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용기 아니고는 못할 일이다. 17년 전 한창 젊고 예쁘던 시절 연기해 최고의 인기를 누린 배역을 이제 와 다시 맡는 건. 그런데 최화정(48)은 해냈고, 멋진 성공을 거뒀다. 연극 ‘리타 길들이기’ 얘기다.
최화정은 지난 봄 이 작품 주인공 ‘리타’ 역을 맡아 객석점유율 99%를 기록할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12월부터 시작한 앙코르 공연의 반응도 연일 뜨겁다. 극중 리타는 발랄하고 거침없는 20대 중반 미용사. 91년 국내 초연 당시 최화정이 연기한 배역이다.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 ‘발랄하고 통통 튀는’ 역할을 다시 맡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최화정은 “이번엔 진짜 안 하려고 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봄 공연 이후 많은 일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겪었고요. 앙코르 얘기를 듣고는 딱 잘라 못 하겠다고 했죠. 공연하면 너무 힘든 걸 아니까 그걸 다시 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괜히 앙코르를 했다가 실패하면 호평받으며 마무리한 본 공연의 성공마저 퇴색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런 마음도 컸다. 최화정은 제안을 거절한 뒤 바로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한다. 연극 초반 리타가 긴 머리로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 모양을 바꾸면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절친한 후배인 개그우먼 이영자가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제 얘기를 듣더니 영자가 ‘언니, 다음에도 리타 할 수 있을 거 같아? 평생 리타만 하면서 살 것도 아니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잖아. 힘들면 무대에서 쓰러지면 되지 왜 안 한다는 거야?’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났어요. ‘그래, 마지막이구나. 내 인생의 마지막 리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바뀌었죠(웃음).”
“내 인생 마지막 리타 연기하며 무대 위에서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
‘리타 길들이기’는 초연 당시 최화정에게 동아연극대상 여자연기상을 안겨준 작품. 최화정은 여주인공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는 이 연극을 통해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이번 앙코르 공연은 당시 연출가 박계배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이 다시 연출을 맡고, 윤주상이 상대 배역을 다시 맡음으로써 91년 공연의 앙코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최화정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세 사람이 모두 모여 또 한 번 같은 작품을 한다는 게 축제처럼 느껴진다. 다시 만난 두 분 선생님께도 ‘우리 이 공연을 축제처럼 즐기자. 마음껏 즐겨야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며 활짝 웃었다.
‘내 인생 마지막 리타’ ‘축제 같은 공연’ ‘마음껏 즐길 것’이라고 얘기하는 목소리 마디마디에서 소녀스런 감성과 설렘이 듬뿍 묻어났다.
그가 연기하는 리타도 꿈 많은 소녀 같은 인물. 동네 미장원에서 미용사로 일하지만, 늘 따분한 수다만 떠는 손님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낀다. 인생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선택한 길은 드레스 살 돈을 아껴 개방대학에 등록하는 것. 리타는 그곳에서 문학과 예술을 강의하는 프랭크 교수를 만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촌스럽고 무식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순수하고 소박하던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교양미 넘치는, 아는 척·잘난 척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도도한 여성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리타의 변신과정은 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본래 자기 모습을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극 초반 화려하고 노출 많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최화정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의상을 갈아입으면서 점점 검은 구두, 파스텔 톤 코트 차림의 단정한 아가씨가 돼간다.
“등장인물이 리타, 프랭크 딱 두 명뿐인데다 대사도 많아서 무척 힘든 작품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초연 때는 제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 같아요. 어린 마음에 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요. 프랭크와의 관계,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몰랐죠.”
최화정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리타를 연기하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고 고백했다. 지금 그에게는 리타 대신 프랭크가, 두 사람의 관계가, 극 전체의 흐름이 훨씬 큰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최화정은 “시간이 그냥 가는 건 아니더라”며 살짝 웃었다.
“예전에는 미모만 갖고 한 것 같아요. 이제는 연기력으로 승부해야죠(웃음).”
장난스레 말하는 모습에서 “정말 잘하고 싶다”는 다짐과 옅은 긴장이 읽혔다. 최화정은 이번 작품에 연극배우 이승비(33)와 더블 캐스팅됐다. 이승비는 지난 봄 공연 때도 최화정과 더불어 리타를 맡았던 인물. 최화정은 그의 연기를 보며 자신과는 다른 좀 더 젊고 열정적인 리타를 발견했다고 한다.
“리타 역을 연기하는 배우는 이 작품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1막 때는 순수하면서도 거칠 것 없는 리타를, 2막에서는 ‘나 좀 배웠네’ ‘내가 좀 잘났네’ 하는 시건방진 리타를 연기해야죠. 그런데 1막이 자꾸 힘든 거예요.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그 가벼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되고, 내 안에서 그런 열정이 사라진 건가 싶고…. 그러다 승비가 연기하는 걸 보면서 한 마리 나비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모습을 저도 갖고 싶었죠.”
평소 믿고 의지하는 선배 윤여정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가 “솔직히 네가 나비처럼 날기엔 좀 통통하지 않니?”라는 ‘타박’만 들었다. 봄 공연 때보다 살이 조금 더 쪄서 당시 입던 의상이 타이트한 게 아닌게아니라 골칫거리였던 그는 그래서 지금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무대에서 쓰러질 각오로 혹독한 ‘덴마크 다이어트’를 하고, 체력을 보강하려고 운동도 한다.
“원래 카페라테를 좋아하는데 칼로리 조절하느라 그걸 못 마셔요. 오늘도 이렇게 블랙커피를 놓고 앉아 있잖아요(웃음). 작품을 하기로 한 이상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정말 잘하고 싶어요.”
최화정은 “요즘 스트레스가 많은지 가끔은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다. 그래도 이만큼 열정적으로 빠져들 수 있는 일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관객들이 “17년 전 리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며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에게 힘을 더해주는 일. 소극장 연극의 특성상 객석이 무대 바로 앞까지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 후기에는 20대 리타에 몰입하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최화정의 ‘최강 동안’과 열정적인 연기를 칭찬하는 글이 많다.
“긍정적인 DNA와 일에 대한 열정이 젊음 유지 비결”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젊고 활력 있게 살아가는 비결은 뭘까. 최화정은 “내가 좀 밝고,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긍정적인 DNA가 있는 것, 그게 젊음을 유지하는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은 제가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을 보고도 ‘가식적’이라고 해요. 평소에는 더 활발하고 철이 없다는 거죠(웃음). 저는 나이가 들어도 고약하고 까다로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늘 편안하고 밝은 사람, 솔직한 사람이고 싶죠.”
그는 “한때는 다른 배우들이 카메라 불 켜져 있을 때만 웃고, 평소에는 쿨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한다. 인터뷰 때도 남들은 ‘네’ ‘아니요’만 해 아무 뒤탈이 없는데 자신은 이 얘기 저 얘기 다 하다가 꼭 상처를 받는 것 같아 불만스러웠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모습이 바로 나”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여전히 솔직한 그는, 비루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랭크의 교양과 지식을 열망하는 리타처럼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고 장난스럽게 “사랑”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KBS ‘낭독의 발견’에 출연했을 때는 “가끔 왜 결혼하지 않냐고 혼내는 분들이 있는데 난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사랑을 안 해서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 사랑을 해서 아픈 게 낫다. 아프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언제나 마음 속깊이 사랑을 꿈꾸는 것도 그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닐까.
이번 공연을 마지막으로 ‘리타’와 작별하는 최화정의 다음 목표는 방송인으로 계속 활동하는 것.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많은 배우가 출연하는 좀 더 활기찬 연극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변함없이 최화정답다’는 말을 듣는 것이 정말 멋있는 일인 것 같아요. ‘최화정다운’ 삶을 사는 것, 그게 제 꿈이고 바람입니다.”
최화정은 연극 ‘리타 길들이기’에서 천방지축 주인공 리타 역을 맡아 변함없는 젊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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