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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남자가 사는 법

이혼 후 홀로 남매 키운 사연 뒤늦게 털어놓은 배일집

기획·김유림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지호영 기자

2008. 05. 23

코미디언 배일집이 지난 18년 동안 홀로 남매를 키워온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에게 남모를 아픔을 안고 사람들을 웃겨야 했던 지난날과 두 외손자의 재롱을 보며 편안한 중년을 보내고 있는 요즘 생활을 들었다.

이혼 후 홀로 남매 키운 사연 뒤늦게 털어놓은 배일집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코미디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박장대소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웃으면 복이 와요’가 15년 넘게 방영되는 ‘전설’을 만들었던 그때 그 시절, 배일집(61)은 인기 코미디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별로 할 얘기도 없는데 무슨 인터뷰를 하나”라고 했던 그는 막상 기자와 마주하자 한창 재롱을 피우는 두 외손자 이야기, 40년 전 코미디언을 꿈꾸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의 추억 등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는 심지어 아내와 이혼 후 홀로 남매를 키운 지난 세월에 대해 얘기할 때도 듣는 사람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게 하는 천생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몰려가 서울 신당동 동아극장에서 선배 코미디언 구봉서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부전자전’을 보면서 처음으로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일주일에 한 번 HR 시간이 되면 아이들의 성화에 힘입어 가수 현인의 흉내를 내며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고. 그의 코미디언 기질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인데, 학창시절 그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인기 가수·코미디언들의 쇼를 보며 꿈을 키웠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는 아예 도시락을 안 싸갖고 다녔어요. 점심시간이 되면 이 반 저 반에서 도시락을 준비해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이 많았거든요. 그 아이들 앞에서 구봉서, 김희갑, 뚱뚱이와 홀쭉이 같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 장면을 손짓, 발짓해가며 흉내 내면 아이들이 웃다가 쓰러졌어요.”
고3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직접 대본을 쓴 코미디 연극을 전교생이 모인 앞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마음이 온통 코미디에만 쏠려 있었으니 대학진학은 기대도 못할 일이었다. 5녀2남 중 둘째 아들인 그는 결국 혼자만 대입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에 떨어지자 무작정 연예인협회에 등록하고 공연단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인맥이 전혀 없어 누구를 붙잡고 무대에 서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해병대 군예대에 가면 진짜 가수, 밴드와 함께 공연을 다닐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원했지만 그마저도 떨어졌다. 당시 해병대 군예대는 남진·진송남 같은 인기가수들이 들어가던 곳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육군1군 사령부 군예대에 지원, 합격했다. 학창시절부터 오매불망 그리던 코미디언의 길이 마침내 열린 것이다.
“제가 입대하자마자 공연할 때 사회 보던 사수가 제대를 했어요. 덕분에 졸병 때 바로 사회를 맡게 됐죠. 그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사회를 보는 게 유행이었는데, 후에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신소걸씨가 한 달 늦게 입대해 둘이 콤비로 사회를 봤어요.”
67년 그가 입대했을 때는 군예대 위문공연이 일년에 봄, 가을 두 번 열렸는데 이듬해에는 군인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공연이 일년에 네 번으로 늘어났다. 그는 45일 동안 열심히 공연한 뒤 위로 휴가를 받아 사회에 나오는 날이 많았는데, 휴가 때마다 극장으로 달려가 그가 좋아하는 코미디언의 연기를 유심히 보며 코미디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구봉서를 좋아하던 그는 군대에서 ‘작은 구봉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혼 후 홀로 남매 키운 사연 뒤늦게 털어놓은 배일집

“그렇게 36개월간의 군대 생활을 마쳤는데 마침 군예대에서 후임 사회자를 구하지 못했다며 저보고 한 달만 더 공연 사회를 봐달라고 했어요. 당시 병장 월급이 6백원이었는데 민간인 신분으로 일했더니 월급을 8만원이나 주더군요. 쌀 한가마니에 1천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8만원은 아주 큰돈이었죠. 그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어머니께 고스란히 가져다드렸어요.”
군예대에서 사회를 잘 본다고 소문이 나자 그는 월남 위문공연에까지 1년 가까이 초청돼 갔다. 당시 월남 위문공연은 톱 가수들이 출연하는 무대였기에 그에 대한 소문은 자연스럽게 방송국에까지 퍼졌다고 한다. 한번은 구봉서가 연예인협회 사무실에서 그를 보고는 “너 월남 다녀왔다며? 배일집이 누구야, 걔가 그렇게 웃기다며?” 하고 묻기까지 했다고. 마침내 그는 71년 방송국 PD의 권유로 코미디 프로그램 ‘쇼쇼쇼’에 출연하면서 순조롭게 방송에 데뷔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어린 나이에 일찍 데뷔한 경우였어요. 이기동·임희춘·이대성 같은 선배들과 함께 활동해서 그런지 지금 제 나이가 꽤 많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신 것 같은데, 아직 젊습니다(웃음).”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뒤 가장 운이 좋았던 것은 그와 혼성콤비를 이뤘던 배연정을 만난 것이다. 당시 두 사람은 TBC에서 퀴즈 프로그램 사회를 봤는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찰떡궁합을 자랑하며 많은 인기를 누린 두 사람은 “진짜 남매 아니냐”는 말을 숱하게 들으며 명콤비로 활약했다.

엄마 없이 사춘기 보낸 남매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
오랫동안 방송활동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두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가정생활에 위기를 맞았다. 방송에 매달려 바쁘게 사는 동안 아내와 점점 소원해진 것. 하지만 그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내로부터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큰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아내는 저보다 아홉 살 어린 사람이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 저를 만나 3학년 때 결혼을 했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가정에 구속됐으니 많이 답답했겠죠. 세월이 흐르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쌓였던 것 같아요.”
그는 아내가 처음 이혼하자고 했을 때 아이들 때문에라도 안 된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그렇게 싫으면 잠시 떨어져 있어보자”며 집을 나와 3개월간 여관방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싸우더라도 집에서 싸워야 하니 무조건 들어가라”고 호통을 쳐 다시 집으로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그를 피해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러자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며 대성통곡을 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였지만 한 번 돌아선 아내의 마음을 끝내 돌이킬 수 없었다고. 그는 지난 90년 딸이 중학교 2학년,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엄마와 살았던 아이들이 2년 정도 지나자 그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지만, 당장 그는 아이들 도시락 반찬이 걱정이었다. 이혼했다는 소문이 퍼질까봐 가사도우미를 부를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밥은 그가 직접 짓고 아파트 근처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주문해 먹었다고. 딸아이도 간단한 밑반찬은 곧잘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오랫동안 이혼 사실을 숨긴 건 아이들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됐다. 아버지의 유명세 때문에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 그는 “가장 예민한 나이에 엄마의 품을 잃어버린 아이들, 특히 여리고 다정한 성격의 딸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엄마 없이도 반듯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고마우면서도 ‘엄마가 있었으면 더 곱고 바르게 자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집에서는 엄마 잃은 자식들이 애처로워 눈물지으면서도 밖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어야 했다. 그는 “요즘에야 연예인들이 결혼과 이혼을 당당히 밝히지만 당시만 해도 이혼은 큰 흠이라 생각하고 쉬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배우 지망생인 아들이 ‘잡초’처럼 강하게 자라길 바라
요즘 그는 연기자 지망생인 아들, 딸 내외, 그리고 외손녀·외손자와 함께 한집에서 3대가 복닥거리며 살고 있다. 결혼하면서 분가한 딸은 지난해 미국에 있는 전처 곁에서 둘째를 낳은 뒤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첫아이 낳을 때 친정엄마 없이 혼자 낳는 게 불쌍해 이번에는 제 엄마한테 다녀오라고 했어요. 또 아이 둘 키우는 게 보통일이 아니니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했죠. 딸과 사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하더라고요(웃음).”
딸네 식구가 들어오자 한 달 생활비가 배로 늘었다고 한다. 전기료·가스료·수도료 등 공공요금 지출도 아들과 둘이 살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늘었다고. 그는 “아기들 빨래는 따로 돌려야 한다며 하루에 세탁기를 다섯 번 이상 돌려서 그렇다”며 “그래도 딸아이가 언제 저렇게 커서 제 자식을 위하나 싶어 감개무량하다”며 빙그레 웃었다.
세 살배기 외손녀는 큰딸 어렸을 때 모습과 똑 닮았다고 한다. 그 아이가 침대 위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면 30년 전 딸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어 젊어지는 느낌까지 든다고.
그의 아들은 조만간 영화를 통해 배우로 데뷔할 계획이다. 그는 학창시절 배우가 되길 원하는 아들을 위해 자신이 잘 아는 연기학원에도 보내고, 지인을 통해 개인 교습까지 시키는 등 정성을 쏟아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서울예대 영화과에 입학한 아들은 아버지의 후광 없이 오디션을 봐 이번에 배역을 따냈다고 한다.
“험난한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잡초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도 전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들이 자신의 힘으로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가며 강한 배우로 성장하면 좋겠어요.”
홀로 두 자녀를 키우며 오랜 세월을 꿋꿋이 버텨온 배일집. 그의 소탈한 웃음 속에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더욱 단단해진 부성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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