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검사·판사 부부였던 강지원 변호사와 김영란 판사는 청소년과 여성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법원은 개별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권을 가지며, 논란이 되는 법률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을 내리는 곳이다. 또한 대법원의 판결과 해석은 하급심 판결 및 각종 행정행위의 기준이 된다. 대법원의 판사를 가리키는 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모두 14명으로 6년의 임기가 법으로 보장된다. 장관급인 대법관은 법관으로서 최고의 영예와 권위가 주어지는 자리인 셈.
지난 7월23일 대법원은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48)를 대법관 후보자로 제청했다. 여성이 대법관 후보로 지명되기는 이번이 처음. 지난 8월11일 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가졌던 국회에서 김 후보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림에 따라 김 후보자는 8월23일 본회의 표결에서 무난히 임명동의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법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 후보자는 78년 사법시험 20회에 합격한 뒤 81년 서울 민사지법 판사로 법관의 길에 들어섰다. 그 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냈고, 여성으로는 네 번째로 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오르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또한 김 후보자는 활발한 대외활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판사이면서도 2001년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 비상임위원, 서울 종로구 선거관리위원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온 것. 그러면서도 늘 다소곳하고 겸손하며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을 대해 그를 한번 만나본 사람은 한결같이 그의 팬이 된다고 한다.
대법관 제청 직후 만난 그에게 “대법관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글쎄요 아직 경황이 없어 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부담스럽기만 합니다”라는 겸허한 성향이 고스란히 담긴 답변이 돌아왔다.
김 후보자의 남편은 청소년보호위원장을 지내 ‘청소년 지킴이’로 널리 알려진 강지원 변호사(52). 김 후보자가 여성 대법관 후보자로 제청됐다는 소식에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는 “법원에서나 가정에서나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며 “대법관 제청이 발표된 직후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기왕 기회가 온 것이니만큼 최선을 다하라’고 축하해줬다”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김 후보자가 대법관 후보로 제청되자마자 법무법인 청지의 대표 변호사직을 사임했는데 여성과 청소년 관련사건 등 공익에 기여하는 일을 맡으며 외조에 전념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맞벌이하며 20여 년간 시부모 모셔
김 후보자와 강 변호사의 인연은 81년 강 변호사가 서울지검에 검사로 재직할 때 김 후보자가 옆방의 검사시보(검사수습)로 오면서 시작돼 1년 만인 82년 3월에 결혼에 이르렀다.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한 강 변호사와 김 후보자의 결혼은 첫 검사·판사 커플이라 결혼식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강 변호사는 “옆방의 검사시보로 온 집사람의 첫인상이 선해 보여 흑심을 품고 염탐한 후 살살 꼬였다”고 말한 바 있다.
‘주부’와 ‘판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김 후보자가 쏟은 노력은 남다르다. 대법원이 서울시 서소문에 있을 당시 업무량이 많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매일 아침 남편의 출근과 큰딸의 등교를 직접 챙겼다. 그러나 두 딸을 둔 그의 교육관은 ‘자유방임’에 가깝다고 한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게 그의 자녀교육론이다.
큰딸 민형양(21)이 고교 입학 한 달 만에 자퇴하고 “규격화된 학교가 싫다. 수능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부부는 딸을 전남 담양의 대안학교인 한빛고등학교에 보냈다. 현재는 미국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 중이다. 둘째 선형양(17)은 성남 분당의 대안학교인 ‘이우(以友)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러나 남편 강 변호사는 한때 자식들을 욕심껏 키우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89년 서울보호관찰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생각을 바꿨다고. 어떤 대학을 나오고 어떤 일을 하는지는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는 현재 ‘어린이 청소년 포럼’의 대표이자 ‘이우(以友)교육공동체’의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등 어린이 청소년 보호활동에 열심이다.
김 후보자 역시 남편의 영향을 받아 청소년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김 후보자가 주변의 어려운 청소년 둘을 거두어 대학진학 때까지 보살핀 것은 일부 법조계 인사에게만 알려진 얘기다.
강금실 전 장관, 조배숙 의원과 고교·대학 동창
또 그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82년 결혼 후 지난해 시어머니가 작고할 때까지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시아버지의 경우 돌아가시기 전까지 6년 동안 대소변을 직접 받아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노모가 작고했을 때 장례문화 개선을 위해 부고를 외부에 일절 내지 않고 조용히 상을 치르기도 했다.
김 후보자의 이력 중 눈에 띄는 또 한 가지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조배숙 열린우리당 의원과 경기여고(63회) 및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이라는 점. ‘첫 여성 법무장관’인 강 전 장관이 형사부 여성 첫 단독판사의 기록을 세우고 변호사로 개업한 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들의 모임’에서 주로 활동을 했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검사’ 기록을 세웠던 조 의원은 판사로 전관한 뒤 여성법조인회장을 거쳐 전국구의원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김 후보자 역시 판사로 출발해 사법연수원 동기 가운데 가장 먼저 부장판사가 돼 세 사람 모두 고교 졸업 후 줄곧 법조계 안팎의 주목을 받아왔다. 사법시험 합격은 김 후보자가 가장 빨라 20회, 조 의원이 22회, 강 전 장관이 23회다.
경기여고 시절 김 후보자는 독서를 좋아하고 이해심이 많은 학생이었고, 강 전 장관은 문학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진 반면 조 의원은 여학생으로는 드물게 산악반 활동을 하고, 체육대회에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김 후보자는 법조계에 입문한 뒤에도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대로 책 읽는 것을 즐겨 ‘다독(多讀)가’로도 유명해졌다. 재판관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는 독서를 즐긴다고 한다.
김 후보자는 법조계에 입문한 뒤 주로 민사 재판부를 거쳤고, 그의 판결 가운데 몇몇은 전향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민단체들이 2년 연속 그를 대법관 제청 후보로 선정한 것도 그런 판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난해 5월 김 후보자는 이른바 ‘왕따’를 당한 고교생 이모군과 그 부모가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군 측도 원인제공 등 50%의 책임이 있다”는 1심 판결을 깨고 “왕따를 당한 학생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해 화제가 됐다. 그는 학교에 대해 “어느 조직보다 약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절실한 곳으로, 피해자에게 일부 책임을 묻는 것은 교육이념에 비춰 적절하지 않다”고 판시해 학교 교육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원지방법원 재직 중인 99년에는 호우 피해를 입은 주민 28명이 시흥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천재지변에 의한 피해지만 그 중 지자체의 책임을 가려내 주민들이 피해보상을 받는 길을 열어준 것.
그의 이러한 성향에 비춰 법조계 안팎에선 향후 대법관으로서 여성·장애인·아동 등 소수자를 위한 판결을 내놓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배려하는 판결을 내려온 김 후보자의 행보에 관심이 모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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