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뉴 하트’에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최강국(조재현)과 대립하는 의사 민영규를 연기한 탤런트 정호근(44). 그가 연기한 민호근은 악역이었지만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지난 3월 중순 정호근 가족이 서울 정릉동에 위치한 한 갤러리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어, ‘뉴 하트’에 나온 아저씨다!”라고 소리쳤다. 아이들의 갑작스런 함성에 쑥스러웠는지 정호근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들은 정호근의 딸 혜민(9)이의 학교 친구들. “아빠가 연예인이라 좋겠다”는 친구들의 말에 혜민이 역시 아빠와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
“‘뉴 하트’에서 민영규를 연기한 뒤로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졌어요. 고집불통에 실수투성이인 민영규에게 친근감을 느꼈는지, 드라마가 끝날 무렵에는 시청자 게시판에 ‘민 교수도 멋지게 수술 성공하면 좋겠다’는 글이 쇄도하기도 했죠. 데뷔한 지 24년이 지난 지금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지난 84년 MBC 공채탤런트 7기로 데뷔한 정호근은 그동안 ‘여명의 눈동자’‘상도’‘왕초’ 등 굵직한 작품에 출연해온 베테랑 연기자다. 그가 악역 전문배우로 낙인(?)이 찍힌 건 96년 드라마 ‘사과꽃 향기’에서 철두철미한 보도국장을 연기하면서부터라고.
“일본인 악질 형사, 못된 직장상사, 부도덕한 사채업자 등 주로 주인공과 대립하는 역을 많이 맡았지만 불만을 가진 적은 없어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기회는 온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든요. 예전에 악역을 연기할 때는 욕을 많이 먹었는데, 지금은 ‘그런 악역의 모습이 더 인간적이다’라는 응원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장윤선씨(41)는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장씨는 “악역을 자꾸 맡아 나쁜 이미지로 각인될까봐 걱정”이라면서 “실제로는 순수하고 반듯한 사람”이라고 남편 자랑을 했다.
“특히 아이들에게 만점짜리 아빠예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때문에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도 자제할 정도거든요. 하루에도 예닐곱 번씩 안부전화를 걸죠. 얼마 전 남대문시장에 온 가족이 쇼핑을 하러 갔는데, 아이들 옷을 골라 입혀주는 남편을 보고 상인들이 ‘어쩜 저렇게 다정할 수 있냐’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식당에 가도 아이들 먹이느라 남편은 얼마 먹지를 못해요.”
임신중독증으로 잃은 첫딸과 막내아들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아파
사실 그가 아이들에게 신경 쓰는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임신중독증에 걸린 아내 장씨가 조산을 해 첫딸과 막내아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라는 정호근·장윤선 부부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95년 결혼해 그해 첫딸 유진이를 가졌어요. 그런데 임신 7개월에 접어들 무렵 갑자기 혈압이 높아지고 양수가 줄어들어 아내와 아이가 모두 위험해졌어요. 결국 임신 29주 만에 첫아이를 낳았는데 그때 아이의 체중이 755g이었죠. 인큐베이터 안에서 5개월 이상 키웠는데도 퇴원 후 산소호흡기를 집에 비치해놓을 만큼 병치레가 잦았어요.”
아이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됐고 생후 2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이를 치료할만한 병원을 수소문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정호근은 급히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장례식을 치렀고, 경기도 팔당 근처에 아이의 유골을 뿌렸다고 한다. 그는 “유진이가 없는 삶은 지옥 같았다”고 말했다. 술과 눈물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시작됐다고. 3년 뒤 장씨가 동섭이(10)를 가졌지만 첫딸을 잃은 슬픔과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아내와 크게 다퉜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아내가 사라진 거예요. 불길한 생각이 들었죠. ‘건강한 아이를 낳지 못해 미안해. 좋은 여자를 만났다면 이런 고생 안 했을 텐데…’ 하던 아내 말이 떠올라 급히 딸의 유골을 뿌린 곳으로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자책하고 있는 아내에게 ‘유진이에 대한 모든 걸 가슴에 묻자’며 용서를 구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는 그곳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더라고요.”
장씨는 “그러나 막상 죽으려고 하니 배 속 아이가 발길질을 심하게 하더라. 꼭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정씨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동섭이를 무사히 낳았지만 시련은 다시 찾아왔다. 연년생으로 가진 혜민이가 첫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 정호근은 임신중독증에 걸린 장씨를 미국의 큰 병원으로 급히 옮겼고, 혜민이는 32주 만에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이후 혜민이는 한 차례 고비를 겪었지만 2개월간의 인큐베이터 생활을 한 끝에 건강을 되찾았어요. 제 품에 안겨 잠든 혜민이를 보면서 ‘유진이도 이곳에 왔더라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을 위해 가족을 미국에 남겨두고 홀로 돌아왔어요.”
그 후 7년 동안 기러기아빠 생활을 한 정호근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아이들과 화상 채팅과 전화를 하면서 외로움을 견뎠다고 한다. 아내 장씨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쌍둥이를 임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병원에서도 ‘양수가 부족해 아이가 위험하다. 발육상태가 좋지 않은 한 아이를 유산시키는 게 낫겠다’는 거예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어요. 의사가 만류했지만 누구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결국 7개월 만에 쌍둥이를 낳았는데 남자아이는 3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수원이(6)만 남게 됐죠.”
부부는 미국 달라스에 막내아들을 묻었다고 한다. 이따금씩 두 사람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 “하늘나라에 있는 네 동생에게 인사해야지” 하고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생의 존재를 알려줬다고. 먼저 세상을 떠난 누나와 동생 때문인지 동섭이와 혜민이의 꿈은 의사라고 한다. 정호근 역시 훗날 어린이병원을 세워 가난하고 몸이 아픈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저마다 개성 있는 삼남매 키우며 행복 느껴요”
정호근·장윤선 부부는 “그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 있었지만 함께 있어 극복할 수 있었다”며 서로에게 고마워했다.
동섭·혜민·수원 남매는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장씨는 “아이들 교육문제로 미국에 더 있으려 했지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한번은 혜민이를 데리고 외출했는데 혜민이가 아빠 품에 안긴 또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고요. 제 욕심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해졌고 ‘아빠가 보고 싶다’는 혜민이의 말에 미국집을 정리했어요.”
다행스럽게도 아이들 모두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한다. 정호근은 쉬는 날이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극성 아빠’라고. 이날 인터뷰는 갤러리 안에서 이뤄졌는데, 정호근은 밖에서 놀고 있는 동섭·혜민·수원 남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실 집 앞에 있는 슈퍼마켓에도 못 가게 합니다. 차사고가 나진 않을까 걱정돼서요. 남들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직 제 눈에는 어리고 여리게만 보여요.”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예의 없이 행동을 할 때는 따끔하게 야단친다고. 하지만 장씨는 “내가 회초리를 열 번 들 때 남편은 마지못해 한 번 든다. 그래서 아이들이 나보다 아빠를 더 좋아한다”며 억울하다는 듯 정호근을 바라보았다.
세 아이의 성격은 각기 다른데, 동섭이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혜민이는 부끄러움을 잘 탄다고. 막내 수원이는 간혹 어른스러운 말투로 부모를 감동시킨다고 한다.
“동섭이는 음악을 좋아해요. 올 초 빈소년합창단의 내한공연이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데려가달라고 조르더군요. 그 공연을 본 뒤로는 합창에 빠져 인터넷으로 매일 합창곡을 들어요. 얼마 전에는 ‘엄마, 내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면 빈소년합창단원이 됐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공연 때 들은 노래를 불러주더라고요(웃음). 혜민이는 음식에 관심이 많아요. 살이 많이 찔까 걱정이지만 미숙아였던 아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수원이는 또래보다 의젓하죠. 한번은 제 흰머리를 보더니 막 울면서 ‘엄마, 할머니 되지 마. 내가 말 잘 들을게요’ 하더라고요. 수영장에 데리고 갔더니 ‘재미있게 놀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제 품에 안겼고요. 세 아이의 개성이 달라 키우는 재미가 있어요.”
정호근에게 아내와 세 아이는 삶의 활력소라고 한다. 현관에서 배꼽인사를 하는 아이들과 “당신은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다. 조금만 힘을 내라”며 응원해주는 아내 덕분에 힘이 난다고. 그는 “방송활동으로 바빠 먼 거리 여행은 못 가지만 가까운 근교로 나가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자주 보낸다”고 말했다.
‘뉴 하트’로 바쁜 날을 보냈던 정호근은 최근 MBC 드라마 ‘이산’에 합류했다. 그가 맡은 역은 정조의 반대세력이자 훗날 홍국영을 암살하는 데 앞장서는 민주식. 극중 그의 모습은 인터뷰 내내 유쾌한 웃음을 보인 그와 사뭇 다르다.
“그렇죠? 저와 한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드라마 속 캐릭터와 많이 다르다며 놀라요. 또다시 악역을 맡았지만 ‘뉴 하트’ 이후로는 악역에도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사실 ‘뉴 하트’ 때 화장실에서도 중얼거리고 집에서 아내와 대사를 맞출 만큼 열정을 많이 쏟았거든요. 시청자에게 민영규가 사랑받는 모습을 보면서 역할이 비슷하더라도 캐릭터를 연구하면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지막으로 정호근·장윤선 부부에게 소망을 물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인정받는 게 목표입니다. 아직 천의 얼굴을 가지려면 멀었죠~(웃음). 앞으로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연극, 뮤지컬 등에도 출연해 다양한 변신을 할 겁니다. 아내, 세 아이가 지금처럼만 건강하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여느 아빠처럼 시간을 많이 못 내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자랑스러운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할 거예요.”
장씨는 “이대로도 행복하다. 남편 건강을 잘 챙기고 아이들을 야무지게 기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갤러리 밖으로 나서자 세 아이들은 서로 안아달라며 엄마 아빠에게 매달렸다. 장씨는 동섭이와 혜민이를 양손에 붙들었고 정호근은 막내 수원이를 한손에 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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