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은 전미선(37)의 하루는 촬영장에서 시작해 연습실에서 끝난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 영화 ‘마더’ 촬영에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까지 병행하고 있기 때문. 연극 연습 전, 잠시 짬을 내 만난 전미선은 새벽에 끝난 촬영 때문에 얼굴이 푸석해 보였지만 시종일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요즘같이 즐거운 때가 없어요. 결혼하고 나서 연기를 그만두고 평범하게 내조하며 살고 싶었는데 막상 그러려고 보니 이미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더라고요. 집에서 살림하며 사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 연기 욕심이 생긴 찰나 여러 곳에서 작품을 함께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죠. 몸은 힘들지만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기분이라 뿌듯해요(웃음).”
연극무대에 오르는 건 15년 만이라는 그는 “첫 무대보다 더 떨린다”고 말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데다 대선배인 강부자와 호흡을 맞추기 때문. 낯가림이 심한 그는 처음엔 강부자가 어렵게만 느껴졌다고 한다.
“무서우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레 겁먹고 거리감을 뒀던 것 같아요. 딸처럼 다가갔더니 정말 예뻐해주시더라고요. 선생님은 순수하고 여린 면이 많으세요. 떡을 좋아하시는데 한 박스 사와서 일일이 스태프에게 나눠줄 정도로 정이 넘치시는 모습을 보고 ‘진짜 어머니 같다’고 생각했죠(웃음). 그러다가도 연기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몰입하셔서 ‘천생 연기자구나’ 싶더라고요. 선배로서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에요.”
어린 시절 연기활동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열정 느끼지 못해
그는 스스로 “상대 배역 복이 많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호흡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이기 때문.
“영화 ‘마더’에서는 김혜자 선생님과 함께하고 있어요. 촬영할 때 조근조근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열정을 뿜어내실 때는 촬영장이 숙연해질 정도였어요. 지난 한 해 동안 드라마 촬영을 같이한 이미숙 선배는 이제 친언니처럼 느껴져요. 굉장히 털털한 성격인데 제가 아이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이 덜 빠진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을 때 ‘아이 낳고 6개월 내 원상복귀하지 않으면 평생 갈 것’이라며 조언도 해주더라고요(웃음).”
89년 드라마 ‘토지’로 데뷔한 이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온 전미선은 여전히 선배 연기자에게 깍듯한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돌이켜볼 때 자신의 연기에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 20년 동안 연기를 한 사람의 발언치고는 의외였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연기활동이 적성에 맞지 않아 늘 ‘시집가면 그만둬야지’하는 생각을 했어요. 가족들도 함께 여행 가는 걸 즐기고 오붓한 시간 보내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제 의견을 존중해줬죠. 때문에 한동안은 캐스팅 제의가 들어와도 거절부터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워요.”
욕심 없이 인생을 즐기며 살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 시점은 2001년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찍으면서였다고 한다. 이병헌의 아내로 출연 제의가 들어왔는데 그때도 처음에는 선뜻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그런데 당시 자신을 추천해준 지금의 영화 ‘마더’ 제작사 이사가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를 따끔하게 해줬다고 한다.
“출연료를 협상하는 자리에서 그분이 한 말이 제게 비수가 됐어요. ‘한 작품에서 아무리 연기를 잘했더라도 1~2년가량 쉬면 누구나 도태되기 마련인데 왜 그걸 직시하지 못하냐’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다음 대회에서 또 금메달을 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하물며 연기자가 노력도 없이 계속 대우받기를 원하냐는 의미였죠.”
그때부터 그는 자신에게 꾸준히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 것에 감사하며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아내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뒤 2006년, 생애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았다.
“영화 ‘연애’ 대본이 제게 왔을 때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라 ‘내게 딱 맞는 옷’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서른 살이 넘어서 노출 장면이 많은 작품에 출연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죠. 많은 분이 ‘이제 안되니까 벗는구나’하는 시각으로 볼까봐 두려웠거든요. 결국 다른 배우의 손에 넘어갔는데 촬영을 앞두고 그 배우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못하겠다고 말했나봐요. 다시 제게 온 걸 보고 ‘이 작품은 나와 인연이 깊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출연하게 됐죠.”
“석 달 동안 부산에서 영화 촬영하며 촬영감독이던 남편과 연인으로 발전했죠”
그는 영화 촬영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결혼의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20대 때부터 바라던 꿈이 서른 살을 넘길 때까지 이뤄지지 않는 걸 보면 스스로 ‘결혼을 못할 팔자’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순간, 남편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촬영감독이던 상훈씨를 처음 봤을 때 유부남인 줄 알았어요(웃음). 살이 찐데다 촬영이 끝나면 곧장 숙소로 돌아가기에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회식 자리에서 이야기 나누던 도중 아니라는 걸 알고 ‘살을 빼면 좋은 사람 소개해드릴게요’ 하고 농담조로 말했죠.”
그는 농담이었지만 남편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촬영이 끝나고 한 달 뒤 정말로 10kg을 뺀 채 그를 찾아 왔다고 한다. 놀란 그는 ‘이렇게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라면 어떤 여자를 소개해줘도 되겠다’는 생각에 이상형을 물었다고. 그는 망설임 없이 ‘미선씨 같은 사람’이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상훈씨가 진지하게 ‘제게 한 달만 기회를 주세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영화 촬영을 하면서 저에 대한 마음이 커졌다며 고백하는데 진심이 느껴져 만나보자고 했죠. 그런데 도리어 제가 그의 바르고 성실한 모범생 같은 모습에 시간이 갈수록 빠져들었어요.”
그는 사귄 지 1년쯤 됐을 때 박상훈씨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한다. 촬영감독답게 평소 영상기기에 관심이 많던 박씨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독특한 프러포즈를 했다고.
“남편은 연애할 때도 MP3·PMP·노트북 등 최신형이 나올 때마다 중고를 팔아 새것을 살 정도로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프러포즈도 그런 기기를 이용해서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하루는 정말 MP3를 건네며 들어보라고 하더라고요. ‘이소라의 프러포즈’ 배경음악에 저에 대한 마음을 담았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나와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죠.”
2006년 마지막 달에 결혼한 그는 이듬해 허니문 베이비를 출산했다. 그와 남편을 반반씩 닮은 아들 세영군(1)은 집안의 복덩어리라고. 바쁜 일정으로 집에 거의 없는 그를 대신해 친정어머니가 손자를 돌보는데 아이 덕분에 웃을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할머니와 늘 함께 있다 보니 엄마가 집에 와도 본체만체할 정도예요(웃음). 하루는 친정엄마 팔을 베고 누웠는데 세영이가 다가오더니 제 얼굴을 밀치고 누우려 하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어 아이를 껴안고 ‘엄마도 사랑해?’라고 물었더니 마지못해 끄덕이는 걸 보고 한참을 웃었어요.”
얼마 전까지 영화 ‘핸드폰’ 촬영에 참여했던 그의 남편은 한동안 아들을 보지 못하자 그에게 부탁해 촬영장에 데려올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아이를 데려갔더니 아이를 안고 촬영장을 돌아다니며 ‘우리 아들’이라며 자랑을 하는 통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그는 “남편이 팔불출 기질이 있는 걸 그때 알았다”며 웃음 지었다.
그는 최근 들어 부쩍 남편과 아이, 부모에 대한 소중함을 느낀다고 한다. 특히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을 연습하며 친정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쩍 늘었다고. 그는 연극에서 명문대를 나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다 암에 걸린 딸 미영을 연기한다.
“친정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느끼며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면서 요즘 많은 걸 깨달아요. 결혼 후 저도 엄마가 되고 보니 친정엄마가 나를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또 저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건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소 엄마와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데 연극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엄마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애정을 표현하게 됐죠(웃음).”
그는 결혼 후 가족의 사랑을 원동력으로 더 열심히 일하게 됐다고 한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그는 이제 어두운 역할보다는 밝은 역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껏 울어야 하는 연기를 주로 해왔는데 실제 생활이 그렇지 않아 연기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어요. 그래서 코믹한 역에도 도전을 하고 싶기는 한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보시는 분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킬까봐 걱정이에요(웃음). 급하지 않게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려고요.”
그는 아직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며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는 ‘전미선만의 향기가 나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은은하게 배어나는 커피 향처럼 많은 이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는 배우가 되길 꿈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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