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장마 비로 도시 전체가 흠뻑 젖은 지난 7월7일, 영화 ‘거미숲’ 시사회에서 만난 감우성(34)은 피부가 새까맣게 타고, 눈에 띄게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거미숲’ 촬영이 끝나자마자 공포물 ‘알포인트’를 촬영하느라 캄보디아에서 머물다보니 검게 그을렸다고 한다.
2002년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화려하게 스크린 신고식을 치른 감우성이 2년 만에 다시 관객들 앞에 섰다. 그가 주연을 맡아 7월16일 개봉한 영화 ‘거미숲’은 한 남자가 조각난 기억들을 퍼즐 게임 하듯 꿰어 맞추며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가는 내용. 안무가인 아내(서정)를 비행기 사고로 잃은 뒤 실의에 빠져 있던 방송국 프로듀서 강민(감우성)은 같은 비행기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수영(강경헌)이 아나운서가 되어 같은 방송사에 입사하면서 연인 사이가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거미숲을 찾아간 강민은 그곳에서 수영이 자신의 상사와 정사를 벌이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강민이 얼마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을 때 두 남녀는 잔혹하게 난자당한 채 죽어 있고, 그는 거미숲을 벗어나다 교통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감우성은 두통과 혼란스러운 기억들로 괴로워하고, 강도 높은 폭력에 만신창이가 된다. 뇌수술을 받은 뒤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잊혀진 기억들을 되새기는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동안 ‘사랑해 당신을’ ‘눈으로 말해요’ 등의 드라마를 통해 부드럽고 지적인 이미지를 보여줬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번 영화에서는 어둡고 강렬한 이미지를 한껏 발산한다.
“TV 드라마를 통해 오랫동안 보여줬던 부드러운 이미지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변신을 하려 했던 건 아니에요. 다만 TV 드라마가 갖는 한계…, 솔직히 멜로에 질렸습니다. 제가 좀더 열성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소재와 인물을 찾다보니 이번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 같아요.”
그는 학창시절 보았던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 ‘디어헌터’에서 권총에 탄알을 한 발만 넣고 두 사람이 번갈아 방아쇠를 당기는 ‘러시안 룰렛’을 하며 인간의 광기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는 미군 병사들처럼 ‘지독한 감정선’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거미숲’이다.
“대본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TV에서 봤던 ‘인간시대’ 같다’는 생각이었어요. 전 한 사람의 기구한 인생을 다룬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비행기 사고로 아내를 잃고, 애인이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고, 그들이 살해되고…. 이 정도의 사연을 가진 남자라면 ‘인간시대’에 나올 법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전 그를 측은하게 바라봤고, 관객들이 그의 그런 절망적인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연기하려고 노력했어요.”
99년 단편영화 ‘소풍’으로 칸 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송일곤 감독은 ‘거미숲’의 대본을 완성하고 난 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감우성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외면에서 풍겨나는 강렬함보다 내면에 잠재된 강렬함이 마지막에 폭발해야 하는 작품인데 감우성씨에게서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어요. 물론 그전에 보여줬던 이미지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감우성씨가 새로운 도전을 잘 해내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놀라운 집중력으로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어요. 영화가 완성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감우성씨와 함께 일한 건 제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감우성과 서정은 비행기 사고로 사별하게 되는 부부를 연기했다.
평소 농담을 즐기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인 감우성은 슬픔과 분노는 물론 죽음 앞에서 조각난 기억의 파편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까지 감정의 변화 폭이 큰 강민이라는 인물에 철저히 몰입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 몇 개월 동안 말을 아꼈다고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된 전남 순천 선암사에 머물며 그야말로 도를 닦는 기분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또한 촬영에 앞서서는 감독이 건넨 ‘죄와 벌’을 읽으며 사후세계와 영원성, 극한의 공포 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2002년 처음 출연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결혼 제도를 거부하는 냉소적인 대학 강사로 출연해 상대역인 엄정화와 파격적인 베드신을 선보였던 감우성. 그런 도발적인 변신은 그에게 2002년 ‘여성관객이 뽑은 최고의 남자 배우상’을 안겨줬다. 그는 처음 도전한 영화가 워낙 많은 화제를 뿌린 탓에 후속작을 선택하기까지 부담이 없진 않았지만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처럼 많은 베드신이 등장하면서도 좋은 평을 받은 영화는 없을 거예요(웃음). 사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후 영화를 선택할 때 부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부담감보다는 ‘내가 인생을 살면서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 작품인가. 함께 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대본을 접했어요.”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연기는 몸으로 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에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는 그. 배고픈 건 참아도 삭막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은 못 견디는 성격이라 그는 어떤 사람과 일을 하느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전라로 베드신을 연기했는데 노출 수위에 신경 쓰기보다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한 남자가 새로운 사랑에 위로받는 복잡한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지난해 10월부터 영화 ‘거미숲’과 ‘알포인트’를 연달아 촬영한 그는 현재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는 상태. 특히 지난 2월 초부터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 ‘알포인트’ 촬영을 위해 캄보디아에 머무르는 동안 더위와 풍토병에 시달려 아직까지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거미숲’과 8월 중 개봉하는 ‘알포인트’ 홍보에 남은 힘을 쏟아 부은 뒤 몸을 추스르고, 다음 작품을 고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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