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 13개로 사상 최고 성적을 올린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선수단이 귀국하던 날,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남녀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박경모(33·인천 계양구청)와 박성현(25·전북도청) 선수가 오는 12월 결혼할 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
같은 종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부부 탄생은 이번이 처음. 네티즌은 ‘2세도 텐(10점)만 쏘는 신궁이 태어날 것 같다’ ‘대한민국 양궁 발전을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아달라’는 등의 재치 넘치는 댓글을 올렸다.
결혼 발표와 함께 ‘대한민국 공인 커플’이 된 두 사람을 지난 9월 초 서울 강남의 한 미용실에서 만났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아서인지 박경모는 경기장에 섰을 때보다 따뜻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밝은색 캐주얼 차림의 박성현은 한층 여성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앞두고 두 차례 대회가 있기 때문에 결혼준비를 할 시간이 많지 않아 오늘 하루 휴가를 내 예식장 예약부터 청첩장 찍는 것까지 다 하려고 한다”면서 “미용실에 온 것도 신부화장을 예약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박경모는 “성현이를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짝사랑해왔던 터라 한시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2001년 국가대표팀 선발전 때 태릉선수촌에서 성현이를 처음 봤는데 당시에는 후배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이후로 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렸어요. 평소 주위 분들이 어떤 스타일의 여성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농담삼아 ‘44사이즈’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성현이가 언제부턴가 제 이상형이 돼 있더라고요.”
박경모는 어느 날 갑자기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박성현을 다른 후배들보다 더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박성현이 대회를 앞두고 컨디션이 저조할 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불러내 자세를 바꿔보라는 등의 조언을 해주고 힘든 훈련과정에서 어려움이 없는지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오빠가 저를 좋아한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운동할 때는 평소와 달리 카리스마가 있어 후배들이 말도 쉽게 못 붙이는데 저한테는 자상하게 대해줘 신기하다고 생각한 정도였죠.”
“선배가 나를 짝사랑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면서 웃는 박성현을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보던 박경모는 “성현이가 내 마음을 몰라주니까 더 애가 탔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지난해 올림픽 선발전이 끝나고 더 이상 마음을 숨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백을 했어요. 그날이 11월23일이었는데 마침 금요일인데다 비까지 오는 바람에 성현이가 살고 있는 전북 군산까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도착하니 밤 9시 정도 됐더군요. 맨정신으로 고백하기 힘들 것 같아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성현이를 불러내 ‘우리 사귈래?’라고 물었죠. 성현이가 쑥스러워하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더라고요(웃음).”
박성현은 “그 당시 놀라고 당황했지만 싫지는 않았다”면서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남들 눈 피해 007작전으로 만나고 경기하는 날엔 몰래 안아주며 응원했어요”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선후배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관계가 알려지면 대표팀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칠까 걱정됐던 두 사람은 교제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주말 데이트를 할 때는 선수촌에서 선수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고 선수촌으로 돌아올 때는 박성현이 먼저 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들어왔다는 것. 박경모는 “성현이를 내려주고 혼자 선수촌으로 들어올 때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다른 연인들처럼 마음 편히 놀러다니지 못한 게 아쉬운데 딱 한번 둘이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제가 성현이에게 맛있는 아침밥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고 다음 날 먼저 일어나서 밥을 해주었죠. 김치찌개와 달걀프라이, 햄구이가 전부인 소박한 아침상이었지만 성현이가 상당히 감동하더라고요 거기서 점수를 많이 딴 것 같아요(웃음).”
박경모는 박성현이 경기를 하는 날이면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 살짝 나오라고 해서 ‘잘하라’고 말하며 안아주었다고 한다. 이에 박성현은 “오빠가 경기를 할 때면 ‘차라리 내가 쏘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장했다”며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애정을 표현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애칭도 공개했다. 박경모는 박성현이 좀 엉뚱해 ‘청개구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박성현은 “오빠를 ‘황소개구리’라고 부른다”면서 “전화기를 통해 들은 방귀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사귀면서 딱 한번 싸웠어요. 오빠가 커플링을 하자고 했는데 제가 싫다고 했거든요. 커플링을 하면 주위에서 금세 눈치를 챌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커플링을 그렇게 하고 싶으면 오빠만 해서 끼고 다니라’고 했더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서운해하더라고요.”
예비 며느리 무척 아꼈던 박경모의 아버지, “행복하게 잘 살라”는 유언 남겨
이들은 지난 1월 초 양가 부모에게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박경모는 “2005년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 하셨기 때문에 빨리 성현이를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께서 성현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셨어요. 아테네올림픽 때 경기하는 모습을 보시곤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가 진짜 성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자 손을 꼭 잡고 ‘우리 아가 정말 예쁘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박성현의 부모는 두 사람의 교제를 처음부터 환영했던 건 아니라고 한다. 박경모가 2남4녀 중 장남인데다 나이 차도 많이 나고 같은 박씨라는 점 때문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현이가 4녀 중 막내딸이거든요. 곱게 키운 막내딸을 선뜻 내주기 싫으셨던 것 같아요. 그날 이후로 저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반드시 성현이의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렸어요. 비가 오면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다니시라고 하고, 날이 더우면 전기료 아끼지 말고 에어컨 켜라고 말씀드리고…. 데이트를 할 때도 성현이네 집에 자주 찾아갔어요. 자꾸 만나면 정들잖아요.”
박경모의 그런 면이 박성현의 눈에는 듬직해 보였다고 한다. 박성현은 “부모에게 잘하는 오빠를 볼 때마다 고맙고 결혼하면 아들 역할까지 톡톡히 해줄 것 같은 믿음이 생겨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에는 양가 상견례를 했다. 박경모의 아버지 병세가 점점 악화돼 결혼식을 서두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박경모의 아버지는 베이징올림픽이 열리기 전인 지난 6월 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성현이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저희가 사귀는 걸 주변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날 인사를 못 드렸어요. 평소 찾아뵐 때마다 ‘우리 아가 왔냐’고 반겨주셨는데….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럼에도 내색할 수 없어서 더 힘들었는데 오히려 어머니와 오빠가 더 저를 걱정해주셨어요. 맘 편히 있으라고, 올림픽이 눈앞이니 연습에 전념하라고 위로를 해주셨는데 그게 더 고마웠어요.”
12월6일 결혼하는 두 사람은 벌써부터 집안에서의 역할을 분담한 상태다. 일주일에 4일 정도는 박경모가 설거지·빨래·청소 등 가사 일을 하기로 약속했고 경제권도 박성현한테 이미 다 넘겼다는 것. 박경모가 “처음부터 잡혀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자 박성현이 웃으면서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잡고 살아야지…” 하며 야무진 표정을 지었다.
“운동선수라고 해서 라이프스타일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여느 부부처럼 똑같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이해하며 살아야죠.”
자녀계획을 묻자 박경모는 “마음 같아선 여섯 명 정도 낳고 싶지만 그러면 성현이가 힘들테니까 서너 명으로 합의를 보았다”며 미소 지었다.
이들은 9월 말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월드컵 파이널 경기에 출전하고 10월에는 전국체전에 참가할 예정이다. 두 사람은 결혼식 준비하랴 시합 준비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요즘 무척 행복하다”면서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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