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재순(62)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길 듯한 우아한 이미지. 연기인생 40년 동안 그러한 이미지를 능란하게 이용하거나, 또 과감하게 벗어던지면서 수많은 인물을 소화해온 배우다. 첫 만남임에도 인터뷰 장소인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생경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사를 건네자, 낯선 이에 대한 경계의 낯빛을 풀며 다감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일순간 긴장을 누그러뜨리게 만드는 미소는 이미지 너머 실제 그의 성품을 가늠케 했다.
정재순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배우가 아니다. 줄곧 배우라는 이름을 붙들며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다. 드라마 ‘다방골 알부자’(68)에서 주인공 뒤를 졸졸 따르던 젊은 시녀 역을 시작으로 ‘배반의 장미’(89)에서 그림을 통해 시집살이 설움을 삭이는 맏며느리, ‘청춘의 덫’(97)에서 조카를 극성맞을 정도로 끔찍이 아끼는 이모,‘하늘만큼 땅만큼’(2007)에서 푼수기 다분한 정 많은 새엄마, 최근작 ‘경숙이 경숙아버지’(2009)의 의붓아들에게 빌붙어 사는 몰염치 할머니까지, 브라운관 속 역할이 나이를 먹듯 인간 정재순 역시 그 속에서 나이가 들었다. 반평생 가까이 배우로 살아왔음에도 “아직도 부끄럽고, 부족하다. 세월이 나를 배우로 만들었을 뿐이다”며 그간의 공을 소박히 물리는 정재순. 얄팍한 경력만으로도 연기를 다 안 듯 허세 부리는 요즘 세상에 베테랑 배우의 겸손은 그래서 더욱 값져 보인다.
신인시절 따끔한 질타가 평생 배우생활 자양분 돼
68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배우를 꿈꿨던 건 아니다. 친구가 탤런트 모집원서를 건네며 등을 떼밀지 않았다면 배우의 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열망이나 재능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더욱이 연기에 임하는 자세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일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탤런트를 평생 업으로 삼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데뷔작 ‘다방골 알부자’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마음도 서서히 누그러졌다.
“방송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저절로 탤런트가 되는 줄 알았어요. 교육기간 석 달이 딱 지나니까 얼마나 힘들던지 고개가 푹 숙여지더라고(웃음). 사실 더 열심히 안 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방송국은 군대 간 남자친구를 잠시 기다리는 장소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 사람 제대하고 직장 잡으면 결혼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거든요. 연기자로서 개념 없이, 완전히 놀러 다닌 거죠(웃음).”
그 철없던 신인이 배우로서 자의식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TBC ‘외아들’(72)에 출연할 당시 PD로부터 연기력에 대한 혹독한 질타를 받은 것. 자존심에 상처를 입다 보니, 나중엔 오기가 생겼다. ‘나도 잘할 수 있어. 앞으로 보란 듯이 성공할 거야.’ 비중에 상관없이 주어진 역할마다 이 악물고 매달렸다. 그러면서 점차 연기력에 대한 비판은 쑥 들어갔다. 그 이후로 줄곧 잠시 쉬어가는 장소쯤으로 치부해온 방송국이 평생을 거처하는 일터가 됐다.
배우에게 이미지는 빛과 그림자와 같다. 기존 이미지에 맞는 역할이 주어졌을 땐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빛이 되지만, 그와 정 반대의 역할이 주어졌을 땐 자신을 속박하는 그림자가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을 속박하는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양한 엄마의 모습을 연기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 한다. 자식들 건사하기 위해 허리띠 졸라매는 억척스런 엄마, 푼수기 다분하지만 속은 따스하고 정 많은 엄마, 자식들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안는 포용력 넓은 엄마 등 삶의 질곡이 느껴지는 인물을 그려보고 싶다.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 보여준 할머니 역할이 기억에 남아요. 6·25 전후 우리 민족의 삶과 애환을 경숙이의 눈을 통해 보여준 드라마였어요. 거기서 의붓아들 집에서 빌붙어 사는 눈치 백단 할머니 역할을 맡았는데, 제가 즐기면서 연기한다는 걸 느꼈죠. 우아하고 멋진 역할이면 스트레스 좀 받거든요(웃음). 근데 그럴 필요가 없는 거야. 연기를 할 수 있는 역할이 이런 거구나 새삼 느꼈어요.”
지금껏 브라운관 속에서 반듯한 인물로 많이 살아봤으니, 앞으로는 빈구석이 많은 수더분한 인물로 살아봐도 좋을 듯싶다. “차갑게 보인다는 소리 많이 들어요. 사실 안 그런데…. 얘기해보니까 안 그렇죠?” 그가 소녀처럼 해사하게 웃는다.
지난해 다섯 번째 개인전에 전시했던 작품. 삶과 자연, oil on canvas, 2008.
연기생활 어렵고 힘든 고비 그림 그리며 극복
그의 이름 앞에는 배우와 더불어 또 하나의 수식어가 붙는다. 바로 화가 정재순이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지 20년 정도 됐으니, 연기 경력의 딱 반이다. 90년 ‘삶과 자연’이란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지금껏 다섯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중학교 때 처음 붓을 든 이후 화가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화가가 아닌 배우가 돼서도 물감을 모으거나 스케치를 하면서 못다 이룬 꿈을 달래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은사인 조각가 최복규 선생을 찾아가 그림에 대한 기본기를 닦았다. 이후 수채화 화가 박상륭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첫 개인전을 열 즈음 김수현 선생님의 ‘배반의 장미’에 출연하고 있었어요. 드라마에서 집안 살림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그림을 그리며 해소하는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는데, 끝부분에 개인전을 여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제가 개인전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김수현 선생님이 아시고, 그 장면을 일부러 넣어주신 거죠. 드라마와 동시에 현실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이걸 누려도 되나 할 정도로 뜻 깊고 감사했죠.”
‘88올림픽 스포츠 공모전’(88)을 비롯해 ‘서울미술제’(89), ‘목우회 구상전’(90)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을 하면서 연기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한낱 욕심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96년 네 번째 개인전을 마무리한 이후 ‘과연 내가 연기자인가, 아니면 화가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숱한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몇 년 동안 그림 그리는 일보다는 연기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무려 12년이 걸렸다. 얼핏 연기를 위해 그림을 포기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에게 그림이 없었다면 연기도 없었다. 배우로 살면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그림은 그려서 뭐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좋아해주지도 않으면 그게 다 짐일 뿐이잖아요. 우리 아이들에게 짐만 주고 가는 건 아닐까 고민이 많았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지금껏 저를 지탱해 준 게 그림이 아니었나 싶어요.”
연기생활 틈틈이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가족의 후원 덕분이기도 하다. 남편은 ‘그림이 어떠냐?’는 물음에 ‘문외한이 뭘 아냐’며 무뚝뚝하게 답하면서도 밖으로 스케치하러 갈 때는 따라나서기도 한다. 남편이 묵묵한 지원군이라면 아들딸은 보다 적극적인 지원군이다.
“둘 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어요. 저의 끼를 물려받기도 했을 테지만 사실 강요도 좀 했죠(웃음). 그래도 아이들 의사를 많이 존중하면서 키웠던 것 같은데, 걔네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대요. 탤런트인 엄마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까 늘 조심하며 살았다고…. 그런 게 늘 미안해요.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기도 하고. 다만 하루빨리 손자를 안겨줬으면 하는데, 해결을 안 해주네요(웃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 사랑 받고, 또 베풀며 살고 싶어
정재순의 집 거실 한쪽 벽엔 영화 ‘육식동물’(84)의 흑백 스틸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그는 언제나 눈부신 젊음으로 머물러 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혼신을 다했던 그때의 열정, 태국영화제에 진출해 작품성을 인정받았을 때의 환희, 작품을 함께 한 김기영 감독의 타계 소식을 접했을 때의 안타까움…, 영화에 대한 소소한 기억이 그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이런 모습이 나에게도 있었나 싶어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아름다운 한때죠. 한편으론 참 어수룩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산 사람이죠. 아이들 돌보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집안 살림 하느라 연기에 전념하진 못했어요. 우리 아이들한테도 늘 하는 얘긴데, ‘밥순이’ 노릇을 조금 덜 했으면 지금보단 더 훌륭한 연기자가 돼 있을 거라고. 일종의 변명이죠(웃음).”
배우, 화가, 아내이자 엄마 몫을 해내느라 참 바쁘게 살아왔다. 몇 년 동안 쉴 틈 없이 드라마를 했고, 그 바쁜 와중에 전시회도 가졌다. 그리고 장성한 아들딸 짝지어 시집 장가도 보냈다. 이제 한 템포 쉬어갈 때가 됐다. 올 연말까지는 스케줄을 비우고 간만의 여유를 즐길 참이다. 요즘 책 읽는 걸 소일거리 삼고 있다. 6권으로 묶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을 읽고 있는데, ‘신들하고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드라마를 함께 하면서 친해진 탤런트 반효정·김미숙·장정희·견미리 등 동료 선후배와의 만남도 자주 갖는다. 얼핏 제각각일 것 같은 사람이지만 의외로 서로 마음이 잘 통해 가끔 만나서 수다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씩 하곤 한다. 지난 봄에는 다 같이 매화마을 나들이도 다녀왔는데, 그 모습이 한 아침 방송에 소개돼 친목회(?)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10월쯤엔 아들 내외가 사는 미국으로 여행도 계획하고 있다. 충분히 쉬고, 보고, 듣고, 즐기는 이 여유가 새로운 연기와 작품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될 터다. 일상의 소소한 체험 하나하나가 앞으로 그가 연기하게 될 어떤 인물 속에 녹아들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나이 들어간다는 건 서글픈 일이죠. 하지만 대신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 같아요. 연륜이 붙어 뭐든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얼굴도 좀 더 편안한 인상으로 바뀌면 좋겠어요.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는데, 내면을 윤택하게 가꾸다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앞으로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다시 그 사랑을 베풀며 살고 싶어요.”
연기자로서, 화가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힘들고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이 정도면 감사한 삶이라고 자축하는 정재순. 젊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을 나이가 들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커졌다. 흘러가버린 젊음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연륜이 안겨주는 여유를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나이 듦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 변하는 건 겉모습일 뿐 인생은 언제나 전성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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