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씨(59)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38년 동안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1982년 등단해 ‘섬진강’ ‘콩, 너는 죽었다’ ‘섬진강 이야기’ 등 수십여 권의 시집과 동시집, 동화집, 산문집 등을 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강 건너와 마을 앞뒤가 다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마을은 말구유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을에 논과 밭이 적고, 마을에서 나는 농산물이 없어 마을은 가난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풍요롭고도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를 가꾸며 마치 작은 공화국 같은 생활을 했다. 우리 집도 가난했다. 우리 마을에서 중학교를 가거나 고등학교를 가는 것은 어려웠다.
어떻게 해서 내가 전북 순창으로 중학교를 갔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꿈처럼 아득하다. 내가 덕치초등학교(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졸업할 때 우리 반이 모두 18명이었는데, 유일하게 나만 중학교를 갔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순창으로 중학교를 갔다. 그때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나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 끝에서 세 번째로 합격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가 중학교에 합격을 했는지 지금도 의아하기만 하다.
중학교 때도 나는 공부라는 것을 따로 해본 적이 없다. 시험을 볼 때만 조금씩 그냥 공부하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중학교 때 내가 주로 한 것은 영화를 열심히 보는 것이었다. 순창에 극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극장에 들어온 영화는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보았다. 방학 때만 제외하고 말이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같은 캠퍼스에 있는 순창농고를 갔다. 우리들은 주로 농사일을 하며 지냈다. 일은 모내기, 피사리, 벼 베기, 묘포 김매기, 소 두엄내기, 비닐하우스 채소 가꾸기 등 끝이 없었다. 그렇게 일을 하며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도 나는 영화 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볼 때 돈이 들었기 때문에 우리 몇몇은 늘 영화가 시작된 지 3분의 1쯤 지났을 때 들어가 공짜로 영화를 봤다. 오랜 세월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극장에서 표를 받는 ‘기도’ 아저씨와 우리들은 아주 친한 사이가 돼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집에서 오리를 키웠다. 그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세월이었다. 결국 오리 키우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 나는 한 달 동안 거지처럼 지냈다. 어떻게 친척집을 찾아가 하루 한 끼를 얻어먹고, 어떻게 그 집에서 잠을 자면 그날은 행운이었다. 밥을 먹지 못하면 하루 종일 걸어다니다가, 서울역 지하도에서 잠을 잤다. 나중에는 잠은 사촌형이 얻은 방에서 자고, 하루에 한 끼 식사를 위해 친척집을 전전했다. 어느 날 너무나 배가 고파 친척 형을 찾아갔다. 형은 나의 몰골을 보고 놀랐다. 깎지 않은 머리에 땟국이 질질 흐르는 얼굴, 냄새나는 옷을 본 형은 나에게 라면을 사주었다. 땀 뻘뻘 흘리며 라면을 먹고 있는 나를 본 형이 그날 밤 시골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연락이 왔다. 시골에 취직자리가 있으니 오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다시 순창 동생들이 자취하는 곳으로 갔다. 방 안에 틀어박혀 밥만 먹고 잠만 잤다. 자취집 주인이 내가 자기 집에 있는지 없는지를 오랫동안 모를 정도로 나는 두문불출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나처럼 할 일 없는 동창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그럭저럭 지내던 어느 날 친구들이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초등학교 교사 시험이 있으니 같이 시험을 보자고 했다. 나는 한 번도 그 일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싫다고 했다. 친구들은 그래도 심심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계속 싫다고 하니, 그러면 사진만 찍자고 했다.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더니, 친구들이 시험 볼 서류들을 다 갖춰주었다. 사회에 나온 후 처음 치른 시험에 합격이 돼 선생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내 삶은 그렇게, 내 뜻과 의지가 아닌 친구들의 권유에 이기지 못해 선택한 교사의 길이 피할 수 없는 내 인생이 돼버렸다. 그때 내 나이 호적으로 스무 살이었다.
나는 아주 작은 분교에서 선생을 시작했다. 양말을 벗고 도랑을 세 개나 건너야 했다. 그 작은 산골은 평화롭고 지루했다. 내 청춘의 피는 그 작고 평화로운 마을의 몇 안 되는 아이들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너무 심심했고, 하루가 너무 지루했다. 그렇게 심심해서 미칠 지경으로 지내던 어느 날, 그 우연이라는 알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 닥쳐왔다. 그 시골까지 월부책장사가 학교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때 내 생전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책을 샀다. 그것도 월부로. 내가 산 책은 판형이 아주 크고 멋진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재미있었다. 어떻게 그 작은 책 속에 그렇게나 수많은 인물들이 살아가는지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그 책을 다 읽을 무렵 그 책장사는 또 다른 책들을 물어 날랐다. 박목월 전집, 이어령 전집, 괴테 전집, 헤세 전집, 니체 전집, 서정주 전집, 그리고 나는 드디어 전주 헌책방으로 진출해서 헌 잡지와 헌책들을 사 날라다가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8년쯤 지났을까. 나는 드디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온갖 장르의 글들이 다 써졌다. 엉터리지만 말이다. 나의 생각들은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나 많은 내 생각들을 잘 간수하기 위해서 나는 그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글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일찍 모든 것을 접었다. 인생의 첫 시작이 시골선생이었으니, 나이 들어 늙을 때까지 그렇게 선생으로 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편하게 마음을 먹자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책만 읽고, 글만 쓰고, 아이들과 행복하게 하루를 살면 됐다. 희망이 없이, 아니 희망을 일찍 이루어낸 삶은 그 얼마나 한가하고 평화로웠던가.
나는 어느 날 시인이 돼 있었다. 선생을 시작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13년이 흘러간 후였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오랫동안 나는 시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인이 되었지만 나는 선생이라는 아름다운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나는 아이들 앞에 앉아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지내고 있다. 별일이 없는 한 나는 앞으로 몇 년간은 지금처럼 지내게 될 것이다.
내 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들은 많았겠으나, 나의 노력으로 순간들을 돌파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시험을 보아 중학교로 진학을 하고, 고등학교를 가고, 오리를 키우다가 망하고, 서울을 가고, 낙향하고, 선생이 되고, 그리고 시인이 되었지만 나는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순간이 자기의 의지이든 아니면 우연이든 자기에게 찾아온 순간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가꾸어나가는 것은 다 자기 할 탓일 것이다. 인생은 억지로 되지 않고, 또 되려고 한 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초등학교 아이들 앞에서 시작된 나의 인생은 이렇게 초등학교 아이들 앞에서 끝이 나간다. 스물대여섯 살 무렵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 작은 시골에 태어나 나는 선생이 되었다. 이 시골에서 선생을 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살자. 그렇게 사는 삶도, 그런 인생도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그런 사람도 하나쯤은 이런 세상에 있음직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그렇게 된 것이다.
▼ 정신과 의사 김병후 - 만약 그때 내가 낙제하지 않았다면
김병후씨(52)는 93년부터 각종 매체를 통해 부부와 가족 문제를 상담해온 정신과 의사. 현재 ‘김병후 정신과의원’과 ‘부부클리닉 후’를 운영하고 있으며 ‘행복가정재단’을 설립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사회문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 부부, 정말 괜찮은 걸까?’ ‘아버지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딘가 도망가고 싶었다. 막연하게나마 요행을 바랐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어떤 말로도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상황…. 어머니야 어떻게 해서든 이해를 하시겠지만 아버지에게는 절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의과대학 평균 졸업 연수가 7.4년이라고 자위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북에서 단신 월남한 아버지는 늘 힘겹게 세상을 사셨다. 어쩌면 그렇게 망해가는 업종만 따라하시는지, 늘 듣는 말이 ‘돈이 없다’는 말이었다. 의대를 들어갔는데도 국립대가 아니기에 등록금을 대줄 수 없으니 알아서 공부하라고 하신 양반이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시원치 않아도 자식 농사는 잘했다고 위안을 받던 분이었다. 낙제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데모를 주도하느라 출석 일수가 모자라 한 해를 더 다녀야 한다는 말은 정말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 하나를 믿고 당신을 지탱해왔던 아버지의 무너진 자존심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집에 오면서 앞으로 절대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존중하기로 했다. 세상에서 낙제했던 나 자신의 용서를 구했던 것처럼, 그리고 부모님이 낙제했던 것을 눈가림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들에 대한 큰 기대를 갖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련은 늘 일어나게 돼 있다고, 때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은 그 후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병원 개업을 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20대의 남자 환자가 입원 당일 칼로 환자들과 직원들을 공격한 것이다. 중학교 3학년생인 여학생이 목 주위를 다쳤다. 보호자인 형이 환자인 동생에게 칼을 갖다주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
좋지 못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떤 일을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일어날 일이 벌어진 것뿐이므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줬다. 인간은 누구나 성격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때로 그것은 노력해서 교정될 수 없다. 어떤 경우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할 수도 없다. 그의 뇌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 때문에 내 아버지도, 어머니도, 심지어는 나 자신마저도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학교 다닐 때 데모 주동을 했던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명백히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생성된 것이었다. 결국 낙제를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아버지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된 그때의 경험은 이후 정신과 의사로 또 조직의 장으로 살아가면서 도움을 준다. 만약 그때 내가 낙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 드라마 작가 박예랑 - 극심한 좌절감에 시달릴 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
박예랑씨(37)는 ‘마지막 전쟁’ ‘여자만세’ ‘천생연분’ ‘결혼합시다’ 등을 쓴 드라마 작가다. 발랄하고 톡톡 튀는 감성으로 젊은 세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저서로는 ‘예랑의 키다리 아저씨’ ‘사랑아 웃어라’가 있다.
6, 7년 전 제법 야심차게 준비했던 드라마가 많은 관심 속에서 방영됐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다. 어느 정도 이름값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잘나가는 스타들까지 총동원한 드라마의 반응이 기대 이하일 때 작가에게 오는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참고 참았던 나 나름대로의 불만과 서운함이 제작진에게 터졌고 제작진은 제작진 나름의 불만을 내게 쏟아부었다.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엔 눈물도 안 나오고 목이 따갑고 아파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3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험한 생각도 한순간 들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사랑의 전설’이라는 작품을 같이한 뒤 늘 내 옆에 있어주었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애인 같은 사람. 신혜언니의 전화였다. 내가 시청률 부진으로 인한 제작진과의 다툼으로 죽고 싶다고 말하며 다시 울자, 언니는 아주 차가운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너 그거 아니면 못 먹고 사니? 그 정도밖에 안 돼? 그걸로 죽고 싶어?”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언니의 태도에 난 당황했다. 너무나 서운하다는 생각에, 독한 마음으로 울음을 그치자 언니는 이야기했다.
“넌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던 순간이 많았는지 모르지?”
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언니가 힘들었던 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세상에 황신혜에게… 어떻게 그런 순간들을 버텨냈을까… 그게 놀랍고 신기했다. 그리고 언니가 울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어느새 난 언니를 위로하고 있었다.
“언니 울지 마! 그래도 버텨야지! 그럴수록 열심히 살아서 보란 듯이 행복한 걸 보여줘야지!”
그렇게 난 그날을 넘겼다. 전화를 끊고 베란다의 창문을 닫은 다음 밤새워 생각했다.
‘난 정말 이거 아니면 못 먹고 사나?’
난 방송작가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글을 즐기며 쓰고 싶었다. 글에서 돈이 안 나오면 먹고살 수 없을 것 같아 막막해하며 울기는 싫었다. 신나고 재밌게 글을 쓰고 싶었다. 다시는 나약한 모습으로 살기 싫었다.
그 이후로 난 많은 드라마를 썼고, 언니와도 ‘천생연분’이라는 드라마에서 다시 만나 신나게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제법 베스트셀러도 만들어내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고, 결혼도 해서 안정을 찾았다. 작은 일에도 철없이 울고불고했던 내가 말이다.
‘내 인생을 바꾼 결정적 순간’에 대한 원고 청탁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때 언니와 주고받았던 한 통의 전화였다.
가장 힘든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는지, 인생을 바꾸는 그 한순간은 얼마나 사소하고 작은 것인지, 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의 힘이 있는지… 그렇게 내 주위에 있으면서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 감사한다. 지금도 그런 크고 작은 사랑의 힘에 내 인생은 변하고 있으며,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날 즐겁게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원고를 쓰고, 누군가 내 실패와 작은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줄 작은 힘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성우 배한성 - 겉멋을 부린다고 호되게 깨우쳐 주신 선생님의 한마디
배한성씨(61)는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66년 동양방송의 성우로 데뷔해 40년간 성우로 활동했다. 라디오 연속극, TV 외화 시리즈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그는 현재 한국성우협회 이사장·서울예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교통방송에서 성우 송도순씨와 함께 ‘함께 가는 저녁 길’을 16년째 진행하고 있다.
중학생 때부터 가장 역할을 했던 나에게 대학 진학은 갈 수 없는 샹그리라(이상향)였다. 가고픈 마음은 어느 누구 못지않았다. 그러나 집안 형편상 절망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가지 않는다고, 아니 가고 싶지만 못 간다고 말이다. 묘한 열패감에 빠져 있는데 이석태란 친구가 찾아왔다. 우리 집에 밥해 먹을 쌀이 있는지 없는지, 남은 연탄은 몇 장인지까지 아는 친한 친구였다. 지나가는 말처럼 대학은 어쩔 거냐고 친구가 물었다. 난 단호하게 “대학 포기했다, 입학금도, 등록금도 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한참 후 친구가 조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네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한다.”
그러면서 친척 외삼촌에게 입학금을 빌려보겠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서라벌예대 방송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원경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그렇게 일찍(21세) 성우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연기의 기초를 그렇게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가 꽤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해서 이미 몇 번 배우 오디션을 쳐봤던 나는 당시 응시했던 성우시험에 떨어진 뒤 잔뜩 낙심하고 있었다.
내 연기에 얼마나 많은 문제점이 있었는지는 대학에 입학해서야 알았다. 이원경 선생님은 연기 전공생들에게 두 번째 수업시간까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중 한 대목을 외워 오라고 하셨다. 당시 동기생들 중엔 지방 출신이 많았다. 반면 서울 출신인 난 사투리도 쓰지 않고 목소리도 좋았으며 연기 공부도 오래 했다는 자만심에 차 있었다. 내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 일어서면서부터 멋지게 연기했다. 선생님이 깜짝 놀라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이 다음 친구를 시키셨다. 마지막 학생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이 나에게 일어나라 하셨다. 마침내 내 칭찬을 하시는구나 하며 기세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안 돼―.”
안 돼… 안 돼… 되되되에에… 환청이 느껴졌다.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멍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고, 반 친구들도 그렇게 날 부러워했는데…. ‘이 녀석아, 너같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녀석이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 하실 줄 알았던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안 된다’ 말은 사형선고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기술적인 흉내만 잘 낼 뿐 기초도 안돼 있고 겉멋만 부린다는 말씀이셨다. 그 후 난 몸종처럼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다정다감한 면이라고는 없으신 선생님은 늘 쌀쌀맞게 야단을 치셨다. 나중엔 무슨 말을 못할 정도로 주눅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말씀을 노트에 빼곡히 적었다. 방학 중엔 친구들을 모아 좋아하시는 양주를 사 가지고 선생님 댁으로 쳐들어가 공부를 하곤 했다.
2학년 막 올라간 그해 6월에 동양방송에서 성우 모집이 있었다. 시험 전날, 선생님께서 날 찾으셨다.
“넌 그동안 배운 대로만 하면 합격할 수 있다!”
그 말씀대로 시험에 합격한 나는 이후 무서운(?) 신인 성우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대학에 갈 수 있었겠는가. 또한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이원경 선생님 같은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삶에서 스승님과 친구는 내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이렇듯 40년 넘는 내 성우생활의 비하인드 스토리에는 고맙고 소중한 스승님과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 벤처 기업가 안철수 - 남이 보기에 좋은 삶에서 놓여나 새로운 출발…
안철수씨(45)는 의학박사 출신 벤처 기업가다. 88년 국내에서 처음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을 만든 후 7년간 새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치료 엔진을 무료 보급한 것이 계기가 돼 국내 정보보호산업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95년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해 10년간 경영하다 퇴임했고,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는 ‘영혼이 있는 승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등이 있다.
88년 초에 잡지를 보다가 브레인 바이러스라는 것이 한국에 상륙한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놈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게 됐다. 마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내 디스켓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당시 워낙 열심히 기계어를 공부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그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정체를 알 만해지니까 그것을 물리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잡지사에 전화를 걸었다.
“일전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관한 글을 쓴 사람입니다. 요즘 떠도는 브레인 바이러스의 분석이 끝났고, 그것을 치료할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잡지에 실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전화를 건 때로 말하자면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기는커녕 브레인 바이러스에 대한 분석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약속을 한 것은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부랴부랴 브레인 바이러스 분석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당시 의대 연구실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던 나는 퇴근 후에 밤새 분석하고 글을 쓰고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 ‘브레인’에 감염되는 일을 당한 후 이것을 퇴치하는 프로그램 ‘Vaccine’을 만들어 무상 제공한 것이 인생 진로를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대비책이 전무한 실정이어서 ‘Vaccine’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이후 발견되는 신종 바이러스는 모두 나에게 해결 요청이 들어왔다. 사명감도 들었고 보람도 느꼈기 때문에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6시까지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고, 출근해서는 하루 종일 의학 전공 일을 하는 힘든 생활을 7년 동안 계속했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고 군의관 복무를 마친 다음, 컴퓨터와 의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그 실마리는, 내가 그때까지 살아왔던 삶은 남이 보기에 좋은 삶이라는 데서 풀렸다.
서울의대 졸업, 20대 의학박사, 20대 의대교수로 이어지던 순탄한 과정은 남이 보기에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컴퓨터를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자부심, 보람, 사명감, 성취감 등은 느낄 수 없었다. 아직도 살아온 시간보다는 살아갈 날이 많은 시점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 현재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앞으로 해나갈 것이 많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14년간 공부한 의학을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
95년 3월 회사를 설립했을 당시 회사 규모가 구멍가게 수준이기도 했거니와, 우리 회사는 연구개발만 했지 마케팅 판매는 다른 회사가 전담했기 때문에 경영자로서의 고민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회사의 책임자로서 앞날을 생각하면 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지만 주식회사 형태의 연구소가 차려진 마당이니 사장으로서 경영을 알아야만 했다. 펜실베이니아대학의 EMTM 과정(일종의 테크노 MBA 과정)에 들어가, 그곳에서 배운 것을 회사 운영에 적용하는 가운데 스스로도 조금씩 경영학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됐다.
2005년 3월 창립 10주년 기념일을 기해 나는 회사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CEO 한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크면 회사가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임 후 나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학에서 몇 개 과목을 수강하며 경영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다. 1년의 준비 끝에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 지원해 합격했고 첫 학기에 전체 학생 중 상위 10%에 들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난 10년간 이것도 모른 채 경영을 해왔나’ 하는 생각에 아찔해지곤 한다. 공부를 마친 후 어떤 일을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돈이나 명예는 빼놓고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 위의 글들은 명사 23인이 쓴 에세이 모음집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미지박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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