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미(44)에게 뮤지컬 무대는‘친정’혹은‘고향’이다. 그는 6월부터 막이 오를 뮤지컬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 여조카를 헌신적으로 키우며 살다가 늦은 나이에 사랑을 이루는 노처녀를 연기한다.
“방송활동을 하면서 잠시 무대를 떠났지만 마음속으로 늘 그리워했어요. 누가 뭐래도 저는 뮤지컬 배우예요. 무대 위에서 스스로의 연기에 도취하고 관객들에게 에너지를 내뿜을 때 비로소 진짜 ‘박해미’가 되죠.”
그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무대에 오른 베테랑 배우지만 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오랜만에 무대에 돌아온 만큼 예전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 그는 연출가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하루 10시간 이상 노래와 춤을 연습해야 직성이 풀리는 열성파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대본 암기를 걱정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배우 박해미. 특유의 즐거운 표정과 활기찬 목소리로 분위기를 이끄는 그와 얘기하는 동안 지쳐 있던 기자도 어느덧 ‘살아났다’.
▼ First keyword ; I do
“어둠 속에서 구원해준 남편과 아이, 두 남자 없다면 지금처럼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
이런 박해미의 끝없는 에너지는 남편과 아이로부터 나온다. 여덟 살 연하의 남편 황민씨(36)와 아홉 살배기 아들 성재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한다.
“아내와 엄마 자리를 완벽하게 채우지 못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살뜰한 현모양처로 변신해요(웃음). 연습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남편 식사를 챙기죠.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집에서는 배우이기 전에 엄마고 아내니까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요.”
박해미와 남편 황민씨의 러브스토리는 한 편의 뮤지컬이다. 박해미는 지난 95년 모노드라마 ‘각시품바’에서 여성 품바가 결혼하는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관객 중 한 사람을 무대로 불러냈다. 무대에서 얼떨결에 박해미와 결혼식을 올린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 황씨. 캐나다에서 살다가 1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황씨는 이날부터 박해미에게 빠져들었고, 무작정 짐을 싸들고 박해미의 집에 쳐들어올 정도로 집요하게 쫓아다녔다고 한다.
“물론 저도 남편이 강한 빛을 내뿜는 헤드라이트처럼 느껴졌지만 그저 열성팬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이혼한 경험이 있고 나이도 많아 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도 남편은 자꾸 저를 여자로 대했고,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던 저도 조금씩 느슨해졌어요.”
황씨는 부모와 의절하면서까지 박해미를 포기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이후 5년간 동거를 하다 지난 2000년 혼인신고를 했다. 시부모는 두 사람 사이에 아들 성재가 태어나자 마음을 열었다고. 그리고 지난해 두 사람은 성재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기 위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뒤늦게 “I do(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를 맹세했다.
“가까운 친지와 지인들을 모시고 이벤트처럼 올린 결혼식이지만 성스럽고 경건했어요. 돈이 없어 여관방을 전전하면서도 서로를 배려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둘에서 셋이 된 과정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죠. 결혼식 직전까지 정신없이 뛰놀던 성재도 식이 진행되자 의젓해지더라고요.”
“왜 엄마 아빠만 커플링이 있고 나는 없냐”며 서운해하는 성재를 위해 부부는 이날 반지 하나를 더 준비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박해미는 “이 반지가 세 사람을 이어주는 영원한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며 웃었다.
“성재에게 좋은 엄마가 돼주고 싶어요. 바쁜 저 대신 남편이 학교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하지만 엄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나봐요. 한때 방송활동으로 바빠 아이를 못 챙겼는데,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살이 찌더라고요.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활동을 쉬고 아이와 시간을 보냈더니 두 달 만에 몸무게가 4kg이 줄었고요. 만일 성재가 ‘엄마가 매일 내 곁에 있으면 좋겠어’라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둘 거예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성재는 ‘일하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다’며 저를 이해해줘요(웃음).”
사실 박해미에게는 전남편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하나 더 있다. 성재를 키우면서 마음 한구석 큰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던 그는 지난 2006년, 8년 만에 아이를 다시 만났다.
“처음 아이를 만나던 날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아이가 먼저 ‘우리 엄마 그새 예뻐졌네~’ 하면서 다가왔어요. 큰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미안함은 평생 지울 수 없겠지만, 아이를 만나면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죠. 이후 정기적으로 아이를 만나는데, 저에 대한 원망 없이 반듯하게 자랐고 공부도 무척 잘해요. 어릴 때부터 형의 존재를 알렸기에 성재는 큰아이를 잘 따르죠.”
과거 박해미에게 ‘사랑’은 상처였지만 어느 순간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2000년 제작한 뮤지컬이 ‘I do I do’. 한 부부가 결혼식을 올릴 때부터 늙어서 마지막 여행을 떠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나는 비록 이혼의 아픔을 겪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소망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어요. 20~30대 때는 사랑을 열정이라고 정의했지만 마흔이 지난 지금의 사랑은 책임이에요. 사랑이 식으면 정으로, 정이 식으면 측은함으로 사는 게 부부잖아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저희 부부는 권태기를 느낀 적이 한번도 없어요(웃음). 싸울 때도 있지만 서로 먼저 사과하고 틈틈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게 비결이에요.”
박해미는 남편 황씨를 “고통의 나락에서 구원해준 천사” “아내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 살을 빼는 로맨틱한 남자”라고 표현했다. 박해미의 소망은 “자꾸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 목숨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라는 문자를 보내는 남편과 더욱 단단한 가정을 일구는 것이라고 한다.
▼ Second keyword ; 하이킥!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열정 속에는 타협을 모르는 강한 성격과 실패의 눈물 있어요”
인터뷰 내내 그는 활기찼고 여유로웠다. 감기에 걸려 오한을 느끼면서도 환하게 웃던 그는 “이렇게 되기까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
지난해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시도 때도 없이 “오케이”를 외쳐 ‘OK해미’라는 애칭을 얻은 박해미. 그는 “극중 시아버지는 사업을 끌고 갈 능력이 없고 남편은 백수였으며 자식처럼 키운 도련님은 이혼했다. 큰아들은 공부는 잘하지만 소심하고, 둘째 아들은 허구한 날 싸움을 벌여 사실 오케이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극중 해미의 사고방식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저도 ‘오케이’를 잘 외치거든요. 고3 수험생 한 명이 전화를 걸어와 ‘OK’ 한마디만 해달라고 간청해 들어준 적도 있죠(웃음). 결혼에 실패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서른이 넘었더라고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방황하던 어느 날 엄마는 ‘네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하라’며 격려해주셨어요. 사업을 하던 엄마는 ‘호랑이여장부’라고 불릴 정도로 강했는데, 그런 엄마가 강한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엄마의 격려에 힘을 얻었고, 이후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거든요.”
거침없이 “오케이”를 외치는 태도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그는 성재를 임신했을 때 뮤지컬 ‘I do I do’를 제작했지만 흥행에 실패해 수억원의 빚을 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를 당해 법정 구속을 당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는 만삭의 몸으로 검찰청을 오갔고, 그 즈음 남편 황씨는 그를 돕다가 월급까지 차압당하는 상황을 맞았다.
“재혼하면서 웃음 가득한 날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모든 시련이 그렇게 한순간 찾아오더라고요. 몇 해 전까지 한달에 2백만 원씩 빚을 갚으며 월세로 살았지만 고단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내가 세상과 타협하고 산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번지지는 않을 텐데’ 하고 생각했을 뿐이죠.”
박해미는 “적이 많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사람들과 트러블이 잦다고.
“예전에는 화해라는 말을 모르고 살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나 역시 모순덩어리에 미완성의 존재다’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어요. 다행스럽게도 거침없지만 꾸밈없고 솔직한 제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하기 시작했고요. 하지만 타협이라는 말에는 여전히 민감해요(웃음).”
사람들은 이혼, 사업실패, 굽히지 않는 성격 등을 숨기지 않는 박해미를 좋아한다. 그래서 지난해 그는 ‘거침없이 하이킥!’이 끝나자마자 한 일간지에 고민상담 칼럼을 썼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 ‘천인야화’ ‘판도라의 상자’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프로그램 모두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당초 프로그램 기획은 게스트에게 제가 거침없이 쓴소리를 내뱉는 것이었는데, 그게 살짝 빗나가면서 틀어졌어요. 두 프로그램 모두 불륜녀, 지나친 사교육을 일삼는 엄마 등 상처와 모순을 가진 일반인이 게스트로 초대됐는데, ‘박해미라면 내 얘기를 잘 들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나온 그들에게 ‘당신의 행동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저 역시 평지풍파를 겪으며 살아서인지 ‘모순 없는 사람 없고 사연 없는 사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혹자들은 ‘박해미답지 않다’고 했지만 제가 하는 충고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속단할 수 없기에 그저 묵묵히 들어줬어요.”
그럼에도 “앞으로도 ‘당신이 내게 용기를 줬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그는 “각양각층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를 진행하는 게 꿈”이라며 싱긋 웃었다.
▼ Third keyword ; ‘도나’의 꿈
“아직 정점으로 오르지 못한 인생그래프, 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달릴 거예요”
박해미는 이처럼 꿈이 있었기에 오랜 무명생활을 견뎌냈다고 말한다. 캬바레를 운영하는 집안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교회 성가대에 나가 늦은 시간까지 캐럴을 부르고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어 살풀이를 추며 자신의 끼를 발산했다. 그는 이화여대 성악과 3학년 재학 중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여주인공을 맡아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한창 여배우로서 성장할 무렵 결혼했다. 이혼 후 다시 무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선후배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더욱이 지난 93년 뮤지컬 ‘장보고의 꿈’으로 3년간 해외공연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때 ‘나보다 잘난 사람 없고 나보다 못난 사람 없다’는 좌우명을 가슴에 새겼어요. 얼굴이 크고 나이가 많고 치아가 고르지 못한 핸디캡이 있다는 걸 알지만 자신감만큼은 잃지 않았어요. ‘실력이 부족해 인정받지 못하는 게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버텼죠.”
그러던 시기에 만난 작품이 바로 모노드라마 ‘각시품바’. 이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리고 안정된 가정까지 일군 그는 ‘돈키호테’‘넌센스 잼보리’에 잇달아 출연했고, 지난 2004년 ‘맘마미아’ 초연 때 오디션에 응시해 주인공 ‘도나’ 역을 따내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그때 나이 마흔이었다.
“젊고 예쁜 여배우들 속에서 대형 무대의 주인공이 된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맘마미아’에서 장성한 딸을 데리고 살아가는 미혼모 도나를 연기하면서 제 삶과 도나의 삶이 오버랩 됐어요. 그리고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자기 자신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메시지 속에 산전수전 다 겪은 제 삶을 마음껏 토해냈죠.”
‘맘마미아’ 공연은 성공했고 그는 ‘브로드웨이 42번가’‘메노포즈’에 출연하며 배우로 입지를 다졌다. 지난 2006년에는 드라마 ‘하늘이시여’의 악녀 ‘배득’ 역에 캐스팅되는 행운까지 안았다.
“사실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때 임성한 작가가 ‘너무 예쁘다’며 탈락시켰는데, 조연출이 임 작가에게 ‘맘마미아’ 동영상 테이프를 보여줘 다시 오디션 기회를 얻었어요. 처음 해보는 드라마 촬영이고 무명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미약한 배역이면 절대 안 한다’는 입장을 당당하게 밝혔죠(웃음). 의붓딸을 학대하는 악녀를 연기하면서 시청자에게 욕을 많이 먹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 받아 기분이 좋았어요.”
지난해 박해미는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살았다. 일주일에 4일 시트콤에 출연하면서도 저녁마다 ‘I do I do’를 무대에 올렸다. 각종 프로그램에 틈틈이 출연하는 동시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40대 신데렐라’라고 부른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같은 말은 하지 않겠어요. 한때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생각해보면 그로 인해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성재를 얻었잖아요. 돈이 없어도, 배역을 따내지 못해도, 바쁜 스케줄로 지칠 때도 행복은 늘 제 주위를 맴돈 것 같아요.”
그는 여전히 ‘배고프다’고 말한다. “인생그래프를 그려보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직 인생의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상승 곡선을 긋고 있지만 인생의 정점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부지런히 뛰어 앞으로 2~3년 안에 꼭대기에 오를 거예요(웃음).”
마지막으로 그는 “내 인생의 역할 모델은 없다. 내 유일한 경쟁자는 나 자신뿐”이라며 “스타를 꿈꾸기보다 후세에 인정받는 배우로 남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지난날의 상처를 잊고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도나’ 박해미. 그의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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