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초, 서울시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회의실에서 말쑥한 양복차림의 이덕화(57)를 만났다. 한 손에는 담배, 한 손에는 서류 뭉치를 들고 고뇌하는 그의 표정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올해로 3회를 맞는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그는 8월24일 개막식 준비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대상포진에 걸려 한 달 반 가까이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고 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집행위원장을 맡은 그에게 소감을 묻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쉽지 않아요” 한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배우 섭외. 그는 후배 연기자들의 영화제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섭외전화’를 돌리며 열정을 쏟고 있다.
“요즘은 ‘신비주의’가 유행이어서 그런지 ‘코빼기’도 안 비치는 연예인이 많아요. 자신들을 위한 행사인데도 말이죠. 그래도 지난해에는 장동건 그 친구 덕분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영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자신이 직접 소년소녀가장 3백여 명을 대한극장에 초청해 영화도 보여주고 선물도 나눠주고 했거든요.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하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고)현정이는 개막식날 ‘선덕여왕’ 촬영이 있다고 하고, (이)병헌이는 제주도에 있는 줄 알고 한참 통화했는데 헝가리라고 하고…(웃음).”
그가 영화제를 통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충무로의 부활’이다. 한국영화의 메카였던 충무로가 불과 몇 년 사이 인쇄소 사무실로 넘쳐나는 현실을 더 이상 뒷짐 지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에게 충무로는 아버지 고 이예춘 선생과 함께 40여 년 동안 열정을 불살랐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촬영하러 충무로로 나오면 어김없이 설렁탕집에서 그날 촬영이 있는 배우, 스태프를 다 만날 수 있었어요. 영화사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편집부터 포스터 작성까지 모두 그 안에서 이뤄졌죠. 그때를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고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 노인네(아버지)도 충무로에서 청춘을 다 바치고 환갑이 안 된 나이에 돌아가셨고, 저 역시 어린 나이에 충무로에 입성해 지금껏 많은 걸 얻었죠. 집행위원장 자리가 힘에 부쳐 그만두고 싶다가도 충무로 재건을 위해 애써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마음을 다잡곤 해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이덕화는 76년 영화 ‘진짜 진짜 잊지마’로 데뷔했다. 이어 ‘진짜 진짜 좋아해’ ‘진짜 진짜 미안해’ 등에 출연하며 임예진과 함께 하이틴 스타로 떠오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93년 윤삼육 감독의 ‘살어리랏다’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해외영화제 입상이 처음이었던 그는 당시 현지에서 가졌던 인터뷰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영국 기자였는데 ‘당신이 어떤 배우인지를 소개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관심을 가져주는 게 고마워서 ‘한국 같으면 당신한테 밤새 술 사주고 싶다’고 했어요(웃음). 그러고 난 뒤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와 이렇게 당신들과 인터뷰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아버지는 40년 동안 영화판에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고, 대를 이어 내가 20년째 연기하고 있다. 우리 가족이 영화계에 종사한 지 반세기가 넘었다’고 말했죠. 그때부터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보통 10분이면 끝나는 기자회견이 1시간 가까이 걸렸어요.”
지난해에는 그의 딸 이지현(25)이 드라마 ‘애자 언니 민자’로 데뷔, 3대째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같은 드라마에 딸과 함께 출연했던 이덕화는 “아이가 어찌나 흉내(연기)를 잘 내는지 깜짝 놀랐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문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은 적 없는데 카메라 앞에서 떨지 않고 연기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고.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이지현은 올해 동국대 연극영화과 3학년에 편입해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있다.
“우리 딸뿐만 아니라 요즘 친구들은 끼를 타고 난 것 같아요. 영상매체 홍수 속에 살아서 그런가…. 저는 영화하기 전 TBC 공채 13기로 방송국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대사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서 쩔쩔맸어요. 요즘처럼 컷별로 편집이 안 되고 신으로 편집을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연기를 잘 해도 단역이 실수하면 다시 처음부터 촬영을 해야 하니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웃음).”
사실 이덕화는 아들 태희씨(30)가 연기자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은 미국 보스턴 칼리지를 졸업한 뒤 청와대에 입사해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그는 “아들이 딸보다 끼는 많은데 키가 작아서 연기자의 꿈을 접었다”며 웃었다.
78년 탤런트 출신 김보옥씨와 결혼한 이덕화는 연예계에서 소문난 ‘공처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한 동네에 살며 동갑내기 친구로 지내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터 결혼에 골인했다. 김보옥씨는 원로 영화배우 김보애씨의 동생으로, 배우 김진아에게는 이모가 된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김씨는 결혼 후 연기활동은 물론 무용에 대한 꿈도 접었다. 네 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해 중학교 때 무형문화재에게 사사하는 등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지만 가정에만 전념하길 원하는 그의 뜻에 따라 일절 외부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취미생활로 간간히 무용을 해 온 김씨는 지난 2006년 결혼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그때도 처음에는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죽기 전에 꼭 무대에 서야겠다’고 강경하게 나와서 소원을 들어줬죠. 사실 그동안 아내 고생시킨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물여섯 살 때 오토바이 사고가 크게 나 3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그때 아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성껏 간호를 해줬어요. 결혼 전이었는데도 말이죠. 당시 처형들이 몇 번이나 병원으로 찾아와 아내를 끌고 가려 했지만 끝까지 제 곁을 떠나지 않더라고요. 3년 내내 병실 보호자 침대에서 새우잠 자며 간호해준 걸 잘 알기 때문에 지금은 아내한테 꽉 붙잡혀 삽니다(웃음).”
맘고생 많이 시킨 아내에게 평생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 터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도 아내에게 또 마음의 빚을 졌다. 96년 15대 총선에서 경기광명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그는 선거 비용으로 평생 모은 돈을 탕진하고, 대인기피증 때문에 무인도로 들어가 한 동안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송활동도 중단했는데, 6년 동안 매스컴을 떠나 있던 그는 2002년 사극 ‘여인천하’로 복귀했고 이후에 ‘무인시대’ ‘제5공화국’ ‘대조영’ 등 굵직굵직한 드라마에 출연하며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오랜 시간 술에 빠져 지내면서 원망도 많이 하고 후회도 했지만, 결국 다 제가 자초한 일이더라고요. 그 후에라도 다시 받아준 시청자와 방송 관계자들께 고마운 마음이죠. 요즘도 가끔 정치할 생각 없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마음 접은 지 이미 오래예요. 또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4년 동안 국회의원 하고 돌아오면 그때는 환갑, 진갑 다 됐을 텐데 누가 받아주겠냐. 한 번은 용서되지만 두 번은 안 된다. 4년 동안 국회의원 배지 다는 맛에 정치할래, 아니면 반평생 함께해온 사람들이랑 죽을 때까지 연기할래’ 하고요. 지인의 그 말 한마디에 다시는 정치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늘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라는 이덕화는 세상의 남편들에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무조건 아내에게 복종하고 살라”고 충고했다. 그는 경제권도 아내에게 넘긴 지 오래 됐고, 필요할 때마다 용돈을 타 쓴다고 한다. 그는 “낚시 갈 때면 밑밥 값 좀 달라고 아내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며 웃었다.
이덕화는 ‘가발 쓰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30대 초부터 가발을 쓰기 시작해 올해로 13년째 가발 CF 모델로도 활동 중이다.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출연할 때였는데, 어느 날 김수현 작가가 ‘너는 머리가 그게 뭐니? 그 꼴로 무슨 배우를 하겠다는 거야? 가발이라도 좀 써’하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그러고 생각해보니 가발 쓰는 게 뭐 대수냐 싶어 쓰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가발 대신 모자 쓰고 다닐 때도 많은데, 가끔 바람에 날려 모자가 벗겨지면 편안하게 다시 주워서 써요(웃음). 옛날에는 사람들이 볼까봐 마음 졸이고 했는데, 이제는 나이도 있고 배짱입니다. 하하.”
처음 가발 광고모델 제안을 받았을 때는 업체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거절했다고 한다. ‘남의 약점을 이용해 돈 벌어 먹겠다는 심보’라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업체 측의 끈질긴 구애로 결국 모델로 나선 그는 그 덕에 두 아이의 유학비를 댈 수 있었다.
“낙선 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라 광고출연료가 큰 도움이 됐어요. 대학에 다니고 있는 두 아이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여야하나 고민하던 시기였거든요. 요즘도 처조카 사위인 최병서가 만날 놀려요. 머리 빠진 걸로 돈 버는 연예인이라면서요(웃음). 머리스타일도 해결되고 생활에도 도움이 되니 저로서는 고맙죠.”
현재 KBS 사극 ‘천추태후’에 출연 중인 그는 이번 작품을 끝낸 뒤에는 다시 한 번 영화에 욕심을 낼 생각이다. 드라마로 연기활동을 재개한 뒤 한동안 그 분야에 치중했던 게 사실이지만, 언제나 가슴에는 영화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영화 한 편에 제작비 1백억원이 들고, 1천만 명의 관객이 드는 시절에 영화를 못한 게 억울하다. 앞으로라도 그 한을 풀고 싶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충무로국제영화제는 8월24일부터 9월1일까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40개국 214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개막작은 나탈리 포트만의 감독 데뷔작 ‘뉴욕, 아이 러브 유’가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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