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하고 섹시할 것 같으면서도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을 한꺼번에 가진 배우는 많지 않다. 솔직한 체하면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교묘하게 상품화하는 여배우들이 난무하는 요즘, 예지원(32)은 이와는 무척 다른 지점에 서 있는 묘한 배우다. 굉장히 야한 연기를 전혀 야하지 않다는 투로 천연덕스럽게 연기함으로써 당혹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것.
지난해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통해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윤락녀로 출연, 영화 촬영을 불허하는 국회를 월담하며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했던 예지원이 이번에는 영화 ‘귀여워’에서 배다른 세 형제와 아버지의 사랑을 두루 받아주는 여자 ‘순이’로 등장한다. 순이는 철거 직전의 서울 황학동 아파트를 배경으로 퀵서비스맨인 장남 ‘963(김석훈)’, 견인차 운전사인 둘째 ‘개코(선우)’, 조폭인 막내 ‘뭐시기(정재영)’, 박수무당인 아버지 ‘장수로(장선우)’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애정행각을 벌인다.
-실제 보니 얼굴이 아주 작네요.
“제 얼굴이 화면에서는 좀 커 보여요. 얼굴이 평면적이라 그럴 거예요. 클로즈업할 땐 얼굴이 스크린에 꽉 차니까 더 그렇죠.”
-영화 속에서 순이가 “모든 남자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는데, 동의하나요.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죠. 만약 솔직하게 얘기할 경우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아웃’될 수도 있으니까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열 여자 싫어하는 남자’ 없다고 하잖아요.”
-한 여자가 모든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사랑이 꼭 성적(性的)인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많은 남자들이 나를 사랑해주면 좋은 거죠.”
-영화 ‘귀여워’에서 한 여자, 순이를 사랑하는 네 남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남자들은 연애할 때는 여자 대신 불 속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하다가도 결혼하면 변한다고 하잖아요. 이번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도 그래요. 삶 자체가 무방비 상태인데다가 응석받이고 유치하고 신경질적이죠. 하지만 순이를 만나면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용서하게 되죠.”
-한 여자가 가족인 네 남자와 사랑을 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데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저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싶었는데, 요즘 보면 현실이 더 영화 같은 경우도 많더라고요.”
-패륜 아닌가요.
“아니요. 이 영화는 속으로 들어가서 볼 때와 한 걸음 떨어져 볼 때가 많이 달라요. 도덕과 패륜의 구분도 그런 거 같아요. 우리가 정해놓은 선을 도덕이라고 하고 거기서 어긋나면 패륜이라고 하죠. 하지만 ‘귀여워’의 가족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틀 속에 살고 있어요. 그들은 사회에 길들여져 있지 않죠.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도 못하고 사회와 타협하는 법도 몰라요. 모두 소외되어 있지만 ‘나쁜 놈’은 하나도 없어요. 순이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정말 ‘귀엽지’ 않나요?”
예지원은 처음 보는 사람과는 아주 친해지기 전까지 말도 편하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순이는 ‘대자연의 어머니’인가요? 상처받은 남자들을 다 받아주고 치유해주는….
“순이는 네 남자를 남성으로 좋아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영혼을 사랑해요. 남자에게 자신의 가슴을 만져보도록 허용하는 것이나 성행위 자체가 일종의 ‘보시’라고 생각하는 거죠. 남자들의 공허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일 뿐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실제 예지원은 어떤 사람인가요? 화끈한가요?
“털털해요. 순이랑 정말 닮았어요. 아니, 닮았다기보다는 닮고 싶어요. 저도 순이처럼 당당해지면 좋겠어요. 저는 처음 보는 사람과는 아주 친해지기 전까지 말도 편하게 하지 못해요. 이런 제 모습이 너무 답답할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 순이를 연기하면서 평소 제가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예요. 저한테 “신사임당 같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단점일 수도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요.”
-영화에서 예지원씨는 남자들에게 독특한 판타지를 심어줘요. 나도 사랑해줄 것 같고, 다른 남자들도 똑같이 사랑해줄 것 같은….
“호호, 그래요? 그런 환상을 품어준다면 저야 좋죠. 저에 대해서 사람들이 상반된 이미지를 품고 있는 거 같아요. 사실 이번에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야성적인 여자로 보이고 싶어 몸무게를 늘리고 얼굴도 일부러 부어 있는 상태에서 촬영했어요. 감독님도 살찐 몸과 부은 얼굴을 원하더라고요. 그래서 촬영 전날 음식을 적게 먹는다거나, 얼굴에 팩을 붙이는 식의 관리를 일절 하지 않았어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 촬영하다보면 연애하는 기분 들어
-섹스신에서 여배우들은 보통 자기 중심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예지원씨는 진짜 상대를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줘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전 ‘사람 타는’ 게 있어요. 촬영할 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저도 모르게 연애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만큼 저도 사랑을 받는 것 같고요. 그래서인지 촬영이 끝나면 우울증이 와요. ‘이제 공허함을 어떻게 채워야 하지’ 하고요. 지금도 그들을 만나면 너무 흥분이 돼요. 하지만 이건 단점이기도 해요. 좋을 땐 너무 좋아하지만, 그 반대가 될 때도 있거든요. 제가 단순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둘째 아들 개코를 연모하는 어린 소녀 ‘병아리(김희정)’와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촬영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아역 배우들은 엄마들이 항상 촬영장을 따라다니잖아요. 아이 엄마에게는 미안했지만 감독님이 리얼한 연기를 원하니 어쩔 수 없었죠. 한두 번까지는 즐겁게 촬영했는데 그 이상 넘어가니까 아이의 눈에 독기가 서리더라고요(웃음). 결국 일곱 번인가 촬영한 끝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는데, 아이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영화 ‘올드보이’와 ‘슈퍼스타 감사용’에 출연했던 윤진서씨가 예지원씨를 많이 닮은 거 같아요.
“‘올드보이’를 보면서도 저와 닮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심지어 같은 기획사 식구인데도 말이죠. 나중에 TV에서 영화 시상식을 보던 중 윤진서씨를 얼핏 봤는데 정말 저와 많이 닮았더라고요. 저는 기분이 되게 좋던데(웃음). 진서씨가 되게 매력 있더라고요. 묘하면서도 신비감 있고. ‘내가 저렇게 매력적이란 말이야?’란 생각도 들고요(웃음). 진서씨는 실제로는 저보다 눈도 더 크고 코도 더 높아요.”
-연기력에 비해 대중적 인기가 못 미치는 것 아닌가요.
“저의 운명이겠죠. 앞으로도 몸은 힘들지만 정신적인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할 거예요. 이 영화에서 순이는 “어쨌든 좋았어. 모두가 날 좋아해주고. 아무도 날 궁금해하지 않고”라고 하잖아요. 사실 제 심경도 그래요. 사람들이 배우에게 열광하다가도 사소한 일로 돌아서버리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대중의 인기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예지원씨는 여성 팬들이 많은 편인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나 ‘록키호러쇼’ ‘생활의 발견’ 같은 영화들에서 여자들이 대리만족을 느낄 만한 역할을 맡아서일 거예요. 하지만 드라마 ‘줄리엣의 남자’에서처럼 여우 같은 역할만 계속했다면 저도 여자 팬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거예요(웃음).”
예지원은 말하는 도중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건 슬퍼서가 아니라, 자신이 연기했던 바로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어느새 되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귀여웠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