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정의 시작 - 길 위에서 서로를 알아보다
화가 김점선(60)과 디자이너 이광희(54)가 함께 전시회를 연다?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김점선-자유로운 복장에 스니커즈를 신고 다니며 말과 꽃을 주로 그리는 화가-과, 우리가 아는 이광희-조용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우아한 여성복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선뜻 매치되지 않는다.
기자 : 두 분이 어떻게 처음 만나셨어요? 김점선 : 길에서 봤지, 뭐.
기자 : 정말요? 이광희 : 하하, 인생이 다 길 위에 있잖아요. (김점선 화백을 보며) 그쵸?!
별로 닮은 게 없는 거 같은데 죽이 잘 맞는 두 사람. 중간 중간 터지는 웃음 때문에 숨을 고르느라 시간이 부족했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김점선과 이광희는 5년 전 이광희의 남산 의상실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의 의상실 지하에서 전시회를 자주 열었는데 당시 그룹전에 참여한 작가 중 한사람이 김점선이었다고.
“5년 전쯤 이 건물 밑에 갤러리에서 그룹 초대전을 했어요. 그룹전에 작품을 출품하고 앉아 있는데 잘 보니까 이 집이 내 친구 김방옥(동국대 연극과 교수)네 집이야. 한때 나한테 우리집 다음으로 익숙한 집이었거든. 그래서 얘(이광희)한테 물었죠. ‘방옥이 집 같은데…’ 그러니까 얘가 맞대. 김방옥네 집을 이광희가 산 거예요.”(김점선, 이하 김)
“전 처음 봤을 때부터 예사분이 아니구나 싶었죠.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굉장히 깊이 있고 해박하신 분이라고 느꼈어요.”(이광희, 이하 이)
우연히 인연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다리가 돼준 친구들이 많다보니 자연히 인연의 끈도 길어지게 됐다고.
“중간에 친한 친구가 많아요. 자주 만나지 않아도 얘(이광희) 옷을 입는 내 친구들이 많아서 소식을 전해 듣게 되거든.”(김)
그러나 인연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나 끌림 역시 필요하다. 두 사람이 말하는 서로의 매력은 뭘까.
#2 우정의 조건 - 다른 듯 닮은 것들, 우정의 촉매제에 대하여
“옷을 잘하잖아요. 난 모든 게 평면이에요. 캔버스가 2차원이다보니 평면적인 구조나 색감에 머무르는데 옷이라는 건 3차원적인 거잖아요. 얘는 내가 매력을 못 느끼는 밋밋한 헝겊을 굉장히 매력 있게 만들어요. 그런 구조적인 구축력이 있다는 건 우리가 인정하죠. 인간적인 매력? 난 뭘 하나 잘하면 인간적인 건 관심을 안 가져. 일만 잘하면 다 좋아. 그게 전부야(웃음). 사람은 직감으로 느끼는 거지…”(김)
“저 혼자 5년을 짝사랑했어요(웃음). 선생님은 뭐, 인간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존경할 만한 분이죠. 환갑이 넘었는데도 활력이 넘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고요. 그에 더해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겉모습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계속 찾아야 돼요. 자유롭고 아무 제약이 없는 듯 보이지만, 선생님 나름의 철학이나 기본원칙이 확고하세요. 그런 것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들을 초월한 자유인이 되신 거죠.”(이)
“얘가 왜 이렇게 추상적으로 얘기해.”(김) “진짜잖아~하하.”(이)
닮은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잘 찾아보면 공통점은 한두 개 발견되기 마련. 그리고 어떤 것들은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모두 2남3녀 중 둘째 딸이라고 한다.
“우리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두 아들이 있고, 딸이라면 위에 귀여운 언니가 이미 하나 있고, 막내는 막내딸이니까 예뻐하고. 아마 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무의식중에 언니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 같아요.”(김)
“글쎄요. 저는, 경쟁심리라기보다는… 존재감이 없었어요.(웃음) 아니, 주목을 못 받을 뿐 아니라 외모에 콤플렉스도 있었어요. 언니와 동생이 정말 예쁘거든요. 전 코도 낮고, 귀도 당나귀 귀고 심지어 손도 안 예뻐서 누가 볼까봐 감추고 있고… 코 얘기만 나와도 귓등이 빨개졌고 귀는 아예 못 내밀고…(웃음).”(이)
“니네 언니 비비안 리? 동생은 엘리자베스 테일러?(폭소)”(김)
하지만 둘째라는 포지션, 태생적인 결핍(?!)이 때론 성장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김점선과 이광희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실은 우리집도 그랬어요. 손님이 집에 방문하면, ‘아유 첫째 딸이 예쁘네요, 그리고 둘째 딸인 나는 통과, 다시 셋째에게 가서는 이 딸도 참 예쁘네요~’(웃음). 왜 같은 엄마 아버지가 낳았는데 언니와 동생은 그렇게 예쁘고 나는 그렇지 못할까, 어떤 것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그 존재 자체로 칭찬을 받는데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그 존재들 때문에 되레 상처를 받을까, 태생적으로 혜택을 받은 적들을 어떻게 하면 물리치고 나도 각광을 받아보나, 어떻게 하면 엄마 아버지가 나 때문에 즐거워할까. 결국 독하게 공부해서 성적도 특출나게 나오고, 언니가 로맨스 소설로 책장을 채우면 난 보통 여중생이 읽지 못하는 철학책으로 꽉 채우는 거죠. 창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지. 엄청 반항적이기도 했고… 밤을 새우면서 공부한 시절도 있었지만 하루 종일 소설책만 끼고 산 적도 많아요.”(김)
“둘째는 관심을 받지 못해서 웬만큼 반항해서는 알아주지 않거든요(웃음). 제 경우는 고등학교 때가 가장 갈등을 겪은 시기였어요. 김 선생님과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공부할 땐 정말 열심히 하다가도 시험 볼 때 공부를 하나도 안 하면 어떻게 될까 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시험을 친다거나 어른들이 가식적으로 보이고 말이 갖는 허무감 같은 것 때문에 일주일을 말 안 하고 필담을 나누면서 산 적도 있어요. 게다가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대학에 안 가겠다고 해서 부모님 속을 좀 썩였죠. 아, 고3때 늦바람이 나서 수업 한 시간씩 빼먹고 늦게 버스를 탔는데 그때 항상 저랑 같이 타는 다른 학교 아이가 하나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희은이었어요. 양희은(웃음).”(이)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는 현재 하고 있는 일과 무관한 전공을 공부했다. 김점선은 이화여대 시청각교육학과를, 이광희는 같은 대학의 비서학과를 졸업했다. 김점선의 표현에 따르면 두 사람은 “대학에서 배운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입증하는 증거”인 셈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화가는 가난하고 게으른 사람이 하는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해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통역사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선본 남자와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면서 친한 다섯 명에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같이 죽자고 하더라고요. 다들 머뭇거리는데 난 그러겠노라 했죠. 난 당시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거든요. 그때 그 친구가 내일 죽더라도 이 생에 태어나서 못한 거가 뭔지 생각해보고 발표한 다음 죽자고 했는데, 난 진짜 걔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녁밥을 먹고 잠자리에 누워서 내가 못해서 정말 아쉬운 게 뭘까 생각하니까, 그림이 떠올라요. 그래서 다음날 미술학원에 등록했죠. 그림을 그려보고 이것도 별로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물론 그 친구들도, 나도 아직 안 죽었지(웃음).”(김)
“저는 대학 안 가겠다고 우기다가 비서학과에 들어가긴 했는데 타이핑 치는 게 싫어서 비서는 못하겠더라고요. 디자이너가 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디자이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의외로 단순해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한 다음에는 잔신경 안 쓰고 몰두했고, 결국 이렇게 된 거죠(웃음).”(이)
“그래 맞아요. 우리 둘 다 결단을 내리면 잔생각 안 하고 쫙~해버려. 단순하게. 둘 다 단세포야, 단세포 아줌마(웃음).”(김)
#3 우정의 결실 - 이광희 창립 20주년 기념 전시회
지난 11월14~16일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열린 이광희 부띠끄 창립 20주년 전시회 모습.
이광희는 지난 11월14~16일 사흘 동안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창립 20주년 전시회를 가졌다. 디자이너 이광희의 20년 디자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번 전시에서 김점선은 전시장 연출에 참여한 것은 물론 이광희의 옷에 자신의 그림을 그려넣어 함께 작품을 탄생시켰다. 준비기간이 부족했던 탓에 전시를 망설이던 이광희를 부추겼던 이 역시 김점선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전시회라는 명칭이에요. 우리나라에서 패션디자이너가 패션쇼가 아닌 전시회를 하는 건 이광희가 처음이거든요. 우리나라도 패션을 예술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무지 반가웠는데 얘는 할까 말까 고민하더라고. 그래서 막 하라고 압력을 넣었죠. 그랬더니 며칠 뒤에 연락이 왔어요. 그림 그리러 오라고.”(김)
왜 혼자가 아닌, 김점선과 함께 작업을 했는지 묻자 이광희는 “옷과 디자이너의 20년간 역사만을 보여주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면서 “대중에게 새로운 문화와 예술을 제시하고 싶었는데 김점선 선생님의 스타일이 그에 맞는 것 같았다”고 답한다.
백화점 측에서 10월 말에 전시회를 제의받은 뒤 11월 중순 전시회를 열기까지 연일 새벽작업을 해서 전시를 준비했다고 한다. 특히 이광희와 김점선이 함께 참여한 의상 전시를 위해 김점선은 사흘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광희의 의상실에 붙박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광희는 김점선의 그림이 그려진 천으로 의상작품 12점을 만들었다. 이광희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고 말한다. 디자이너 생활 20년 동안 요 근래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을 정도.
“물론 누군가를 위해 옷을 만들고, 입히는 것은 행복한 일이에요. 하지만 전시를 위해서 자유롭게 옷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덕분에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 들어요. 마치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는 느낌이랄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에요.”(이)
그런데 이 옷들은 입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세탁을 하면 그림이 지워지진 않을까. 자유롭게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에만 집중했지 옷의 실용성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두 사람은 모두 “몰라~”로 일관한다.
“사람들이 작업장에 와서 구경을 하다가 ‘그럼 이걸 빨면 어떻게 돼?’ 그러면 우린 ‘몰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 사람들은 옷을 입는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이 옷들은 그런 것에서 자유롭게 만들었어요. 그런 계획 없이 자유롭게 만드니까 얼마나 좋아요. 몰라~(웃음).”(김)
마지막으로 육체적으로는 고되지만 “즐거운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으는 두 사람에게 앞으로도 이런 전시를 열 계획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두사람이 웃으며 입을 모은다. “하하하하, 몰라~”
이광희 창립 2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전시된 작품들은 11월 말부터 12월24일까지 남산에 위치한 이광희 부띠끄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문의 02-792-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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