유기’
그래서 사업적 손실을 보면서까지 동요 작업을 진행했다. 다행히 “최승호 시인의 동시에서 청각적인 아름다움이 그대로 전해져 작곡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제 스타일대로 마음이 통하는 어느 한순간에 곡을 썼어요. 한 번에 다섯 곡씩 총 스물한 곡을 만든 셈이죠. 회의를 하면서 이런 음이 어떨까 싶어 허밍을 하다가 만들기도 하고, 집에서 빈둥대다 갑자기 생각이 나 쓰기도 했어요. 철학과 미학에서 말하는 ‘현현(顯現)’이라고 하는 스트라이크 존을 맞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은 정말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웃음).”
가요를 만드는 방식을 동요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어 사전조사도 했다. 아이들이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어린이집 교사들과 음악치료사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을 직접 만날 수도 있었지만 “샘플링을 잘못하면 도리어 오류를 범할 수도 있어,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을 만나본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했다”고 한다. 그는 가요를 만들 때에도 여러 비평문을 읽으며 대중문화를 파악하는 사전작업을 진행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일정한 패턴을 가진 노래나 아름다운 가사가 아닌 방귀소리 같은 의미 없는 소리에 즐거워하고, 자극받은 것에 계속 자극받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냈다.
동요 작곡을 계기로 ‘동요 산업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목표도 세웠다. 동요 제작사가 아닌 유통사를 만든 것은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더 유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처럼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그를 보자 남들과 사고하는 방식이 다른 방시혁이 궁금해졌다. 그는 어떻게 ‘남다른 시각’으로 ‘새로운 시장’에 눈길을 돌릴 수 있는 걸까.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어린이 방시혁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셔서 올드팝이나 클래식 음악을 오며 가며 듣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적은 없어요. 실제로 저 자신은 어려서 노래를 듣지 않았어요. 워낙 음치여서 음악 선생님이 ‘화음 넣을 때 너는 소리 내지 말고 있어라’ 하셔서 음악과 담 쌓고 살았죠. 좋아하던 동요 한 곡이 없는 것도 그래서일 거예요. 어려서는 놀이터에서 혼자 모래집 짓던 조용한 아이였죠.(웃음)”

음악 수업에서 소외된 타고난 음치

까칠한 멘토 방시혁에게 이런 면이?




그에게 음악을 알려준 것은 노래가 아니라 악기였다. 중학교 때 어머니가 클래식 기타를 배워보라고 권한 것을 계기로 일렉트릭 기타를 치게 됐고, 밴드를 만들면서 조금씩 음악에 다가갔다. 물론 그 당시 이렇다 할 만한 음악적 성과를 거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시기에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분”이라며 “부모의 교육관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은 창의적이잖아요.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자녀의 성향에 맞게 인생계획을 짠다고 하면서 아이에게 내재된 가능성까지 차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건 하지 말라, 저런 것도 하지 말라 하고요. 그에 반해 저희 부모님은 ‘방임’으로 일관하셨어요. 물론 성적에서 일정 부분의 성과를 요구하긴 했죠. 하지만 강남 8학군에 살았는데도 학원도 거의 안 보내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끔 해주셨어요.”
그렇다고 무턱대고 놀기만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해외 근무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살다 귀국한 뒤 한국 방송의 웃음 코드를 이해할 수 없어 아예 텔레비전을 보지 않게 됐는데, 그 대신 그는 책을 탐닉했다. 어느 날 책에서 읽은 내용을 기억해 박물관에서 상형문자를 읽어 가족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방시혁에게 책은 놀잇감 그 자체였다.
여기에 ‘부모님과의 여행’은 그의 인생에 큰 자산이 됐다. 아름다운 로마를 보면서, 폐허밖에 남지 않은 그리스를 보면서 소년은 ‘문화의 다양성’에 눈떴다. 그는 “다른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건 여행을 통해 얻은 성과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 뭔가를 주장하면, ‘그래? 그게 맞을까? 그럼 해보자!’라고 할 정도로 열린 사고를 하게 됐죠. 백지영씨가 부른 ‘총 맞은 것처럼’을 만들 때 직설적인 가사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걸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현실에서는 직설적으로 말하고 사는데, 가사만 서정적인 건 맞지 않다고 봤거든요.”
그렇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경쟁에서 지면 무조건 기분이 나빠지는 ‘욕심쟁이’였다. “누군가를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보다 잘해냈을 때 받게 되는 칭찬과 그에 따라오는 평화를 좋아했다”고. 그는 늘 이기는 편에 속했다. 예술을 공부할 생각에 서울대 미학과에 진학한 뒤로는 음악에 몰두하면서도 인문대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자신을 “‘타고난 재능’인 집중력으로 승부해 좋은 성적을 거둔 얄미운 녀석”이라고 평했다. 성실하지 않던 어린 시절을 싫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대충 해도 잘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해서 시험 때 잠시 ‘집중력’을 발휘했을 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중학교 때는 밴드를 하다 금세 시들해져서 그만뒀고, 대학교 때 기타를 치긴 했지만 목숨 걸고 하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자신이 밉다. 그래서 방시혁은 자신의 인생을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일대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어느 날 부모님이 그에게 음반사에서 일하는 친척을 소개해주었다. 그때 부모의 생각은 ‘음악 재능이 없으니 포기하는 게 좋다라는 충고를 들으면 음악을 그만두겠지’ 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유학을 준비하면서 음악을 병행하는 어정쩡한 상태였는데 음악성을 테스트 받기 위해 데모 테이프를 만들면서 뜻밖의 재능을 발견했다. 그는 급기야 실무자들에게 돌릴 데모 테이프를 만들기 위해 건반을 칠 땐 허벅지에 땀띠가 났고, 기타를 치다가 안고 잠들 만큼 온 정성을 들였다. 온 힘을 쏟아 부으며 산 적이 없던 터라 뒷심을 발휘할 힘은 차고 넘쳤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데모 테이프를 돌렸는데 우연히 그 테이프가 박진영 매니저의 손에 들어갔다.
“박진영씨로부터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97년 말부터 JYP 창립멤버로 활동했어요. 한국 대중음악이 성장할 때니 시기를 잘 만난 거죠. 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열심히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가 확연히 나더라고요.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대중음악 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면 소용이 없거든요. 여기서는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천천히 가도 멀리 간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재능은 센스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힘이다’는 좌우명을 만들어 10년간 벽에 붙여놓았어요. 노력하면서 차츰 성과가 나니까 한 인간으로서 완성돼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까칠한 멘토 방시혁에게 이런 면이?

“대중음악 하는 사람은 시류를 읽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재능을 꽃피울 수 없다”고 말하는 방시혁.



치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대중음악
시대적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촉수를 세운다는 방시혁. 그는 평소 기사 댓글도 꼼꼼히 체크하고, 신문도 보수적 매체와 진보적 매체를 고루 읽고 미디어 비평지까지 챙겨본다. 이슈별 사이트를 보고, 참고할 만한 멘트를 많이 하는 트위터리안을 팔로하면서 세상을 읽어간다. 때로는 패션을 공부하러 디자이너를 만나고, 댄스음악을 익히러 클럽을 찾는다. 몇 개월만 히트곡을 못내도 ‘감을 잃었느냐’는 핀잔을 듣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방시혁이 ‘위대한 탄생’ 멘토로서 참가자들에게 치열함을 요구하는 것도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독설을 내뱉는 이유에 대해 “다른 멘토는 ‘음악을 좋아하는 후배를 키우는 것’이 목표지만 나는 ‘상품성 있는 가수를 키워내는 것’이 목표라서 더 매섭게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엄하게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멘티들에게 엄하게 대하는 건 이 시장이 냉혹하기 때문이에요. 평소 저는 오디션을 볼 때 감정 낭비를 하지 않아요. 어차피 내가 키울 사람이 아니니 신경 안 쓰면 그만이거든요. 하지만 일단 내 멘티가 된 이상 인생공동체가 된 거잖아요. 이 순간만 잘 넘기면 도약할 수 있는데 안 하면 때려서라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위대한 탄생’은 참가자들의 경쟁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이끄는 멘토들의 경쟁. 그는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 친구가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있는 만큼 가능성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멘토로서 1등을 하는 것이 나의 의무다”라고 말했다. 지고 못 사는 그의 승리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작곡가로서, 엔터테인먼트사 대표로서 그리고 프로듀서로서 한국의 대중음악시장을 이끌고 있지만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 무궁무진하다.
“너무 큰 꿈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아시아에서 1등 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나라처럼 아이돌을 잘 키우는 시스템을 가진 나라도 없어요. 그만큼 아이돌의 재능도 뛰어나고요. ‘빅 히트’가 저격을 잘한다는 뜻도 있지만 히트가 크게 난다는 의미도 있어서 회사 이름으로 정했는데 지금 보면 조금 창피하긴 해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이름값을 해야죠(웃음).”
그는 “음악 하는 즐거움은 간직하고 싶다”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다만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했다.
“가요든 동요든 듣는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상품을 만드는 제가 존재할 의미가 없는 거니까요. 앞으로는 이제까지 추구해온 것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싶어요. 제 스타일을 복제할 만큼 많이 만든 건 아니지만, 대중이 방시혁 스타일을 안다고 말하는 그 순간 신선도를 잃은 거니까, 그걸 극복해야죠.”
방시혁은 지금 자신과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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