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여자 프로 카레이서가 단 두 명밖에 없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모델 겸 배우인 이화선(30). 6년 전 이세창·류시원·안재모 등이 한창 카레이싱을 즐길 때 그 곁에서 잠깐씩 얼굴을 내비쳤던 그가 이제는 프로팀 Ktdom에서 정식 선수로 뛰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일본 오이타현 원정경기에 다녀왔다. 지난해 가을 출전한 ‘CJ 슈퍼레이스’에서 남자들과 경쟁, 당당히 2위를 기록했던 터라 이번에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경기장의 경사가 심한 데다 악천후까지 겹쳐 결국 하위권에 머무르고 말았다. 귀국 후 만난 그는 “6년 동안 운전대를 잡았지만 아직도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걸 깨달았던 시합”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국내 경기장에서는 연습을 많이 했지만 그곳은 처음 접하는 지형인 데다 하루밖에 연습을 못 해서 두려움이 앞서더라고요. 한국에서 온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적응이 안돼서 고생을 좀 했어요. 상황이 어찌 됐건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에 무사히 완주하긴 했는데 스스로에게 어찌나 실망했던지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장롱 면허로 카레이싱 도전
이화선은 승부욕도 강하고, 카레이싱을 대하는 자세도 진지해 보였다. 그는 2004년 연예인 초청 행사장에서 처음 만난 이세창의 권유로 카레이싱을 접했다. 당시 그는 운전면허는 있지만 도로연수도 받지 않아 시내 운전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초보 중의 초보였다.
“서킷(자동차나 오토바이의 경주용 도로)에서 운전을 배운 셈이죠(웃음).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처음 경기장에 들어갔을 때 외벽의 철조망을 뚫고 나갔어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액셀을 밟았거든요. 차에서 내리면서도 뭘 잘못했는지 몰라 ‘이 차 브레이크가 고장났나 봐요’라고 말했죠. 세창 오빠로부터 ‘경기장에 브레이크 마크도 하나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액셀을 꾹 밟은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뒤에야 실수를 알아챘을 만큼 아무것도 몰랐어요.”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취미인데 이를 하겠다고 나선 이화선보다 허락한 그의 부모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카레이싱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의 부모는 절대 안 된다며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의지가 강했던 그는 지켜야 할 규칙을 잘 지키고 레이싱 기술을 잘만 배우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며 설득했다고. 그의 부모는 썩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타다가 말겠지’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고 한다.
이화선 스스로도 “레이싱을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다”고 말한다. 레이싱에 관심을 가졌던 대부분의 여자 연예인들이 한 번 탄 뒤로는 다시 차에 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 하지만 그는 스펀지처럼 레이싱에 빠져들었다.
“세창 오빠가 가르치면서 매우 신나했어요. 차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앉아 헤드셋을 통해 전해지는 지시 사항을 그대로 따랐거든요. 실력이 빠르게 늘었어요. 뭐든 잘하면 재미있잖아요. 일반 남자 선수들보다 기록이 좋게 나왔을 정도니 매일매일 경기장으로 향하는 게 즐거울 수밖에 없었죠.”
그런 그에게 한 차례 큰 위기가 닥쳤다. 2006년 아마추어 경기에 출전했다가 차가 뒤집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 차체가 완전히 부서졌지만 다행히 그는 뼈 하나 부러지지 않았을 정도로 무사했다. 무서웠을 법도 한데 차가 전복되는 순간 그는 의외로 담담했다고 한다.
“차를 믿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어요. 밖에서는 위험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부는 안전 설계가 돼 있기 때문에 벽에 부딪치는 정도로는 운전자가 크게 다치지 않거든요. 그런 쪽으로는 겁이 없는 편이라 그때 사실 놀이동산의 다람쥐통을 탄 기분이었어요(웃음).”
이후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잠시 쉰 것을 제외하고 그는 6년 동안 꾸준히 레이싱을 즐겼다. 지난해에는 프로 경기에서 남자 선수들과 경쟁해 좋은 성적도 거뒀다. 그 경기를 계기로 이화선은 또 다른 종목에 도전하게 됐다. 지난해 가을 경기국제항공전에서 레이싱 경기에 입상한 그의 기사를 보고 도전정신을 높이 사 홍보대사를 맡아달라 요청해온 것. 더불어 개막 당일 경비행기 조종을 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자동차 타면 탈수록 재미 느껴 경비행기까지 도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에 기뻤지만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의 부모는 레이싱도 모자라 이제는 비행기냐며 걱정을 했고, 친한 동료인 가수 김진표는 “그래도 두 다리는 땅에 붙이고 살아야지”라며 그에게 빨리 결혼해서 정착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고민을 하긴 했지만 제게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냐는 생각에 하겠다고 했어요. 경비행기가 차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르긴 하지만 막상 비행기 안에 있으면 고요해요. 카레이싱보다 훨씬 정적이라 비행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죠. 바람을 잘 타는 게 관건인데, 처음에만 좀 긴장했지 지금은 굉장히 즐겁게 타고 있어요.”
긴장하지 않고 즐긴 덕에 벌써 그는 수준급 조종 실력을 터득했다. 지난 5월 개막식 때는 멋지게 날아올라 행사장 주위를 두세 바퀴 돈 뒤 착륙하는 시범을 무사히 선보였다. 이후 꾸준히 공부해 항공역학·항공기상·비행항법 등 필기시험에 모두 통과했다. 지금은 이수해야 할 20시간의 비행을 채우고 있는 중이라고. 그에게 땅을 질주하는 것과 하늘을 가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매력 있는지 물었다.
“그 질문은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묻는 것과 같아요(웃음). 카레이싱은 자기 한계치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해요. 그렇게 해서 최고의 기록을 냈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함을 느끼죠. 비행도 마찬가지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운전해야 하는데, 좋은 기록을 내야 하는 경주가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비행 자체에 빠져들 수 있어요. 푸른 하늘을 가르며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카레이싱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죠.”
이화선은 2000년 숙명여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한국슈퍼모델선발대회에 출전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훤칠한 키에 매끈한 몸매, 시원시원한 웃음이 매력적인 그는 드라마와 시트콤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X맨’ ‘강호동의 천생연분’ 등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데뷔 초창기에 그는 연예계에 큰 뜻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슈퍼모델선발대회에 참가한 것도 입상하면 자격증이 나와서 패션쇼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점에 솔깃해서였어요. 대학생 입장에서는 고소득 아르바이트잖아요. 운 좋게 입상했는데 여기저기서 방송 출연 요청이 들어왔고 즐겁게 활동했죠. 그런데 대학 졸업 때까지 공부를 계속할 것이냐, 연예계로 진출할 것이냐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공부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지만 그 일은 젊을 때밖에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일을 선택했어요.”
그렇게 연예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는 선배들에게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데뷔 초 많은 곳에서 그를 찾았지만 목적의식 없이 주변에 휩쓸려 일을 하다 보면 결국 자신을 잃을 것만 같아 두려움이 앞섰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당시 일을 하는 데 있어 소극적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한창 예능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 담당 작가에게 그만하겠다고 말했어요. 예능 이미지로만 소모되고 있는 점이 걱정됐고,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을 때여서 출연하던 프로그램을 모두 관뒀죠. 그런데 지금 뒤돌아보면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예능에서 인기를 얻어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연예인들이 드라마에 캐스팅돼 성공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때는 그런 연예계의 캐스팅 구조를 잘 몰랐죠. 덕분에 공백이 길어졌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동안 연기 연습도 많이 하고, 연기에 대한 의지도 많이 다졌거든요.”
“스포츠도 좋지만 일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싶어요”
이화선을 연기자로 자리매김하게 한 작품으로 영화 ‘색즉시공2’를 빼놓을 수 없다. 뭇 남성이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완벽한 몸매의 수영선수로 등장해 노출신을 선보여 한동안 큰 화제를 낳았다. 하지만 섹시한 이미지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작품이었기에 출연이 망설여지기도 했을 것 같았다. 이화선은 “전편을 너무나 재미있게 봤기에 거부감은 없었다”고 말했다.
“출연 배우와 스토리가 좋았고, 또 제작진도 성공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모두를 믿고 출연했어요. ‘색즉시공2’ 전에도 노출이 있는 작품에 출연 제의가 많이 들어왔지만 노출 자체가 싫어서 무조건 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어느 순간 ‘거부만 하는 것도 연기자의 자세가 아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마침 제작진에게 연락이 왔던 거죠. 결과적으로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만족해요. 하지만 이후로 들어오는 작품들이 모두 그런 유들뿐이라 안타깝기도 했죠.”
올해로 그는 데뷔 10년 차가 됐다. 그는 절실히 ‘슈퍼모델 출신 섹시 배우’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싶다고 한다.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쉽게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씩 이미지 변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하고 싶은 역할이요? 음… 멋진 액션 장면에서 카리스마 있는 역할이요. 여러모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올해 안으로는 꼭 작품 활동을 할 생각이에요.”
서른하나, 결혼을 생각할 나이지만 이화선은 아직 남자 친구조차 없다고 한다. 함께 레이싱을 하는 남자 연예인들이 하나같이 멋있기 때문에 눈이 높아진 탓도 있을 법했다. 그러자 그는 “연예인 남자 친구를 생각해본 적 없다.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며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주변에 멋진 연예인들이 많은데 한 번도 ‘내 배우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결혼을 한다면 다른 쪽에서 일을 하는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겉보기에 여성스러워도 실제론 털털하고 꼼꼼하지 못해서 배우자는 배려심 많고 잘 챙겨주는 사람이었으면 하죠.”
이상형 이야기를 하던 이화선은 “현재는 연애보다 일이 우선”이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올해로 데뷔 10년 차인데 연예 활동에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다고.
“돌아보면 매 순간이 기회였고, 그때마다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친구 따라 지원한 슈퍼모델선발대회에서 덜컥 입상한 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연예계에 데뷔한 것도 문제가 있었고요. 시작이 어렵지 않아서 쉽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 30대가 되고 나니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도 보이고, 여유가 생겨서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3년 동안은 결혼이나 연애 생각하지 않고 일에 빠져보려고요.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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