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변호사. 가장 풍부하고 예민한 감성을 요구하는 피아노와 가장 냉정한 이성을 요구하는 변호사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부조화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로 서울대 음대를 다니다가 서울대 법대로 옮겨 사법시험에 합격, 변호사의 길을 걷는 여성이 있다. 그것도 임파선암이라는 극한을 딛고.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피아노 치는 변호사, Next’를 펴낸 화제의 주인공 박지영 변호사(34)를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고 있는 서울 서초동 다해원을 찾았다. 그가 겪었을 힘들었던 지난날이 그려지지 않을 만큼 그는 봄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다해원은 누구나 와서 차를 마시거나 세미나, 작은 모임을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피아노 치는 변호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에요. 사람들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변호사와 피아노란 조합이 재미있다’고 하지만 거기엔 다시 겪으라면 이 세상 끝까지 도망쳐서라도 피하고 싶을 정도로 아프고 쓰린 제 삶의 구석들이 담겨 있어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그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뒤에도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에 다니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 열아홉 살에 암에 걸리면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서울대 음대 피아노과를 지원했다가 떨어져 재수를 하고 있던 89년 5월, 임파선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
“공부도 피아노도 불합격할 만한 모자람이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막상 떨어지니까 몸도 마음도 무척 힘이 들었어요. 오후가 되면 좁은 학원 교실이 답답해서였는지 땀이 많이 나고 숨 쉬는 것도 버거웠어요. 피아노를 쳐서 항상 아프던 어깨도 더 아픈 것 같았죠. 저는 제가 나태해진 거라고 생각해 아파트 11층을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자신과 싸웠어요. 그런데 그렇게 싸운다고 될 일이 아니었어요.”
그는 처음엔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그저 피아노 연습을 못하는 것만 걱정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그런 걱정을 하게 놔둘 만큼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주간의 혹독한 검사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는 점점 예전의 모습을 잃어갔다.
“항암치료를 받고 나면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요. 처음엔 자존심 때문에 병원에서 약을 타거나 대기하는 동안 이를 악물고 앉아 있었는데, 나중엔 의자 서너 개를 차지하고 누워버렸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를 내려다보았지만 그 시선을 신경 쓸 기운조차 없었어요.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았죠.”
까닭 모를 분노로 입을 굳게 닫고 있는 그에게 가족들이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프냐”고 물어오면, 그는 다시는 그 말을 하지 못하게 “어디라고 말할 수도 없이 머리카락 한올한올까지 다 아프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치료가 계속되면서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면서는 그 말도 못하게 되었다고.
열아홉 살에 받은 암선고 식이요법으로 극복
“언제 끝날지 그 끝이 무엇일지 힌트라도 있다면 견디기가 한결 수월했을 거예요. 설명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다양한 부작용들이 나타날 때마다 이번엔 또 뭔가 하며 허둥거려야 했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있을 것인가, 공부를 다시 해서 대입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인가는 호사스러운 질문이었어요.”
6회에 걸친 항암치료 결과 의료진은 현재의 약이 그에게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새로운 약으로 바꾸어 치료를 시작했다. 그런데 새로운 약은 극심한 근육통을 동반해 밤새도록 그를 괴롭혔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어요. 어차피 더 물러날 곳도 없고 시달릴 만큼 시달렸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고 생각하고 항암치료를 중단했어요. 부모님도 말리지 않으셨죠. 사실, 정말 두렵고 무서웠지만 병원을 가도, 병원을 가지 않아도 어두운 터널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라면 설령 그 터널 한복판에서 인생이 멈춘다 해도 적어도 저 자신이 선택한 일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 그는 일본을 다녀오면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했던 자연식의 효능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자기 몸의 자생력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에 신경을 쓰며 철저하고 처절한 싸움을 한 끝에 마침내 완치가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어떻게 해서 나았냐’고 물어보는데, 특별히 할 말이 없어요. 저도 정확한 것을 알 수가 없는데다 섣불리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암환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쉽게 지나칠 수가 없어요. 누가 ‘뭐가 좋다’고 한마디만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떻게든 그것을 구하려고 애써요. 모르면 몰랐지, 그런 말을 듣고서 안 해볼 수가 없는 거예요. 저도 그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가 힘들어요.”
식이요법을 하는 동안 그가 먹은 음식의 종류는 상당히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통밀, 현미, 검은깨 등을 주로 먹었다고. 그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까지 같이 고생을 했다며 미안해했다. 당시 성악을 전공하던 언니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만큼 잘 먹어야 했지만 마음 편히 고기를 못 먹었다고 한다.
“언니는 저 잘 때 문을 꼭 닫고 몰래 고기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한번은 언니가 라면을 먹는 걸 보니까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딱 한 가닥을 먹었는데 그게 목 아래에서 더 이상 넘어가질 않아 결국 손가락을 넣고 토해내야 했어요. 언니가 ‘내가 미쳤지. 밖에서 사먹고 왔어야 하는 것을’ 하면서 자책하는데 제가 더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어요.”
항암치료의 부작용에서 벗어나면서 조금씩 기운을 차린 그는 집에 있는 낡은 영어사전을 펼쳐 중요 단어 순으로 노트에 옮겨 적는 것부터 시작해 대학입시 준비를 했다고 한다.
“피아노 연습은 도저히 몸이 따라주질 않았어요. 그래서 피아노는 포기하고, 대신 음악 근처에라도 머물고 싶은 마음에 서울대 음대 작곡이론과에 지원하기로 하고 가까운 학원에 등록도 했어요. 학원에 처음 가던 날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요. 초등학교 입학할 때 같은 흥분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는 세상에 다시 적응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지만, 언제나 처음처럼만 하면 될 거라는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견뎌냈다고 한다. 몸이 시키는 대로 쉬라면 쉬고 조금 괜찮다고 하면 다시 공부한 끝에 90년 서울대 음대 작곡이론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남들은 병 낫고 좋은 대학 들어갔으니 무슨 걱정이 있냐고 했지만 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어요. 하루를 살든 30년을 살든 한정되어 있는 삶 동안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를 졸업해야 할 시점,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목표는 정했지만 그 방법을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그에게 봉사활동을 함께 하던 사람이 “사법시험에 도전해보라”고 권했다. 당시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자세히 몰랐지만 그에겐 밝은 빛이 되었다고 한다.
“뭘 하기 위해 출발선에 섰다는 사실이 그토록 감사할 수가 없었어요. 벅차오르는 기대로 세상이 달라 보였죠. 햇살도 바람도 모든 것이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어요. 빈손이어도 상관없고 외로워도 괜찮았어요. 꿈이 있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신이 났으니까요.”
음대를 졸업한 95년 여름 그는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다. 그 후 3년을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일을 반복한 끝에 98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 3학년으로 편입해 공부한 끝에 2000년 최종합격을 했다.
박지영 변호사는 나눔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문화공간 다해원을 운영하며 무료법률상담도 하고 있다.
그의 책 제목엔 ‘Next’란 꼬리표가 붙어 있다. 그 이유를 묻자 “‘피아노 치는 변호사’로 끝나면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대요’ 하는 뜬구름 잡는 동화가 되는 것 같아서였다”고 말한다.
“암 투병을 하다 완치된 사람들은 그 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선 침묵해요. 현재 우리나라에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35만 명이에요. 그분들에게는 완치한 이후 건강한 삶을 어떻게 영위하며 살 것인가에 관해 역할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항암치료를 받으며 가장 힘들 때 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세계적인 테너 호세 카레라스의 콘서트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콘서트는 호세 카레라스가 백혈병이 완치된 후 연 첫 번째 재기 콘서트였던 것. 그는 그때 자신도 호세 카레라스처럼 나을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해 보증을 받은 것처럼 떨림과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얼마 전 제가 아팠던 때와 비슷한 나이에 저와 비슷한 종류의 병을 앓으며 치료 중인 한 여학생이 저로 인해 힘과 용기를 얻었다며 이메일을 보냈어요. 그 친구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또 무언가를 했다가 이루지도 못하고 오히려 몸만 나빠지는 건 아닐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저로 인해 희망을 가졌대요. 그걸 읽으며 비로소 제가 겪었던 고난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았죠.”
호세 카레라스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도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그의 ‘Next’인 셈이다.
그는 지금도 항상 자신에게 ‘변호사가 된 게 어쨌다는 거지’ ‘변호사가 피아노를 치는 게 어쨌다는 거지’ ‘그 변호사가 옛날에 팔짝 뛰게 아팠다는 게 어쨌다는 거지’ 하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그래서 더 잘하려고’ ‘그래서 더 고마워하려고’ ‘그 다음에 더 열심히 살려고’라고 대답해 본다고.
“결혼은 언제 하냐”고 묻자 “남들이 못해본 것을 너무 많이 해봤는데 남들 다 하는 것까지 한다면 너무 큰 욕심 아니냐”며 웃는다. 그는 “언젠간 하겠죠”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있어 결혼은 ‘사치’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건강을 찾은 지금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그를 보면서 ‘인생에 의미 없는 순간은 단 1분도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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