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인(54)은 요즘 바쁘다. MBC 드라마 ‘주몽’과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본업인 연기로 주목받고 있는 데다 각종 오락 프로그램 패널로도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CF도 찍었고, 지난 11월 중순에는 생애 첫 팬미팅까지 가졌다. 어린이부터 60, 70대 팬까지 두루 참석한 팬미팅 행사장에서 ‘주몽’ ‘모팔모’의 상징인 강철검으로 케이크를 자르던 이계인은 끝내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도 주연 맡을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처럼 조연으로 연기생활을 마감하겠죠. 그런데도 이렇게 사랑받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서….”
그의 굵은 눈물방울과, 쑥스러운 듯 씩 웃을 때 눈가에 깊게 잡히는 주름은 사람 냄새를 물씬 풍겼다. 이계인이 인기를 모으는 이유는 바로 이런 투박함 속에 묻어나는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지금껏 이계인은 주로 모질고 풍파를 많이 겪은 인물을 연기해 왔다. 아직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MBC ‘수사반장’의 각종 범인 역, ‘전원일기’의 노마 아빠 역은 사람들이 그를 ‘굴곡 많은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실 데뷔 초기 그는 ‘잘나갔다’고 한다. 72년 1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MBC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고. 고두심, 박정수 등 쟁쟁한 동기 사이에서 가장 먼저 주연을 따냈고, 당시 ‘국민 드라마’라 불릴 만큼 큰 사랑을 받던 MBC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각종 악역을 도맡으며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의 ‘지명도’를 누렸다.
“사실 그때 사람들이 알아본 걸 인기라고 하긴 좀 그렇죠. 주로 저를 보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으니까요(웃음). ‘수사반장’에서 사형수만 30번 이상 연기한 것 같아요. 무기수도 20번 넘게 했고요. 희대의 강력사건 범인 역은 다 제가 맡았죠. 한번은 식당에 갔는데 주방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가 다짜고짜 절 붙잡고 때리시더라고요. ‘이놈, 내가 너는 꼭 잡는다’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옷이 다 찢어질 때까지 맞고만 있었어요.”
77년엔 일일드라마 ‘당신’으로 MBC 연기대상 조연상도 받았다. 그는 방송에서의 인기를 발판삼아 영화계에서도 주목받는 배우로 활동했다고 한다. 유지인, 원미경, 이미숙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과 짝을 이뤄 ‘가시를 삼킨 장미’ ‘내가 버린 여자’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그 가운데 ‘내가 버린 여자’는 70년대 최고 흥행 영화 3위에 올랐을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는 정말 세상에서 제가 가장 잘난 줄 알았어요. 할리우드에서 권투영화 출연 제의까지 받았으니까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죠. 연기생활 5년 만에 선배들을 제치고 MBC 조연상을 받았을 때는 감격에 겨워 ‘곧 연기대상도 받겠다’고 공언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 상이 지금까지 제가 연기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상입니다.”
성공이 빨랐던 만큼, 추락도 급속도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 출연 논의는 최종 단계에서 무산됐고, 연습시간에 자주 늦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다는 소문이 나면서 캐스팅 제의도 끊겼다. 84년 그가 권투선수 김득구 역을 맡은 영화 ‘울지 않는 호랑이’가 흥행에 실패한 뒤, 이계인은 4년 동안 ‘백수’로 살아야 했다.
“간간이 조연 섭외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주연도 맡아본 지라 거절을 했어요. 체면 차리느라 수입도 없으면서 차를 끌고 다녔죠. 서른 넘은 나이에 부모 용돈 받아 생활하는 처지가 얼마나 처량하던지, 제가 2남4녀 중 막내인데 그때 불효를 참 많이 저지른 것 같아요.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며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댈 때마다 어머니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거다’ ‘다 용서하라’며 절 다독이곤 하셨죠.”
여러 번의 사기사건으로 많은 아픔 겪었지만 아내 사랑으로 마음의 평화 얻어
그를 다시 연기자의 길로 이끈 건 MBC ‘전원일기’였다. 이계인은 이 드라마에서 부인이 집을 나간 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노마 아빠’ 역을 맡아 많은 이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원일기’ 열성팬이던 어머니는 아들이 이 드라마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게 된 걸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처음엔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연기를 할 수록 생각보다 더 큰 사랑을 받게 돼 행복했고요. 80년대에 시작해서 2002년 작품이 끝날 때까지 거의 20년을 ‘노마 아빠’로 살았는데, 일년에 몇 번씩은 꼭 노마 아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만들어졌을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어요. 김장철이 되면 저희 집엔 불쌍한 노마 아빠 먹이고 싶다며 전국에서 보내온 김치가 가득 쌓였죠.”
지난 11월 중순 열린 이계인의 생애 첫 팬미팅 모습.
한번은 ‘전원일기’ 방영 1천 회 기념으로 청와대에 초청받았는데, 당시 대통령 부인이던 이희호 여사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아유, 나 이이만 보면 늘 안타까워. 이제 다시 좋은 가정 꾸미는 거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주로 굴곡진 인생을 사는 인상 깊은 조역을 맡아 연기하기 시작했다.
“MBC 드라마 ‘종합병원’에 한 회 특별 출연한 적이 있어요. 부인이 병원에서 막 죽은 홀아비 역할이었죠. 부인의 죽음을 확인한 뒤 어린 딸을 데리고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우는 연기를 했는데, 그걸 보고는 ‘종합병원’을 쓴 최완규 작가가 그랬대요. ‘내가 별의별 연기를 다 봤지만, 이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라고요. 그게 인연이 돼 이번에 ‘주몽’을 할 때도 또 만나게 됐어요.”
이계인이 ‘주몽’에서 연기하는 모팔모도 여자와는 인연이 없다. 그는 “대본을 보니 ‘신녀로부터 사주에 여자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자조적인 표정을 짓는 모팔모’라고 쓰여 있더라. 그 부분을 연기하려는 순간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왔다”며 “PD가 바로 ‘컷’을 외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눈물을 쏟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팔모가 겉으로는 까불지만, 자긴들 왜 아픔이 없겠어요. 그 외로움이 절절하게 전해진 거죠. 제가 그런 팔자인가봐요. 누군가의 아픔을 보면 제 속으로도 그게 사무쳐요.”
이계인이 이처럼 배역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명할 수 있는 건, 그 역시도 순탄치만은 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갓 스무 살의 나이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얼굴이 알려진 탓에 숱한 사기를 당했다고.
“젊은 시절 귀가 얇았거든요. 어릴 때 데뷔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쉽게 믿었죠. 욕심도 부린 게 사실이고요. 주위 얘기만 믿고 여기저기 투자했다가 돈을 잃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요즘 CF를 찍으니 사람들이 ‘돈 좀 벌겠구나’ 하는데, 지금껏 제가 잃어버린 돈의 10분의 1도 아직 못 벌었습니다. 지금도 간혹 여기저기서 ‘투자하라’는 제안이 오지만, 이젠 아예 귀를 닫아버렸죠. 단 돈 만원이라도 욕심을 부리면 더 큰 화로 돌아온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는 마흔이 넘어 뒤늦게 결혼을 했지만 곧 헤어지고 말았다.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일로 인생의 황금기를 분하고 억울한 마음으로 허송세월해야 했어요. 그러다 97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그의 곁을 든든히 지켜준 아내는 이계인보다 열 살 연하라고 한다. 하지만 “나이는 어려도 어른스러워서 늘 큰 힘이 돼준다”고. 첫 번째 결혼 실패 이후 가정생활을 밖으로 얘기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아내에 대해 묻자 “시간 날 때면 시장 가서 꽃게 한 마리 사다가 삶아놓고, 같이 소줏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해요. 그럴 때가 제일 행복하죠. 아, 사람 사는 게 그 이상 뭐 있소?” 하며 쑥스럽게 웃기만 했다.
“칼 구스타프 융이 쓴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나는 많은 남자들을 믿었다. 그들은 나를 배신했다. 나는 많은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요. 이걸 읽는 순간 ‘바로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 나를 배반할 수 없어요. 내가 배신당하고, 상처 입은 건 그들을 믿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금껏 저를 괴롭힌 모두 시련이 ‘남의 탓’이 아니라 바로 ‘제 탓’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어요. 세상을 원망하지 않게 되니 마음이 평화로워졌죠.”
5년 전 경기도 남양주시에 마련한 전원주택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보물 1호라고 한다. 남양주는 그가 ‘전원일기’ 촬영을 위해 10여 년간 드나들던 곳. 산과 강이 마음에 들어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며칠씩 훌쩍 낚시 여행을 떠나기도 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렇게 다니며 눈에 익은 곳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은퇴 후 머물기 위한 작은 집을 한 채 샀다고. 텃밭을 고르고 과일나무도 심어 제법 농가 분위기가 나게 꾸민 이곳이 이계인에게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한다.
“보물 1호는 노후 대책으로 마련한 경기도 남양주 전원주택”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면 무조건 내려가요. 그 집에 내려가 강을 보고 앉으면 ‘그래, 내가 좀 지면 다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하는 여유가 생기죠. 참 이상한 게 서울에서는 그게 안된다는 거예요. ‘왜 내가 지고 들어가야 하지?’ 하는 생각에 열부터 나니까요. 얼마 전에도 지인이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 영향이 저에게까지 미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적이 있어요. 참 속상하고 억울했는데, 남양주 집에 내려가니 그 모든 마음이 눈 녹듯 풀어지더라고요. 한강 수질보호구역 안에 있어서 재산 가치는 거의 없고, 그걸 살 때도 사기를 당해 돈을 많이 날렸지만(웃음), 그래도 이렇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니 손해는 면한 것 아닌가요?”
그래서 이계인은 틈날 때마다 혼자 차를 몰고 남양주에 내려간다고 한다. 일주일에 세 번을 가도 갈 때마다 소풍 가는 아이처럼 마음이 설렌다고.
“모팔모 역으로 사랑받게 된 것도 아마 남양주를 오가며 욕심을 버렸기 때문일 거예요. 한번 튀어보려고 연기에 힘을 줬다면 오히려 외면당했겠죠. 하지만 이젠 그런 마음이 없어요. 이 역을 맡으면서 그동안 제가 느낀 아픔, 기쁨 같은 걸 자연스럽게 풀어내야겠다는 생각만 했죠. 모팔모가 주몽을 위해 헌신하듯, 제 모든 걸 바쳐 연기하겠다고요. 그렇게 시작한 역으로 큰 사랑을 받게 돼 정말 행복합니다.”
그는 지금의 인기가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연기자는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는 존재”라고도 했다. 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건, 명성이나 인기보다는 연기 그 자체를 사랑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기 때문이라고.
강철은 불 속에서 단련된다고 한다. 펄펄 끓는 불 속에서 단련된 강철검을 만드는 ‘모팔모’ 이계인이 여러 시련 속에서 단련시킨 삶의 연기를 더 오래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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