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은 외교통상부 기후변화환경과 과장(41)은 지난 92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15년간 대통령 의전실·유엔 대표부·루마니아 한국대사관·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준비위원회 등을 거쳤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 외교관을 꿈꾸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중학교 때 백과사전 속 각 나라 명소를 공부하며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국제부 기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각종 세계문제를 자연스럽게 접했고, 영문학을 좋아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어에 흥미를 가지게 됐어요.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놀면서 공부한 것들이 외무고시를 준비할 때 많은 도움이 됐죠. 그래서 지금 일곱 살인 아들에게도 백과사전을 가지고 놀게 하고 있어요.”
쉽게 꿈을 이룬 듯하지만 사실 그는 대학 때 잠시 방황의 시기를 겪었다고 한다. 86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외무고시 설명회에 갔는데 그곳에서 합격자들의 수기를 듣고는 기가 꺾여 좌절했다는 것. 그는 “‘외교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도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다잡아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갈팡질팡하던 그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사람은 목표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충고했고, 그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가능성이 보여야만 시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시도를 하는 순간부터 길이 열리는 것 같아요. 외무고시를 준비해야겠다고 목표를 정하자 ‘어떻게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겠다’라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시험에서 떨어져 백수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어요.”
한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는 연수를 받던 중 한 선배로부터 “언제까지 외교관 생활을 할 거냐”라는 질문을 받고는 망설임 없이 “정년퇴직할 때까지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감 넘쳤던 그도 일을 하면서 적지 않은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외교관이 돼 처음으로 참석한 국제회의가 93년 뉴욕에서 열린 유니세프 집행이사회였는데 그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유엔의 공식 언어는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아랍어·중국어·러시아어인데 강대국, 약소국 할 것 없이 외교관들은 모두 통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언어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대화를 나누더라고요. 저는 영어·프랑스어·일어를 할 줄 알았는데, 상대에 따라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보면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가능하면 공식 언어는 모두 익히려 노력했죠.”
96년 여성 외교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는 대통령 의전실에 배치받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중남미 5개국 순방을 수행했다. 그는 그때 2백명이 넘는 순방단의 여권 대리 수속을 책임졌던 터라 무척 힘들었지만 의전실에서 일하며 앨 고어 미국 부통령,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 등 세계적인 인사와 손발을 맞춰 일하는 외교관들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나라를 위한다는 사명감 갖고 일해왔다는 김효은 과장.
첫아이 유산,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등 힘든 일 많았지만 사명감으로 버텨
얻은 게 많은 외교관 생활이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외교통상부 근무중 미국 워싱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공부를 마치고 복귀한 첫날 로비에서 같은 학과 선배인 우동식씨(42·농림수산식품부 소비안전팀장)를 우연히 만나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5개월 만인 96년 결혼, 곧 임신을 했다. 하지만 당시 업무가 많았던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멕시코 출장을 떠났다고 한다.
“그곳에서 무리를 해서인지 귀국하자마자 유산을 했어요. 남편이 ‘당신은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컸던 때였죠. 한동안 마음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아이를 잃고 난 후 자책하던 그는 이후 다시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지만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 5년 동안 아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거의 포기하고 있던 2001년 9월, 유엔 대표부 근무를 마치고 미국에서 다음 부임지인 루마니아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그는 뜻하지 않게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을 겪었다.
“9·11 테러가 일어났고 뉴스에서는 ‘다음 표적은 유엔본부가 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어요. 유엔본부 바로 건너편에 한국대표부가 위치하고 있어서 모두 두려워했죠. 그날 이후 유엔의 모든 업무가 정지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혼란스러웠지만 9월 말까지 여유시간이 생겨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었고 그때 아들 주은이가 생겼죠.”
남편은 당시 미국 유학 중이었다. 결혼 후 5년 만에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낸 그는 루마니아에 도착한 뒤 임신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9·11테러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부에게 선물을 안겨줬던 것이다.
김 과장은 외교통상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외교관이 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는 “외교관 생활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고.
“외교관은 겉으로는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보수가 높은 것도 아니고 권력과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닌 힘든 직업이에요. 제 경우 아프리카에서 다섯 살 난 아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2주 동안 40℃가 넘는 고열에 시달릴 때도 근처에 변변한 병원 하나 없어 발만 동동구른 적도 있어요. 사명감 없이 해내기 힘든 일이죠.”
뉴욕에서 근무할 때 강원도 삼척에 사는 한 여고생에게서 ‘외교관이 되는 법을 알려달라’는 편지를 받고 안내서의 필요성을 느낀 김 과장은 최근 ‘외교관은 국가대표 멀티플레이어’를 펴냈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대학 때 설명회를 듣고 좌절했던 스무 살의 김효은에게 쓰는 편지와도 같다”고 평하며 “누군가 부족한 에세이를 읽고 조금이라도 도움받아 후배로 들어온다면 뿌듯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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