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송은일씨(42)를 만난 건 소설 ‘반야’가 출간되고 열흘 남짓 지난 5월 초였다. 봄볕 따뜻한 오후, 광주광역시 자택에 마주 앉은 그는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소설이 끝나면 한동안 좀 멍해지는 시기가 있어요. 소설 속 세계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해 현실과 소설을 잘 구별 못하는…(웃음). 요즘 제가 그러네요. 일이 손에 안 잡혀 그냥 유유자적 지내고 있어요.”
그가 이번에 펴낸 작품이 수백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역사소설 ‘반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반야’는 ‘반야’라는 이름의 무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조선조 영조 어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한데, 정확한 연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오롯이 송씨가 창조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반야는 성별과 신분의 차별이 없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비밀조직 ‘사신계(四神界)’와 함께 새로운 삶을 위해 싸워나간다. 마치 실존했던 조직인 듯 치밀하게 짜여 있는 ‘사신계’의 조직 강령과 계보 역시 100% 송씨의 창작품. 이렇게 ‘정말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짜내기 위해 송씨는 한동안 올곧이 ‘반야’ 안에서 살았을 것 같다.
‘반야’는 지난 2000년 소설 ‘아스피린 두 알’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송씨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제대로 된 서사가 없다”는 비판을 듣는 한국 문단에서 그는 줄기차게 장편소설을 발표해왔고, ‘이야기의 힘’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원고지 2천4백 장 분량이라는 ‘반야’ 역시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 힘들 만큼 거침없이 전개되는 스토리와 ‘쫄깃한’ 문장이 매력이다.
“저는 이야기가 좋아요. 제목을 정하고 대략적인 얼개를 잡으면 그 안에서 저절로 굴러가거든요. 가끔은 주인공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걸 제가 바삐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웃음).”
아이 낳고 시작한 고된 습작기간, ‘여성동아’ 당선 뒤 작가의 길 열려
농담인 듯 말했지만,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송씨는 길고 고된 습작기간을 거쳐야 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송씨가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인 서른 즈음. 죽 서울에서 살다 그 무렵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광주로 이사했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그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마침 아이도 웬만큼 자라 엄마 손을 덜 타는 시기가 되자, 송씨는 대학시절부터 막연히 갖고 있던 작가의 꿈을 본격적으로 꾸기 시작했다. YWCA 문예대학에 등록해 공부하며 ‘미친 듯이’ 글을 썼다고.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샘솟았는지, 한 해에 단편소설을 스무 편 넘게 썼어요. 살림하고 아이 돌보는 시간을 제외하곤 온통 글만 생각한 거죠. 그렇게 2년쯤 보낸 뒤인 9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작업실인 안방 서재 앞에 앉은 송은일씨. 그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며 부족한 경험의 폭을 넓혀가는 ‘노력하는’ 작가다.
당선 소식을 듣고 처음엔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그의 앞엔 ‘작가 지망생’보다 더 고된 ‘무명작가’의 길이 예정돼 있었다고. 좀 더 많은 이에게 인정받을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또다시 길고 긴 습작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때부터 장편소설을 써서 여러 공모전에 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쓴 작품이 번번이 떨어지더군요.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죠. 다른 작가들 얘기를 들으니, 습작 시절 한 작품을 완성해 공모전에 냈다가 떨어지면 그걸 수정해 다른 공모전에 내고, 또 실패하면 다시 수정해 제출하는 식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전 안 그랬어요. 한 번 탈락하면 그 작품을 접고 아예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했죠.”
송씨가 95년부터 2000년까지 쓴 습작 장편소설은 무려 다섯 편. 1년에 한 편꼴로 꾸준히 작품을 완성한 그는 지난 2000년, 마침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아스피린 두 알’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당시 “386세대가 사회에서 겪는 아픔이 마음에 와닿는,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호평을 받았고, 송씨는 이듬해 발표한 ‘불꽃섬’으로 동인문학상 최종심에 오르며 작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아스피린 두 알’ 출판 당시 작가 약력란에 적힌 송씨의 소개 글은 “결혼 이후 10년 동안 글만 씀”. 유명 작가가 된 지금도 글쓰기에 대한 그의 이런 성실성은 변하지 않았다. ‘한 꽃살문에 관한 전설’ 등 여섯 권의 장편소설과 10편의 단편을 모아 묶은 창작집 ‘딸꾹질’ 등을 냈고, 비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여성동아 문우회’ 동인 소설집에도 꾸준히 글을 싣고 있다.
“모든 게 다 길고 길었던 무명시절 덕분이죠(웃음). 사실 등단 이후 발표한 작품 가운데 두 개는 습작 시절 썼던 장편소설을 개작한 겁니다. 전업 작가가 아닌 주부 작가이기 때문에, 늘 마음속으로 ‘게으름을 피우면 언제 이 일을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고 경계하는 것도 전업 작가보다 더 부지런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송씨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축협에 근무하는 신영구씨(46)의 아내이자, 고등학교 1학년생인 신새벽군(16)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실은 자택 안방이고,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늘 방문을 열어둔 채 글을 쓴다고 한다. 소설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쓰다가도 아이가 들어오면 함께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밤을 새워 글을 쓴 다음 날에도 아침밥은 꼭 챙겨주는 ‘보통 엄마’라고.
“소설에 몰입해 있을 때는 가끔 아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때도 있어요. 상황에 맞지 않는 대꾸를 하며 멍하게 있으면 아이가 ‘엄마, 지금 내 말 못 알아듣고 있지?’ 하죠. ‘어? 아냐’ 하면서 그제야 소설에서 빠져나오는 거예요(웃음). 하지만 보통의 경우엔 별 어려움 없이 소설과 현실을 잘 오고 가요. 어차피 주부가 된 뒤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설을 쓰다 잠깐 쉴 때 나와서 세탁기 돌리고, 다시 들어가 글을 잇다가 끝날 때쯤 나와서 널어요. 물론 그런 일을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 커서는 계속 깜빡이며 다음 글자를 두드리고 있죠(웃음).”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세상과 자신을 완전히 격리시킨 채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품에만 몰두하는 전업 작가들의 이야기는 그에게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상황에 불만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집 안에 작업실을 마련한 덕에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도 든다고.
“‘아줌마 작가’가 꾸준히 활동하려면 일과 집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작업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모든 걸 다 버리고 비장하게 소설에만 몰두하겠다고 결심하면 오히려 더 힘들어지죠. 시작조차 할 수 없기도 하고요. 차라리 ‘나는 주부의 일도 하겠다. 하지만 보통 주부보다는 좀 못하는 정도에 만족하고 글도 쓸 것’이라고 선언하면 두 개를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어요.”
대신 그는 스스로 규칙을 하나 정했다고 한다. 집안일을 할 때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꼭 앞치마를 두르는 것. 앞치마를 꺼내는 순간 ‘작가’였던 송은일은 ‘주부’로 변신한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전 차 한 잔을 끓여주더라도 꼭 앞치마를 해요. 그러면 잘 모르는 이들은 ‘왜 일하는 사람처럼 그러세요?’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 이거 벗으면 바로 안방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 써야 돼요. 그래도 돼요?’라고 대답하죠(웃음).”
고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다 보니, 다른 작가들처럼 여행을 다니거나 다양한 세상 경험을 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종종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작가들은 여행 많이 다니죠?” 하고 물으면 “저는 못 다녀요”라고 하기도 쑥스러워 그냥 “많이 다니려고 노력해요”라고 답한다고. 가끔 속으로 ‘아이가 대학에만 들어가면 내 마음대로 살리라’ 결심하지만, 그때가 되면 또 다른 일상에 갇힐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대신 그는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책이나 영화, 비디오를 많이 본다고 한다.
고등학생 아들 둔 엄마다 보니 여행 대신 책이나 영화 보며 경험의 폭 넓혀
가끔은 이런 ‘굴레’가 답답하지만, 가족은 그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송씨의 변함없는 꿈은 아들 새벽군이 대학에 들어간 뒤 도서관에 가서 친구들에게 “이게 우리 엄마 책이야”하고 자랑할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 그는 ‘반야’를 통해 그 꿈을 반쯤 이뤘다.
“지금까지는 아이에게 제 책을 읽지 못하게 했어요. 어른 소설을 읽기엔 어린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번엔 고등학생도 되고 해서 처음으로 ‘반야’를 건네주며 읽어보라고 했죠. 처음엔 ‘엄마가 웬일이냐’며 놀라더니, 바로 다음 날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에 책 두 권을 싸들고 가더군요.”
새벽군은 수학여행 첫날 밤 전화를 걸어와 “엄마, 시작이 괜찮은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밤엔 다시 전화를 걸어 ‘엄마 재밌어’라고 했다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간 뒤 친구들은 ‘왕따’시키고 혼자 책만 읽었대요. 도대체 뭘 그렇게 읽느냐고 묻는 친구들한테 ‘이거 우리 엄마 책이야’라고 말했다더군요. 그 목소리에서 자랑스러움이 묻어나, 순간 마음이 뿌듯했어요. ‘아, 저 아이가 대학 가기 전에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정말 기쁘데요.”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글 쓰는 모습을 보고 자란 새벽군은 학교 문예반에 들었다고 한다. 아이가 인터넷에 중독되면 안 될 것 같아 컴퓨터는 하루에 1시간씩만 하도록 규칙을 정해놓았는데, 벌써 1년째 그 시간을 쪼개 소설을 쓰고 있다고.
“아이가 북유럽신화, 그리스·로마 신화를 좋아하거든요. 언뜻 줄거리를 들어보니, 그런 내용이 많이 들어간 판타지물 같아요. 처음에는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못 알아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제법 이야기가 선명해지는 게 느껴져요. 무엇보다도 한 작품을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쓰고 있는 게 참 좋아요.”
아들 얘기를 나누는 내내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지는 걸 보며, 그가 가정과 소설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작가 아내’를 내심 자랑스러워하는 남편, 평생 갈고닦은 서예 실력으로 소설 ‘반야’의 표제를 직접 써준 아버지, 며느리와 통화할 때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말하는 시어머니(그의 시어머니는 늘 글을 쓰느라 바쁜 송씨가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등 가족 모두가 송씨에겐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며, 힘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반야’를 떠나보내며 또다시 슬슬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출판사에서는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러브스토리’를 써보라고 하는데, 송씨는 ‘떡’에 관련된 소설을 쓰면 어떨까 생각 중이라고 한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향토음식박물관에 떡 강좌가 개설돼 ‘반야’를 탈고한 뒤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웬만한 떡을 만들 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떡집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고.
“지금 정해진 건 그것뿐이에요. 떡집에서 벌어지는 일이 사랑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일 수도 있고(웃음). 이렇게 또 하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생각을 하니 설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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