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걸어오는 최불암(67)을 보면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은 가벼운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처음 만나는 그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한결같은 모습으로 시청자들 곁을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젊어서부터 나이 많은 역할을 맡아서 그런 것 같아요. 스물여섯에 데뷔하면서 마흔 살인 김종서 장군을 연기했고, 이후 드라마 ‘수사반장’ ‘전원일기’ 등에 출연할 때도 실제 나이보다 곱절 많은 배역을 맡았죠.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요즘 제 모습을 보고는 ‘젊어진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웃음).”
대학에서 연출을 전공한 최불암은 67년 KBS 드라마 ‘수양대군’으로 데뷔해 ‘수사반장’의 박 반장, ‘전원일기’의 김 회장 등을 맡아 서민적인 캐릭터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그런 그가 지난 6월 방영을 시작한 SBS 드라마 ‘식객’에서 색다른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한국의 맛’을 지키는 운암정의 대령숙수 오성근 역을 맡아 머리를 길러 뒤로 가지런히 묶는가 하면 여자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는 등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
“평생 가족 위해 살아온 아내가 만든 음식이 가장 맛있어요”
“대령숙수는 궁중음식의 비법을 후대에 전수하는 최고의 요리사예요. 그래서 일부러 머리카락을 길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을 간직하되 그 머리를 하나로 묶어서 정갈한 느낌이 나도록 했죠. 또 수십 년간 주방에서 음식을 만든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여성적인 면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목소리를 가느다랗게 내고 있어요.”
그가 음식을 맛볼 때 짓는 오묘한 표정은 시청자로 하여금 실제 음식을 먹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할 정도로 섬세하다. 이 역시 연구 끝에 만들어낸 표정이라고 한다.
“TV로는 음식의 냄새까지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표정으로 느낌을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그가 연주할 때 눈을 감고 모든 신경과 감각을 바이올린에만 집중시키는 것처럼 저 역시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만 집중했더니 그런 표정과 앓는 듯한 소리가 나오더군요(웃음).”
음식을 소재로 한 드라마인 만큼 입이 즐거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촬영시간이 빠듯해 느긋하게 음식을 즐길 여유가 없다는 것. 그는 “그럴듯한 음식 소품을 보고 표정 연기를 하는 것”이라며 빙그레 웃었다.
이번 역할 때문에 평소 안 해본 꽁지머리 분장을 40분씩 해야 해 힘들지 않냐고 묻자 그는 소탈하게 ‘허허’ 웃으며 말했다.
“분장을 하는 시간이 지루하긴 해도 변신한 제 모습은 재밌어요. 전에 한번 분장을 하고 시간이 남아서 집에 다녀왔는데 아내가 제 모습을 보고는 크게 웃더니 ‘캐릭터와 아주 잘 어울린다’며 ‘느낌이 좋다’고 말하더라고요. 분장하는 시간에 비해 등장하는 장면이 적어 아쉽지만 가발을 붙였다 뗄 때 뒷목이 시원해서 좋아요(웃음).”
41년 동안 배우로 살아온 최불암은 배우란 ‘사람을 규명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배역이든 연구하고 분석하는 마음가짐으로 또 다른 그를 만들어낸다.
“배우는 언제나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해 논문을 쓰는 학자처럼 진지하게 연구해야 해요. 노트에 그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이 문제인지 등을 적어 분석하는 거죠. 제 몸속에 다른 사람의 영혼부터 작은 습관까지 다 들어와야 하는데 그만큼의 노력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이번 드라마에서 ‘이 사람은 운동을 많이 해서 이렇게 칼질을 해야 한다’ ‘이것만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이기 때문에 건드려서는 안 된다’ 등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으로 오숙수 역할을 준비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보여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연기할 때는 늘 자신을 깨끗이 지워야 하죠. 연기에는 자기화와 형상화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자기화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인물의 심리적 변화만 갖고 오지만 형상화는 제 겉모습과 심리 상태까지 모조리 배역에 맞추는 거죠. 전 배역에 배우가 들어가는 ‘형상화’된 연기를 할 때 비로소 다양한 인물을 표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그가 연기에 애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만큼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죠. 그래서 TV에서 사람 간의 정이 담겨 있는 휴머니즘이나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좋은 드라마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식객’은 다양한 음식을 매개로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보여줘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작품이 될 거예요.”
‘맛의 장인’을 연기하는 최불암에게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스타일”이라고 답했다.
“우리나라 음식처럼 지혜가 돋보이는 음식은 세계 어딜 가도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순대국만 봐도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감탄할 때가 많거든요. 거기다 오이 하나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아요? 양념과 숙성 기간에 따라 맛도 달라지고 말이죠. 물론 파·마늘·깨 등 항상 들어가는 양념 때문에 식재료의 고유한 맛이 잘 살아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울 때도 있어요.”
사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아내와 함께 바삭바삭한 김에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 한 숟가락을 얹고 그 위에 무짠지를 올려 먹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식사를 했는데도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입맛이 돈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 ‘정동마님’에 출연한 아내 김민자(65)를 보고 첫눈에 반해 4년 연애 끝에 70년 결혼했다.
“아내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가정을 지키겠다고 연기활동을 중단했거든요. 요즘도 좋은 작품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데 그 사람은 안 하겠다고 해요. 자신까지 나오면 집은 누가 지키냐고 하면서 말이죠. 항상 가족을 위해 살아온 아내가 만드는 음식은 어떤 것이든 다 맛있어요(웃음).”
부부는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닮는다고 한다. 최불암은 20여 년 동안 어린이재단 후원회장을 맡아 국내외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있으며, 시민단체 웰컴투코리아시민협의회 회장으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아내 또한 청각장애우를 돕는 모임 ‘사랑의 달팽이’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아내가 그 일을 시작하며 조언을 구하기에 ‘해보면 정말 좋아’ 하고 강력히 추천했죠. 그렇게 시작해 벌써 4년째 활동하고 있는데 청각장애우들에게 줄 보청기를 사거나 청력 수술을 해주기 위해 모금행사를 하는 아내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부부는 사랑, 이해, 배려와 함께 용서라는 단어로 포괄하는 관계라고 말하는 최불암. 그는 특히 아내와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살면서 감동할 때가 많다고 한다.
“어떻게 만날 예쁘고 좋기만 하겠어요. 살다 보면 싸울 때도 있고 미울 때도 있죠. 하지만 서로 용서하기도 하고 용서받기도 하면서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는 결혼 초 아내의 암 오진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던 때를 떠올리면서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항상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며 “세상에 아내만 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아내를 보고 말수가 적을 것 같다고 하지만 저와 있을 때는 늘 수다쟁이예요. 책 읽고 이야기하고, TV 보고 또 이야기하고 항상 제게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아요. 전 그걸 듣는 것만 해도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즐겁죠(웃음).”
최불암은 40여 년 전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항상 아내에게 꽃을 선물한다고 한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주인공의 모습에 반해서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꽃을 사다준 것이 그 시작이 됐다고. 그는 “다른 사람들은 여자친구나 아내가 꽃을 들 수 있을 정도로 사다주는데 난 언제나 안지도 못할 정도로 한 아름을 사다준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꽃을 참 좋아해요. 그래서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시장에 나가 아내가 좋아하는 꽃을 종류별로 많이 사가요. 집안 곳곳에 꽂아두거나 말려둔 꽃들이 내뿜는 향기는 마치 아내의 향기처럼 향긋하죠.”
지난해 태어난 손녀딸 보면서 이제 ‘진짜 할아버지’ 역할 하고 싶다는 생각 들어
아내 이야기를 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던 최불암은 지난해 태어난 첫 손녀에 대해 묻자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세상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예쁘다”며 손녀 자랑을 한참 늘어놓았다.
“예전에 친구들이 지갑에 손자·손녀 사진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자랑하는 걸 보면 저는 그냥 시큰둥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게 손녀가 생기니까 저도 모르게 자꾸만 지갑에 손이 가는 거예요. 친구들처럼 똑같이 사람들한테 자랑하기도 하고요(웃음). 이런 제 모습을 본 친구가 ‘이렇게 사랑해도 손녀는 너의 사랑을 몰라줄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우리 손녀가 제일 예뻐요.”
그는 탤런트 서승현과 사돈 사이. 때문에 그는 손녀가 친가와 외가의 피를 물려받아 훌륭한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짐짓 예상해보기도 한다고.
“‘식객’에서도 3대째 대령숙수의 피를 이어받은 성찬이 천재 요리사가 되잖아요. 비록 제 아들과 딸이 연기자의 길을 걷진 않았지만 아들의 경우 예술 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 손녀도 비슷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거죠(웃음).”
진짜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젊은 시절 노인 연기를 할 때는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솟구쳐 노인 역할에 욕심이 난다는 최불암.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 속에서 앞으로 더욱 열연하는 그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길 기대한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