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날렵한 턱 선을 자랑한다. 여기에 무심한 표정, 서늘한 눈빛, 여유로운 말투까지 더해지니 이 세상사람 같지 않다. 드라마 ‘나쁜 남자’ 촬영에 한창인 김재욱(27)을 만났을 때 실제 그의 모습은 여태껏 출연했던 작품에서 보인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2년 데뷔한 그는 지금껏 5편의 드라마와 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모두 김재욱만의 색깔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현재는 김남길·한가인·오연수 등과 함께 드라마 ‘나쁜 남자’를 찍고 있다. 그는 이번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후계자이지만 배다른 형제라는 이유 때문에 어릴 적부터 사랑받아본 기억이 없는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돈 많은 부유층 역할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재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포커스가 후계자라는 데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연기하는 데 크게 어렵거나 다른 점은 못 느끼고 있어요. 그냥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에 포인트를 두고 있어서 거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죠.”
얼마 전 그는 드라마 촬영을 위해 일본을 다녀왔다.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출연진, 스태프와 숙소를 함께 쓴 덕분에 가까워졌다. 특히 연기 선배인 김남길·한가인은 김재욱보다 한두 살 위인데 형·누나라 부를 정도로 친해져 촬영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작업했다고 한다.
신문기자 아버지 덕분에 일본에서 유년시절 보내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본 사람이라면 김재욱을 떠올릴 때 동시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와플 굽는 남자, 일본어 하던 남자, 까만 매니큐어를 칠한 남자가 바로 그것. 이 중에서도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던 모습은 그가 일본인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아버지가 신문기자셨는데 해외특파원으로 가족 모두 도쿄로 건너가 7년 동안 살았어요. 저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가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있었죠. 그때가 80년대 후반이었는데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딱히 슬프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가족 이외에 타인을 만난 건 처음이라 그렇게 배타적으로 나오는 게 당연한 건 줄로만 알았거든요.”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분명 한국 아이인데 한글은 잘 모르고, 일본어만 쓰는 그를 친구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고 먼저 다가왔던 것. 일본에서 그가 주로 듣던 말은 “저리 가!”였는데 한국에서는 “같이 놀자”는 말이었다.
“그때 당시 일본에서 가져온 장난감들이 많았는데 몇몇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가 그걸 보고는 학교에 가서 이야기하는 통에 소문이 났어요. 방과 후 너희 집에 놀러 가면 안 되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아졌죠(웃음). 처음에는 ‘얘들이 나한테 왜 이러지?’ 싶었는데 점점 그 친구들로 인해서 조금씩 밝아진 것 같아요.”
한국에 잘 적응한 그였지만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낸 터라 일본적 감성이 청소년기까지 영향을 미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록 밴드 활동에 빠졌다. ‘각시탈’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활동했는데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MBC ‘악동클럽’에서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와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록 이외에는 어떤 음악도 거부하고 있던 터라 심사위원이 “댄스그룹을 만들 건데 록을 포기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록을 못하면 하지 않겠다”고 말해 그들을 당황케 했다.
“사고 많이 쳤죠(웃음). 사회 불만도 많았고… 착한 학생은 아니었어요. 부모님과 부딪히기도 했는데 결국은 아버지께서 ‘그게 꼭 하고 싶어? 그러면 거기에 대한 책임은 네가 다 져야 한다’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각인시켜주셨어요. 이후부터는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는 친척들 사이에서 아직까지도 ‘특이한 아이’라고 불린다. 일가친척 중 연예계나 예술 쪽으로 진출한 사람이 그밖에 없기 때문. 다행히 그의 아버지는 이런 그를 이해하고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을 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활동해보라고 허락해줬다. 그는 “강남에서 쭉 커왔지만 깨어 있는 사고를 갖고 계신 아버지 덕분에 소위 말하는 ‘강남 8학군 키드’와는 다르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며 멋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그의 어머니도 그가 출연한 작품이 방송을 탈 때면 매우 좋아한다고. 그는 “엄마가 너무 좋아하셔서 요즘 들어 작품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작품 선택 기준? 저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역할이요”
김재욱은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8년 전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 데뷔했다. 극중 인디밴드 멤버이던 이나영의 곁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던 동료로 출연한 것. 폭탄머리에 거침없는 성격이 인상적이었지만 출연 장면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당시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 막 입학한 그는 실제로도 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출연했다.
“우연히 감독님을 알게 돼 드라마에 출연하긴 했는데 드라마 끝나고 나서는 후회했어요. 연기하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냥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제대로 준비하지도 않고 덤볐다가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죠.”
연기에 열정을 갖고 임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는 연기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학교 수업에만 충실했다. 이 외에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모델 일이 대학 입학 후 더 많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쇼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큰 키에 마른 몸매인 그는 당시 미소년 모델들이 주류를 이루던 패션계 트렌드 덕분에 많은 디자이너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그의 마음속에는 불현듯 지난날 제대로 연기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내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욕망이 꿈틀꿈틀 솟아오르더라고요. 대학로에서 알게 된 연극배우에게 전문적인 연기 트레이닝을 받았죠.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어떤 마인드를 갖고 연기에 임해야 하는지 등 기본적인 것들을 배웠어요. 그때 많은 도움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제대로 준비한 덕분에 5년 뒤 그는 곧바로 빛을 보게 된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 출연,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 윤은혜·공유·이선균 등이 출연한 이 작품에 그가 캐스팅된 배경이 궁금했다.
“많은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그중 하나였어요. 그때 전 일본 남성들의 독특한 패션에 빠져 있었는데 아이라인, 매니큐어, 스키니진… 그런 것들이었죠. 선글라스도 끼고 들어가서 감독님 앞에서도 안 벗었던 기억이 나네요. 나중에 캐스팅되고 나서 저도 제가 왜 됐는지 궁금해서 감독님께 물어봤더니 ‘몇천 명 중 네가 제일 건방져 보였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드라마 촬영 때도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해라’고 주문하셨죠.”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김재욱은 이 작품 이후 확실히 이름을 알렸다. 함께 했던 출연진도 이후 모두 톱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촬영 내내 가족 같은 분위기를 유지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공유·윤은혜 등과 연락하며 지낸다고.
“은혜는 자주 못 보지만 연락은 하고 지내요. 공유 형은 휴가 때마다 봤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데 형이 복무하며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한번 출연하기도 했어요. 형 제대 막바지에는 우연히 방송을 듣다가 장난기가 발동해서 ‘서울에 사는 김씨’라며 전화연결을 했는데 그때 형이 ‘방송을 장난으로 아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죠(웃음).”
‘커피프린스 1호점’ 이후 그는 다음 작품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언제나 영화를 동경했기 때문에 꼭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고. 그는 주지훈·유아인 등과 함께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 출연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한 번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성의 게이’로 등장했는데 영화 개봉 후 파장이 대단했다. 모두들 그를 놓고 “진짜 게이”라 말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재욱은 이 작품을 위해 역할을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했다. 이태원 게이바를 찾아 사람들을 관찰했고, 게이들만이 알 수 있는 코드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심에 시스루 소재 의상 등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소품들에도 신경을 썼다.
“등장하는 장면마다 임팩트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작품이었어요. 시나리오 받았을 때도 저 이외의 다른 배우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자신 있었죠.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부은 탓에 작품을 끝냈을 때는 다시 하라고 해도 못하겠더라고요. 너무 잘했는지 그 다음부터 들어오는 작품이 죄다 게이 역할이었어요(웃음). 출연했다가는 왠지 국가대표 게이가 될 것 같아서 다 거절했죠.”
이후 그는 남성성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KBS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 출연했다. 우연히 만난 무휼(송일국)의 정의로움에 감동받아 생사를 함께하게 되는 동지 추발소를 연기했다. 주변에서는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며 출연을 말렸지만 또래 배우에게서는 배울 수 없는 점을 많은 선배에게 배우고 싶어 출연했다. 그의 예상대로 값진 수업이 됐다고 한다.
모델·가수·연기자 어떤 끈도 놓고 싶지 않아
김재욱은 이 작품 이후 1년간 휴식을 취했다. 2007년부터 쉬지 않고 작품을 한 터라 지쳐 있었기 때문. 소모한 시간만큼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잠시 내려놓았던 음악을 다시금 찾았다.
“2002년 스무 살에 만난 친구들과 결성한 그룹이 있어요. ‘윌러스’라는 록밴드인데 대학 때 클럽에서 공연도 하고 음악축제 무대에 서기도 했죠. 지난 가을에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이라는 축제에 나가 공연하기도 했어요. ‘바람의 나라’에 출연하면서 음악에 대한 갈증이 깊어졌는데 한 해 동안 원 없이 밴드 활동하면서 소원 풀었죠.”
김재욱은 연기를 하는 틈틈이 음악활동은 물론 모델 일도 함께 해왔다. 어느 한 가지로 대성하고 싶은 욕심은 없는지 묻자 “전혀 없다”고 잘라서 말한다.
“제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닫아두고 싶지 않아요. 하고 싶은 일들은 하면서 살려고요. 사실 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스스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하면 되는 거고,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음악, 모델, 연기 세 가지 모두 즐기면서 하고 있어요.”
연예계로 들어선 후 그는 주변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썼다고 한다. 유혹도 많고, 잠깐 방심하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곳이 연예계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재욱은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만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연예인은 모두 프리랜서예요. 그렇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전 애초에 욕심 부리지 않고 제 고집대로 일을 해왔어요. 그만큼 손해도 많이 봤지만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환경이 뒷받침 되는 한 욕심 없이 오래 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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