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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부부 살아가는 이야기

40년 만화 인생 책으로 펴낸 시사만화가 이홍우 화백 부부 인터뷰

기획·송화선 기자 / 글·박경아‘자유기고가’ / 사진·조세일‘프리랜서’

2007. 12. 24

동아일보에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을 28년째 연재하고 있는 이홍우 화백. 고등학교 재학 중 데뷔한 뒤 서른 살 청춘부터 시사만화를 그려오면서 ‘자기식대로’,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삶과 시사만화에 투영된 한국 현대사의 뒷얘기를 듣기 위해 그의 자택을 찾았다.

40년 만화 인생 책으로 펴낸 시사만화가 이홍우 화백 부부 인터뷰

동아일보에 네 컷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을 28년째 연재하고 있는 이홍우 화백(58)이 자신의 만화 인생을 담은 책 ‘나대로 간다’(동아일보사)를 펴내 화제다.
이 화백은 부산에 살던 중학교 2학년 때 시사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서울행 가출을 감행했을 만큼 일찍부터 시사만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당시 대표적인 시사만화였던 ‘고바우 영감’의 작가 김성환 화백 전시회에 찾아가 무작정 자신의 작품을 김 화백에게 보였고,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에 유학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만화를 그리며 준작가 생활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사만화계에 발을 디딘 건 서라벌예대 2학년 때인 지난 67년 대전 중도일보에 ‘두루미’를 연재하면서부터. 이후 전남일보를 거쳐 동아일보에 정착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8천5백여 회의 ‘나대로 선생’을 그려온 이 화백은 그 사이 만화와 관련돼 갖가지 사건을 겪기도 했다. 지난 86년 3월24일자 ‘나대로 선생’은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사건을 풍자했다. 군 장성이 회식 자리에서 국회의원을 때린 이 사건은 당시 보도 통제로 인해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못한 상태였다. ‘나대로 선생’은 “얼굴이 왜 그래?” “회식하다 불상사가 좀….” “맞는 순간 어땠어?”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하더군.” 단 네 문장으로 사건의 실체를 만천하에 밝혔고, 이 화백은 경복궁 옆 보안사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제 만화 인생만 파란만장한 게 아닙니다. 제 개인사에도 극적인 요소가 정말 많아요. 그 가운데 백미는 우리 부부의 결혼 얘기죠.”
부인 이경란씨(56)와 함께 인터뷰에 응한 이 화백은 철이 들기도 전인 다섯 살 때부터 정혼자로 정해져 있던 이씨와 결혼에 이른 과정을 들려줬다.
“저희가 어린 시절 부산 같은 동네 바로 이웃집에 살았는데, 특히 양쪽 어머니들이 아주 친하셨대요. 그래서 저 다섯 살, 이 사람 세 살 때 우리를 정혼시켜놓고 서로 ‘사돈’이라고 부르셨죠. 두 부산 아지매들이 코흘리개 앞세워 ‘사돈’ 맺는 걸 보며 동네 사람들이 다 깔깔 웃었다고 해요.”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마음은 달랐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들로부터 정혼 얘기를 들어왔지만 ‘설마’라고 생각했다고. 특히 이 화백이 서울로 올라가고 이씨는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 화백이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집에 내려가자 여전히 ‘사돈의 꿈’을 버리지 못한 양가 어머니가 한번 만나보라며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시어머니와는 어릴 때부터 목욕탕에서도 자주 만나는 사이였어요. ‘홍우랑 결혼하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진짜 우리가 결혼할 줄은 몰랐죠(웃음).”
이 화백 부부가 처음 만난 곳은 부산의 데이트 명소인 광복동 거리. 이씨는 “만나보니 괜찮은 남자 같아 결혼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화백은 달랐다고 한다. 당시 서울 용산 카투사 부대에 복무하며 ‘인기남’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 처음에는 정말 이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목욕탕에서 보니 날씬하더라’며 맏며느리감으로 괜찮은 여자라고 밀어붙이셨죠.”

40년 만화 인생 책으로 펴낸 시사만화가 이홍우 화백 부부 인터뷰

지난 28년간 네 컷 만화 ‘나대로 선생’을 통해 우리 사회를 풍자해온 이홍우 화백.


“철들기 전 양가 어머니가 정해준 사람과 부부의 연 맺어 30여 년 세월을 함께 살아왔어요”
결국 두 사람은 이 화백 제대 후 한 달 만인 지난 73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결혼 후 2년쯤 지나고부터 이 화백이 도박에 빠져들면서 결혼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한다.
“남편이 언젠가부터 제게 결혼 예물을 한두 개씩 달라고 했는데, 전 그게 도박 때문인 걸 까맣게 몰랐어요.”
아내의 다이아몬드 결혼반지까지 홀랑 다 날린 이 화백은 그제야 남편의 도박 사실을 알게 된 아내의 눈물을 보며 뼈아픈 반성을 하고 도박을 완전히 끊었다고. 그런데 이번에는 불임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이 화백은 그간 활동했던 전남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기고 조선일보 ‘고바우 영감’, 경향신문 ‘두꺼비’ 등 기라성 같은 시사만화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기 살기로’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결혼 후 한참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부부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아내의 나팔관이 막혔다는 거예요. 그런데 후천적 질환이라 뚜렷한 치료방법은 없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자연 치유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막연한 기다림이 시작된 거죠. 이 사람은 요즘도 눈물이 많아 드라마를 제대로 못 볼 정도인데, 그때는 아이를 못 낳는 스트레스 때문에 TV에서 분유 광고만 나와도 펑펑 울어댔어요.”
처가에서는 딸이 소박맞지나 않을까 싶어 용하다는 한의사에게 한약을 지어오기 바빴고, 이 화백의 친척들은 “당장 이혼하라”고 성화였다고 한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하지만 제가 중심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친척들에게 ‘결혼은 어른들이 정했을지 몰라도 살고 안 살고는 우리가 정할 것’이라며 ‘노터치’를 요구했어요.”
이씨는 “그때 남편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며 “그 일 이후 그동안 남편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다 사라졌다”고 털어놓았다. 다행히 결혼 13년 만에 나팔관이 저절로 뚫리면서 이씨는 아들을 낳았고 2년 뒤 딸을 한 명 더 낳았다고 한다. 아들은 성균관대 재학 중 입대해 현재 군복무 중이고, 딸은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연기를 공부하고 있다고.
이씨는 “남편이 보기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여도 참 정이 많다”며 “다만 매일 새로운 만화를 그려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하루 두 갑씩 담배를 피우는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남편의 건강을 위해 이씨는 늘 냉장고에 대추와 인삼 달인 물을 준비해둔다고 한다.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은 뒤 오히려 사랑이 단단해진 이 화백 부부는 집에 있을 때 곁에 앉으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일이 많다. 이승엽 선수의 열렬한 팬인 이 화백은 아내 손을 잡은 채 TV 야구중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얼마 전 어느 책에서 보니 ‘만지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하더라고요. 옛날에는 나이 쉰이 넘으면 부부가 각각 사랑방과 안방을 쓰며 따로 지냈다지만, 부부는 같이 지내야 젊음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이 화백은 아내 손을 정겹게 잡았다. 이씨의 손가락에는 10여 년 전 ‘아내가 정말 예뻐서’ 남편이 해줬다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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