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며 처음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꿈꿨어요. 보르헤스의 시가 묘사하는 환상적인 도시를 직접 거닐고 싶었죠. 탱고의 기막힌 동작과 영화 ‘사랑의 욕망에 불타는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 꿈에 불을 지폈어요. ‘언젠가 꼭 가겠다’는 다짐을 이제야 실천한 거죠.”
까무잡잡한 피부와 친근한 미소가 인상적인 손미나 전 KBS아나운서(37). 그가 KBS에 사표를 내고 여행 전문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행을 업으로 삼겠다니 현실감각이 2% 부족하지 싶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여행작가 손미나’라는 타이틀엔 어색함이 없다. 여행서 ‘스페인, 너는 자유다’ ‘태양의 여행자-손미나의 도쿄 에세이’를 쓰는 틈틈이 ‘엄마에게 가는 길’ ‘연필 하나’ 등 번역서를 내며 꾸준히 글과 관련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 그가 스페인과 도쿄를 거쳐 선택한 곳은 아르헨티나. 그곳에서 몸과 가슴으로 진하게 느낀 감상을 담아 11월 중순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삼성출판사)를 펴냈다. 사랑과 탱고의 도시인 ‘남미의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을 똑 닮은 그를 만났다.
‘탱고를 출 때는 한순간도 두 다리 모두에 무게가 실려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탱고는 사랑과도 닮은 면이 있었다. 내 자신의 인생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온 마음을 주는 일.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면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일이다. 사랑을 이유로 내 모든 걸 던지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상대에게 완전히 몰입하지 않는 사랑은 있을 수 없을 테니까.’(‘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中)
1st Tango : 열정을 채우다
그가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것은 지난해 초. 한국은 쌀쌀했지만 지구 반대편인 그곳은 여름이었다. 여행은 그곳 사람들처럼 단골 카페를 정해 ‘라그리마’를 마시며 독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나 스스로 길들이고 또 나에 의해 길들여질 장소’를 찾는 것은 현지인과 이방인의 기분을 조화롭게 느끼기 위한 그만의 여행법이다. 라그리마란 커피 95%에 우유를 ‘떨어뜨린’ 것으로, ‘눈물’이라는 뜻.
“스페인 대학원 시절 만난 친구가 소개해준 카페를 단골가게 삼았어요. 백년이 넘은 카페인데, 저명한 과학자와 문인들이 거쳐간 곳이죠. 꼭 작가가 아니라도 그곳은 책 읽고 글 쓰는 사람들로 붐벼요. 24시간 문을 여는데, 새벽까지 커피 한 잔을 놓고 분야를 넘나드는 토론을 하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독서와 토론을 즐긴대요.”
여행은 대개 휴식이나 즐거운 한때로 남지만 가끔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의미 있는 여행은 ‘일생의 시간’으로 남아 일상의 고비마다 뜻밖의 힘을 발휘한다. 손미나에게는 이번 아르헨티나 여행이 그랬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보낸 시간은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인생의 깨달음을 줬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아름답지만 슬픈 사연도 많은 곳이에요. 이민 정책으로 수많은 민족이 섞인데다 20세기 최고 미스터리라는 경제위기 이후 경제상황도 매우 불안정하죠. 돈 벌러 떠난 엄마를 찾아 떠난 ‘엄마 찾아 삼만 리’ 아시죠? 그 작품의 배경이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예요. 굴곡 많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참 꿋꿋해요. 예술을 즐기고 희망을 잃지 않죠. 저도 그런 열정의 기운을 가슴 가득 담아왔어요.”
열정의 기운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그곳 사람들은 보통 투잡족이다. 그리고 2차 직업은 보통 예술과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생물학자이면서 서커스 단원이고, 여행사 직원이면서 어릿광대인 식이다. 많은 이가 취미를 넘어 예술을 직업처럼 즐긴다는 것이다.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아르헨티나는 독재 정부 아래 오랜 세월 표현의 자유에 제약을 받았어요. 또 하루아침 온 국민이 파산하며 정신적 풍요를 갈구하게 됐죠.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출구로 예술을 택한 게 아닌가 해요. 정신적인 사치로 힘든 시절을 이겨낸 거죠.”
같은 맥락으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심리치료를 일상적으로 여긴다. 거의 모든 국민이 한 번 이상 심리치료를 받았고, 정기 상담을 하는 이도 적지 않다. 온 국민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안고 단단하게 삶을 수련하는 나라. 그들을 보며 손미나는 “잃은 것을 생각하고 후회하기보다 남겨진 것으로 새로운 삶을 꾸리는 지혜를 배웠다”고 말한다.
1 매일 아침 찾았던 단골 카페에서. 2 아르헨티나의 ‘래리 킹 쇼’인 시사 토크쇼 ‘23minutos’에 출연해 여행담을 들려줬다. 3 인디언 전통악기인 ‘차랑고’를 연주하는 인디언 청년 인티. 4 안데스 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칼라파테 산에서 현지 친구들과 진한 우정을 나눴다.
2nd Tango : 아픔을 치유하다
‘춤추는 슬픈 생각’ ‘노래하는 영혼’ ‘아르헨티나가 존재하는 이유’ ‘꿈꾸지만 경험하기 힘든 완벽한 키스’….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일컫는 표현들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탱고는 단순한 춤이 아니다. 이민자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시작됐다는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정서 그 자체다. 무대가 아닌 거리에서 운동화를 신고 추는 풍경도 흔하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탱고에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노력 끝에 멋진 데뷔무대를 치렀다.
“탱고에 매료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무는 이들도 많아요. 한국에서 탱고를 위해 이민 온 남자분도 있더군요. 탱고 강사 노라에게 춤을 배우며 사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탱고는 마음을 열고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스텝이 꼬여버려요. 한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이루기 힘든 사랑과 참 많이 닮았죠.”
만남만큼 이별도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이별이 더 중요할는지 모른다. 가슴 가득 받아들인 사랑. 잘 떠나보내지 않으면 닫힌 마음을 다시 열지 못하는 마음병이 똬리를 튼다. 옛사랑, 그리고 그 시간 속 자신과 잘 이별할 수 있는 방법으론 여행만 한 게 없다. 결혼 1년만인 지난해 이혼 후 힘든 시간을 보낸 그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다시금 사랑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닌가 싶어요. 다소 시간이 지나기도 했지만 여행을 하면서 힘을 내게 됐어요.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들려주셨어요. ‘힘든 일은 담아두지 말고 찬란한 태양 아래 던져라. 그러면 그늘조차 없을 것이다’라고요. 여행 자체가 치유과정이었어요.”
여행의 기억을 글로 담아내는 작업도 도움이 됐다. 아이를 낳듯 글쓰기의 산고를 거치면서 자신의 감정을 냉정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고통스러운 드잡이였지만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칠 힘을 얻었다. 그 힘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나눠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책은 세상을 향한 첫 번째 선물이다.
‘“프랑스, 페루, 한국 경상도 전라도 모두 ‘자유다’ 시리즈를 내면 되겠다.”
처음 ‘스페인, 너는 자유다’라는 책을 냈을 때 동기인 신영일 아나운서가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전업작가를 선언한 뒤 나온 책이 벌써 3권. 그의 말대로 정말 작업을 이어갈 수 있어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다. 쉼 없이 여행하고 책을 냈지만 일을 수월하게 진행한 것은 아니다. 책마다 참신하고 친근한 콘셉트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스페인 편은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겪은 에피소드와 30대 직장여성이 맞닥뜨리는 어려움과 딜레마를 담았어요. 일본 편은 가깝지만 먼 나라인 그곳을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역사적인 미묘함도 함께 담으려 했죠. 아르헨티나는 굴곡과 사연이 많은 나라인데,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먼 나라지만 결국 사람이기에 진심은 통한다는 이야기를 담았죠.”
3rd Tango : 다시 꿈꾸다
손미나는 스스로를 인복은 타고났다고 평가한다. 아나운서를 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는 좋은 친구가 많다. 이번 원고도 가족과 친구들이 먼저 읽고 품평을 해줬다. 가족들은 “뭐든 할수록 좋아지는지 지난번 책보다 재미있다”고 평했고, 동기인 윤인구·정세진 아나운서도 “그곳 사람들 속에서 길어낸 이야기라 더 재미있는 것 같다”며 칭찬했다. 이렇듯 멋지게 전직에 성공했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직업적으로 떠나는 여행은 구미가 덜하지 않을까.
“오히려 반대예요. 책에 담을 요량으로 더 많이 생각하고 느끼고 보게 돼서 여행을 200% 즐길 수 있어요. 또 일은 사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시작돼서 다니는 동안은 부담이 없어요. 마이크를 놓은 지 꽤 됐지만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임을 실감해요. 아직 방송국이 집 같고 말하는 게 즐거워요. 아르헨티나에서도 우연히 기회가 닿아 그곳 토크쇼에 출연했어요. 하하.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언제든 방송을 하고 싶어요.”
새로운 길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건네고픈 조언도 있다.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 아나운서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많다. 정체성이나 진로에 대한 상담 요청에 그는 이렇게 조언한다. 아나운서의 생명인 신뢰와 언행을 바로 지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기 방송인이 아닌 존경받는 사회인이 되라고. 윤인구 아나운서는 그를 두고 “KBS가 품기에는 열정이 많은 친구다. 나가서 더 큰 날개를 펼치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책을 내고 글을 쓰며 방송에서 느끼지 못한 보람도 찾았다. 바로 본인의 인생경험, 사회경험, 공부경험을 보다 많은 이와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서점에서 팬에게 “언니 글이 힘들 때 제 손을 잡아줬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그가 앞으로 걷고자 하는 길은 그런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채운 열정으로 그는 다시 신발 끈을 맨다. 다음엔 유럽의 어딘가에서 길어올린 지혜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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