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시인(45)은 요즘 한국 시단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다. 그가 지난해 펴낸 시집 ‘나는, 웃는다’는 시 전문 출판사 ‘천년의 시작’이 1천만원이라는 파격적 상금을 걸고 제정한 제1회 시작(詩作)문학상을 받았고, 연간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2007년 호가 문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지난해 출판된 시집 가운데 가장 좋은 시집으로 선정됐다. 최근엔 2005년 작고한 이형기 시인을 기려 제정한 제2회 이형기문학상도 수상했다. 그가 화제를 모으는 이유는 또 있다. 이 ‘촉망받는 시인’이 경남 진주의 한 제지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 유 시인을 만나러 갈 날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자 그는 금요일 오후쯤이 괜찮겠다고 했다. 24시간 쉬지 않고 기계를 돌리는 제지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는 그에게 금요일은 야근 후 하루 주어지는 휴일이라는 것이다.
촉망받는 시인인 동시에 제지공장 노동자인 유홍준씨.
“공장 다니면서 시 쓴다고 하니까 관리직 부장 정도 되는 줄 아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아니에요. 현장직은 입사할 때부터 퇴직할 때까지 쭉 현장 일만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기계와 싸우면서 종이 만드는 사람입니다. 생산부 가공과 C반 반장이죠(웃음).”
17년째 제지공장에서 일하는 유홍준 시인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었다. 공장 밖에서는 문학을 얘기하고 시를 논하다, 작업장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걸 다 잊고 노동에만 매달리는 건 때론 “간이 찢어지는 것처럼” 힘든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장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껏 가족을 건사하며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유 시인은 자신에게 “귀한 밥”을 주는 지금의 일자리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제지공장에 취직하며 진주에 정착하기까지,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는 그는 “시인이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망설여지지만, 내 얘기를 듣고 희망을 가질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지난 시간을 털어놓는다”며 삶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생계 위해 고추 장사, 과일 행상, 산판 일 해야 했던 젊은 시절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유 시인은 어린 시절 네 번이나 가출했던 골치 아픈 아이였다고 한다. “봄만 되면 그냥 견딜 수 없어서” 학교를 빼먹고 함양, 남원 등지로 하루 종일 떠돌아다녔다.
“집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기약 없이 병석에만 누워 계셨어요. 6남매 키우는 시골집에서 병원비 대느라 논 밭 팔기 시작하니 감당이 됐겠어요. 그때는 그런 환경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제가 힘든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그저 마음속 불덩이를 어쩌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학업에는 전혀 뜻이 없었지만, 백일장만 나가면 상을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교사는 “차라리 수업시간에 소설을 쓰라”고 권했다고 한다. 문학특기생을 받는 대학에 진학하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저 어서 돈을 벌어 돈 없다고 우리 식구 무시한 사람들 뒤통수를 돈 다발로 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고3 2학기 때 처음 취업한 곳이 한복집이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2년 반 동안 한복집에서 바느질을 했는데, 제대해 돌아와 다시 바늘을 잡으려니 아무래도 그 일로는 큰돈을 벌기 어려울 것 같았다고 한다. 마침 서울 용산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삼촌이 생각나 무작정 상경, 한 1년 동안 마른 고추를 팔았다. 돈은 거의 못 벌었지만 아는 사람 소개로 아내를 만났고, 폭설이 쏟아진 어느 겨울날 같이 영등포로 데이트 나갔다가 “눈이 하도 많이 오는 바람에 그만 큰 놈이 생겨”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결혼하고 아이도 생기니 좀 더 돈이 되는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부산에 살고 있던 누나네 근처로 이사가 같이 가내공업을 해보려고 했죠. 그런데 일이 도저히 성격에 맞지 않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이 보온병을 넘어뜨려 화상을 입는 사고까지 당한 겁니다.”
유 시인은 “병원에 아이 눕혀놓고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골목에서 건강하게 뛰어노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우리 아이한테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쳤다”고 한다.
안 좋은 기억만 남긴 부산 땅에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이번엔 대구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선 야채 가게를 열었는데, 아무 준비 없이 무작정 시작한 가게는 역시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화상 치료를 위해 서울에 있는 병원에 계속 다녀야 했던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대기에도 벅찼다. 그는 가게를 접고 과일 행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포도 사이소’ 하는 말이 과연 제 입에서 떨어질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막상 리어카 끌고 거리에 서니 다 되더라고요.”
장사 첫날 그는 반나절 만에 들고 나간 물건을 다 팔고, 빈 손수레에 아들에게 줄 세 발 자전거를 하나 사 얹은 채 개선장군처럼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은 다 팔리는데 돈이 남지 않은 것이다. 싸게 달라면 싸게 주고, 더 달라면 더 주는 식으로 퍼주는 장사를 한 게 화근이었다.
“과일 장사도 못하겠다 싶어서 전 재산 30만원을 들고 강원도 양양으로 갔어요. 서울 용산시장에서 장사하던 시절 사귀었던 고추 농부 한 사람이 양양에 산다고 했던 기억이 났거든요.”
‘이형기문학상’을 받은 유홍준 시인이 이 시인의 대표작 ‘낙화’가 새겨진 시비 옆에 섰다.
87년의 일이다. 이름 석자만 들고 양양 읍내를 종일 헤맨 끝에 찾아낸 그 농부는 다행히 유 시인에게 일거리를 줬다고 한다. 하루 종일 고추를 닦고 삼태기에 담아 창고에 쟁이거나 10톤 트럭에 실으면 일당이 6만~7만원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산청 본가에 보내놓고 혼자 골방을 얻어 고추 작업을 하니 장판 밑에 돈이 차곡차곡 모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농사철이 아닌 여름과 겨울에는 일이 없다는 것. 그는 고추 벌이가 없을 때는 양곡 운반, 시멘트 운반, 농약 치기, 도로공사, 개천 제방공사 등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며 돈을 모았다.
“양양 가기 전에도 별별 노동판을 다 다녔지만, 가장 힘든 건 양양에서 한 ‘산판’ 일이었어요. 산에 터널 뚫을 때 세우는 갱목 있죠? 그걸 실어나르는 일인데, 두 사람이 한 조를 짜서 산 위부터 아름드리 나무를 메고 내려와 트럭에 싣는 거죠. 트럭 한 대에 2만원씩, 하루 다섯 대 정도 실으면 10만원쯤 받는 거예요.”
산판꾼들 사이에는 “나무를 얹는 어깨 자리가 달걀 하나는 들어갈 만큼 파여야 제대로 된 산판꾼”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어깨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사람은 나무가 얹힐 때마다 상처가 나다 못해 진물이 터져 나올 만큼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처음엔 저녁 때 집에 돌아가면 어깨에서 터진 진물에 옷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 소주를 들이부으며 떼어내곤 했다고 한다. 해뜨기 전 캄캄할 때 막걸리 한 상자를 이고 집을 나서 캄캄한 밤에 들어올 때까지 하루 종일 술기운으로 버티는 날들이었다.
“빨리 빨리 나무를 실어야 돈이 되니까 산판꾼들은 나무를 메고 산비탈을 막 뛰어다녀요. 나중에는 나무 생김새만 보면 어깨를 어떻게 갖다대야 할지 척 감이 오죠(웃음). 하지만 처음엔 ‘삼청교육대가 이보다 힘들까’ 싶을 만큼 괴로웠어요.”
하지만 그는 돈이 필요했다. 햇빛에 시커멓게 그을리고 온몸이 송진으로 뒤덮였지만, 그는 3년 동안 여름이면 산판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90년 초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다시 양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경남 진주에 사는 큰누나가 붙잡은 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환절기 감기처럼 찾아와 그를 우울하게 만들어
“누나가 대뜸 등본을 떼어 오라는 거예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제 이력서를 제지공장에 넣었는데 합격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몇 백 명이 다니는 회사에 취직해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죠.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공장 일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산판 일을 하다가 종이 만드는 공장에 취업하니 ‘세상에 이렇게 쉬운 일이 있나’ 싶을 만큼 좋았다고 한다. 주위 동료들은 다 힘들다고 하는데 사람 허리통만 한 나무를 메고 산길을 뛰어다니다 온 그는 “이렇게 일하고 돈 받아도 되는지” 미안할 정도였다고. 마침 그 무렵 6년 넘게 계속되던 아들의 병원 치료도 끝나 비로소 조금씩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힘이 하나도 안 드는 일이라” 그가 온갖 잔업을 도맡아가며 일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취업 3년 만에 작은 아파트를 구입했고, 오순도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학교 졸업하고 10년 동안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세월이 하도 모질어서” 시고 문학이고 생각할 틈도 없던 그가 원고지를 마주하게 된 건 입사 첫해 여름이었다.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진주상공회의소에서 낸 공단문학상 공모 광고를 본 것이다.
“장려상 상금이 15만원이더라고요. 근로자만 대상으로 한 문학상이라니 어떻게 장려상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소설을 하나 급히 썼죠.”
“15만원을 받으면 아들 자전거 바꿔주고 남는 돈으로 술 한 잔 먹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쓴 글이었는데, 그는 대상을 차지해 상금 30만원을 받고 진주 MBC 뉴스 인터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공단문학상 수상자들과 모임을 만들어서 문학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듬해 우리나라 예술제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진주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시를 써내서 장원을 했죠.”
그렇게 조금씩 진주에서 이름을 알려가고 있던 그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준 건 진주개천예술제 백일장 심사를 맡은 김언희 시인이었다. 그는 유 시인에게 지금까지 쓴 시를 다 보여달라고 한 뒤, 그중 열댓 편을 골라 퇴고를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공부를 가르치면서 선생님이 내건 조건은 딱 한 가지였어요. 당신이 됐다고 말씀하시기 전엔 어디에도 시를 발표하지 말라는 거였죠.”
김 시인이 ‘됐다’고 말하는 데는 7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지난 98년 “이제 어디든 등단하라”는 스승의 허락을 받은 유 시인은 그해 ‘시와 반시’ 신인상을 받으며 시단에 나섰고, 2005년 첫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을 통해 한국시인협회가 주는 제1회 젊은 시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펴낸 두 번째 시집으로 일약 한국 시단의 총아가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스승이 기대했던 대로 시인이 됐지만 그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전, 오후, 밤 근무를 돌아가며 공장에서 종이를 만들고, 근무가 없는 날이면 산청 고향집에 가서 어머니의 농사일을 거든다. 젊은 시절 한복집에서 일한 경력 덕에 지금도 바느질이라면 자신 있는 그는 빨래, 설거지, 나물 캐 다듬기, 밥 짓기 같은 집안일도 척척 해내는 자칭 ‘착한 남편’이라고 한다.
“큰아들은 벌써 대학생이고, 그 아래로 열 살 터울 딸이 하나 있어요. 오후반 작업을 마치고 밤 11시 넘은 시간에 자식인지 친구인지 모를 만큼 커버린 아들과 술 한 잔 마시고 집에 갈 때면 하루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죠.”
그러나 어린 시절, 봄만 되면 아는 이 하나 없는 도시를 떠돌게 했던 ‘가슴속 불’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고 한다. 중학교 때 처음 전깃불을 볼 만큼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평생 고된 일만 전전했고, 여전히 가난의 고리를 끊지 못한 데서 오는 세상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가끔 환절기 감기처럼 찾아와 그를 우울하게 만든다고.
“순백의 종이를 만들려면 청산가리와 같은 독극물을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좋은 시에도 독극물이 필요하다”며 짐짓 웃었다. 그의 신산한 삶은 어쩌면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내기 위한 독극물이 아니었을까. 유홍준 시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의 시는 45년 살아온 세월을 가슴속 불덩이에 녹여 담금질해 뽑아낸 결정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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