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마침내 그렇게 된 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20대 청년 때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이제 정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시인 김용택(59)은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킨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했다. “20대에 품었던 꿈을 실현한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이냐”면서 “요즘 같은 세상에 나고 자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겠느냐”며 혼자 감동스러워한다고 했다.
섬진강이 굽이돌며 만나는 고만고만한 언덕배기 중 하나에 얹혀 있는 작은 동네, 전북 임실 섬진강변에서 태어나 59년째 같은 장소에서 살아오고 있는 그가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덕치초등학교의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쳐온 지는 38년째다.
지금의 일터이자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덕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옆 동네 순창으로 유학(?)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런 꿈이 없었고, 초등학교 선생이 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고 한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수백 마리의 오리를 길렀지만 얼마 안 돼 실패했고, 취직자리를 구하러 서울에 갔지만 딱히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집에 돌아와 놀고(?) 있던 당시,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초등교사 시험을 보게 돼 선생님이 됐다고.
“당시에는 교사가 모자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고 4개월 동안 교육을 시킨 후 교사로 내보내던 제도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몰두한 인생
그런 우연한 계기로 1970년 5월 고향 근처 청운초등학교 옥석분교에 발령받아 근무하게 된 그는 처음엔 코흘리개 아이들과 매일 매일을 보내야 하는 선생 노릇이 따분하고 싫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무료한 일상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후에 김용택 시인이 “인생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 중 하나”로 꼽는 그는 다름 아닌 월부 책장수. 책장수는 여섯 권짜리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사서 다 읽고 나면, 헤르만 헤세, 이어령, 박목월, 괴테, 니체 등의 책을 자꾸 가져와 그에게 팔아넘겼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내 인생이 바뀐 겁니다. 자그마한 책 속에 세상 속 온갖 인생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홀로 살더라도 넓은 세상의 다양한 삶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책 속에 있다고 깨닫자 인생이 새롭게 보였어요.”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이 바뀌자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진정 보람 있고 아름다운 일로 여겨졌다고 한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만원버스 탄 사람’의 예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만원버스를 탔는데 어서 자리에 앉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자리만 보이고 앉은 사람이 모두 적으로 보이겠지요. 다소 불편하지만 서서 가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다음부터는 창밖의 풍경이 눈에 보이고 버스에 탄 사람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할 수도 있게 됩니다. 스물대여섯 살에 나는, 불편하지만 서서 가면서 눈앞의 모든 걸 자세히 보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세상을 자세히 보고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자 눈비 내리고 안개 끼는 하루하루 다른 날씨와 그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과 들, 강물이 아름다웠고, 웃는 아이들부터 이웃의 농부들까지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세상을 자세히 살피다 보니 생각이 복잡해졌고, 복잡한 생각은 정리를 해야 했기에 글을 쓰고 시를 썼다. 1982년에 시 ‘섬진강’을 발표해 등단한 김용택 시인은 이후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펴내면서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조금씩 유명해졌다. 하지만 유명한 시인이 됐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다. 언제나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아이들을 가르칠 것’을 소망하며 살아왔다는 그는 이제 그 소망을 거의 이룬 셈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는 노총각 시인 김용택은 그의 나이 37세 때 열네 살이나 어린 아내 이은영씨(45)를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후 탈상 때, 동생의 대학 친구들이 왔는데 그중에 지금의 아내가 있었다. 그 후 동생 졸업식 때 한 번 더 본 그 아가씨는 어느 날 밤 혼자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때 이미 그 사람은 ‘나는 저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자기 혼자 결정했대요. 나 참, 기가 막혀서…(웃음).”
아가씨가 늦은 시간에 혼자 사는 남자 집에 왜 왔느냐며 야단쳐서 돌려보냈지만 계속 찾아오던 그 아가씨는 어느 날 “여기서 같이 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아내는 그 이후에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로 그때 자신이 한 프러포즈를 꼽는다고 한다.
“이벤트는커녕 기념일조차 챙겨본 적이 없어요. 아내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결혼기념일이라고 따로 뭘 해본 적도 없어요. 평상시에 서로의 일상을 존중하며 삽니다. 저는 아내가 제게 이렇게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없어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있는데 충족이 안 되면 그때부터 원망이 쌓이고 싸움이 시작되잖아요.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바라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사는 게 많이 편합니다.”
김용택 시인은 아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가족이야기뿐 아니라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주제로 대화한다고. 물론 그중에서 시인의 주된 주제는 학교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다. 오늘은 어떤 아이가 무슨 책을 읽었고, 다른 아이는 무슨 일로 꾸지람을 들었는지 워낙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는지라 어쩌다 학교에 들르는 부인 이은영씨는 사진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들인데도 ‘얘가 바로 아무개’라고 알아맞힐 정도라고 한다.
자신의 모교인 전북 임실 덕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용택 시인은 올해로 교사생활 38년째를 맞는다.
전남 담양군에서 대안학교를 나온 큰아들 민세는 요리사가 되겠다며 미국에 공부하러 갔고 딸 민해는 고3이 된다. 아들이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걱정도 됐지만 아들은 지금 “요리는 다양하고 재미있게 인생을 살 수 있는 멋진 길”이라며 무척 즐거워한다고.
“아버지가 쓰는 시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 요리라고, 아들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무슨 일을 하든 자식들이 세상과 관계 맺으며 그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란다는 김용택 시인은 매일 아들과 딸에게 시와 사설, 좋은 글을 한 편씩 뽑아 이메일로 보낸다고 한다.
“저희 아이들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삶’이 아닌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인생을 살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부도덕과 부조리에 관심을 갖고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려고 노력하는 삶만이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눈앞의 이익 추구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태환경 파괴되는 현실 안타까워
자연과 아이들에 대한 시를 쓰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살고 있으리라 짐작하기 쉬운데 사실 김용택 시인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진실을 외치고 경고하는 것이 시인의 직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최근에 펴낸 ‘나무처럼 사랑하라’에는 ‘자연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시대’에 대한 분노가 진하게 배어 있다. 오랫동안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맡아오고 있기도 한 시인은 언젠가부터 섬진강 주변 생태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눈앞의 이익에만 열중한 사람들이 자꾸 강에 둑을 쌓고 물길을 바꾸면서 섬진강의 자정능력이 떨어졌다는 것.
“섬진강 하동 쪽 백사장이 80리나 됐는데 거의 다 없어졌어요. 하동 화개에도 아주 깨끗하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있었는데 교각을 세우는 바람에 한순간에 사라졌고요. 수천 년 걸려 만들어진 강의 생태계를 포클레인이 한꺼번에 긁어가버리니 끔찍한 일 아닙니까?”
전교생이 39명인 덕치초등학교는 마을과 학교를 하나의 생태 공간으로 묶어 보존하려는, 그의 환경운동 프로젝트의 중심이다. 지난해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농촌체험학교에는 현재 서울 아이들 10명이 전학 와 1년간 생활하며 그로부터 독서와 글쓰기를 배우고 있다.
“도시 학생들에게 자연체험의 기회를 주고 시골 학교를 살리기 위한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인 자연의 품 안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경험하는 것이 아이들의 감성이나 정서를 살찌우겠죠. 사람들이 자연친화적이고 문화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꿈꾸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 오랜 세월 아이들 앞에 서지 못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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