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이 화사하게 들어오는 거실, 소파 탁자 위 여러 장의 아기사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뽀얀 피부에 크고 동그란 눈, 빨간 입술을 가진 아기들은 한눈에 봐도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지난 4월 중순, 결혼 6년 만에 첫아들을 낳은 이혜은(35)은 임신기간 동안 탁자 위에 놓아둔 사진들을 보면서 ‘이렇게 예쁜 아기 낳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지난 5월 중순 서울 신사동 집에서 만난 그는 아이 낳은 지 3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쌩쌩한 모습이었다. “벌써 움직여도 괜찮냐”는 질문에 “어른들이 삼칠일만 지나면 괜찮다고 하던데 진짜 그렇더라”며 환하게 웃는다.
세상에 나온 지 한달도 채 안 된 현서는 갓난아이인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카락이 까맣고 탐스럽다. 그는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의 발에 뽀뽀를 하며 “우리 현서는 손도 발도 커요” 하며 자랑을 했다. 그는 처음에는 아이가 자신은 전혀 닮지 않고 남편만 닮은 것 같아 서운한 마음도 다소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산도가 좁아 위험한 상황 있었지만 남편의 도움으로 자연분만했어요”
그는 출산예정일보다 열흘 정도 빨리 아이와 만났다. 산도(아이가 나오는 길)가 좁아 아기가 더 크면 자연분만이 힘들 수 있다는 의사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이틀 동안 입원해 있다가 오랜 산고 끝에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남편과 뭔가 진지하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하루빨리 낳는 게 좋다고 해서 그다음 날 바로 병원에 입원했어요. 유도분만 주사를 맞았는데도 통증이 빨리 시작되지 않아 답답했죠. 그러다 아기 낳는 연습을 하면서 진통이 오기 시작했어요. 간호사가 와서 보더니 ‘잘하면 오늘 아기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이러다가 그만두면 제왕절개해야 하니까 열심히 호흡하세요’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몇 시간 동안 남편을 붙잡고 죽기살기로 열심히 힘을 줬죠.”
그는 분만실에 들어가서도 한 시간 넘게 진통을 했다고 한다. 그의 친정어머니도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까지 보였다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남편은 친정어머니를 분만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를 안심시키며 호흡을 도왔다고 한다. 남편은 분만실에 들어오기 전에도 병실에서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고 사진을 찍어주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고. 그런 남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아이는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에 나왔다.
“아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잠시 천국을 다녀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으앙~’ 하고 울음소리를 터뜨리는데 정말 내가 생명을 잉태한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 황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마침 이날은 그의 남동생이 태어난 날이라고 한다. 외삼촌과 조카가 생일이 같아 식구들은 두 배로 축하해줬다고. 하지만 기쁨도 잠시, 태어나자마자 황달 증세를 보인 현서가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그는 출산 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온전히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는데, 인큐베이터 안에서 3일 동안 여린 몸으로 눈도 뜨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아기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아기를 낳을 때 엄마가 느끼는 고통보다 아이가 느끼는 고통이 열배는 더 크다고 하는데, 낳고서도 아프게 해 너무 미안했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결혼 초 아이를 낳지 않고 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 남편은 결혼 초부터 그에게 아이 키우느라 고생하지 말고 아이 없이 편하게 인생을 즐기며 평생 신혼처럼 살자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 남편에게 아이를 낳자고 먼저 할 수 없었던 그는 오히려 남편에게 설득 아닌 설득을 당하며 몇 년 동안 임신을 계획하지 않았다고. 그랬던 두 사람이 아이를 갖기로 생각을 바꾼 건 조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남동생이 결혼해 아이를 낳았는데 정말 예쁘더라고요. 갓 태어나 꼬물대는 모습부터 조금씩 자라 걷고, 말도 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도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젠가 한번은 조카 녀석이 뭐가 못마땅한지 계속 칭얼대며 울었는데, 올케가 아이를 안고 귀에다 뭐라고 귓속말을 해주니까 글쎄 아이가 엄마 품에 쏙 안기면서 울음을 그치더라고요.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엄마와 자식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깊은 교감이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거든요.”
“지나친 다이어트와 운동이 임신에 방해 됐어요”
남편 역시 조카를 보면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고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확고한 의지와 달리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신체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문제가 없었는데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그의 지나친 운동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평소 통통한 몸매 때문에 다이어트 강박증이 있던 그는 한때 중독 증상을 보일 정도로 운동에 빠져지냈다고 한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한강을 달리고, 한 해에 마라톤 풀코스를 9번이나 완주했다고. 덕분에 몸무게는 많이 감소했지만 어느 순간 건강에 이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과도한 운동과 스트레스로 간수치가 정상인의 몇 배를 초과했던 것. 결국 자신의 운동법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1년 동안 운동을 줄이는 대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몸 상태를 정비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마음을 편하게 가진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아이가 왜 안 생기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체질적으로 몸이 차고 자궁이 건조하다고 해서 한약도 먹었고요. 사실 남편과 인공수정 등 의학의 힘을 빌려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도 했는데, 그때 마침 아기가 생겼어요.”
이혜은은 천 기저귀 가제수건 인형 등 신생아용품 중 몇 가지를 유기농 제품으로 쓰고 있다.
당시 SBS 아침드라마 ‘미워도 좋아’에 출연 중이던 그는 드라마 시작하고 한 달 만에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드라마 제작진에게 상황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다행히 체력적으로 크게 힘들지 않았던 그는 끝까지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했고, 담당 작가도 극중에서도 그가 임신한 것으로 설정을 바꿔 나중에는 아이를 낳는 장면으로 마무리했다고 한다.
“입덧 없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열 달을 보냈어요. 아기를 갖기 전까지는 운동이 독이었지만, 아이를 가진 뒤로는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 덕을 톡톡히 본 것 같아요. 아이 낳기 전 주에도 벚꽃길을 산책하며 자유롭게 움직였죠. 남편은 제가 남들처럼 새벽에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며 조르지도 않고 힘들어하지도 않으니까 ‘남편 노릇 좀 하게 해달라’고 거꾸로 부탁을 하더라고요(웃음).”
태몽은 그가 황금구렁이 꿈을 두 번 연달아 꿨다고 한다. 팔뚝만 한 구렁이 한 마리가 작은 구렁이 두 마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가 자루를 들고 구렁이를 잡겠다며 뛰어다니는 꿈을 꾼 것. 그러고 나서 이틀 뒤 앞서 꿈에서 나왔던 그 구렁이가 사람 키의 두 배 정도로 자라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그의 몸을 휘감고 올라갔다고 한다. 그는 “어른들 말씀이 구렁이 숫자가 자식 숫자를 결정한다고 하더라. 태몽처럼 아이를 셋은 낳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남편과 아들, 두 남자에게 애정 똑같이 나눠줄 거예요”
그는 오랜 시간 아이를 기다려온 만큼 아이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아직 엄마 아빠 얼굴을 볼 줄도 모르고 고작 하는 것이라고는 배고프다고 우는 것과 자는 것뿐인데도, 마음은 언제나 행복으로 꽉 차 있다고. 아이를 낳은 뒤 희생이란 단어가 새삼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모성애에 따른 변화 중 하나인 것 같다고 한다.
“현서가 요즘 밤낮이 바뀌었어요. 낮에는 천사처럼 잘 자고 밤에는 악동처럼 깨서 울죠(웃음). 그래도 힘든 줄 모르겠어요. 아기 보느라 세수도 못하고 잠도 잘 못 자지만 아기가 제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요. 어제는 현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왜 울어 현서야. 총알이 날아와도 엄마가 다 막아줄 텐데 뭐가 무서워서 울어’ 하고 혼잣말을 했어요. 그 얘기를 하고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엄마가 된다는 게 그런 건가봐요.”
신생아용품은 유기농 제품으로 마련했다. 천 기저귀와 가제수건, 아기 인형 등이 그것이다. 천 기저귀는 자주 갈아줘야 하기 때문에 주로 낮 시간에 사용하고, 아기를 돌보기 힘든 밤에는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한다. 모유 수유는 젖이 부족해 처음 계획대로 100% 수유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분유와 모유를 섞여 먹이는 데 다행히 아이가 젖병으로도 우유를 잘 먹는다고.
“아기가 배고파하는 것만큼 안쓰러운 게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젖이 하나도 안 돌아서 아예 물리지를 못했어요. 그러다 우족탕을 먹고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죠. 지금은 분유 먹이고 간간이 물릴 수 있을 정도만큼은 나와요. 사실 처음에는 제 뜻대로 젖이 안 나와서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어요. 주위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고 산후 우울증을 앓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고요. 다행히 포기할 건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으니까 금세 괜찮아지더라고요.”
아이가 태어난 뒤로 남편의 퇴근시간도 부쩍 빨라졌다. 현재 영화사 마케팅 부서에 근무하는 남편은 업무 특성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집에 들어오면 아이 덕분에 힘이 솟는다며 즐거워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울면 “내 마누라 괴롭히지 마라” 하며 아이한테 농담으로 엄포를 놓는다고.
“모든 관심이 아이한테만 쏠리지 않도록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처음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은 것도 저희 둘만의 긴밀함을 누군가에게 방해받기 싫어서였거든요. 남편은 처음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아이보다 제가 더 걱정이 되더래요. 물론 모성애 못지않게 부성애도 점점 커지겠지만 두 남자에게 애정을 똑같이 나눠주고 싶어요(웃음).”
대학 선후배 사이로 시작해 부부가 된 두 사람은 둘 다 애정표현에는 약하지만 친구처럼 편안한 사이라고 한다. 정 반대의 성격도 두 사람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그는 “예전에는 남편의 진중한 성격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남편 덕분에 내 성격도 많이 차분해졌다”고 말한다. 상대에게 화가 나면 잠깐 참았다가 화를 삭인 뒤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그가 남편에게 배운 ‘싸움의 기술’이다.
그는 남편과 아이를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키우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이름을 현서라 지은 것도 중성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아이가 뭔가에 억눌려 있고 지나치게 남을 배려하는 ‘맏아들’의 기질만큼은 갖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96년 영화 ‘코르셋’으로 데뷔해 올해로 12년째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아이 낳고도 꾸준히 일을 할 계획이다. ‘아이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더욱 다양한 역할에 도전할 계획이라는 그는 아이에게 떳떳하고 존경받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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