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 한 벌 남았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휭∼’ 하니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금세 옷을 갈아입고 다시 종종걸음으로 걸어나간다.
탤런트 하희라(35). 아이 둘을 키우는 30대 중반의 주부라고 하기엔 너무나 곱고 맑은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가진 그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를 가졌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그는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바삐 움직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촬영을 마치고 마침내 그가 자리에 앉자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하상길씨는 “그동안 만났던 연예인 중 가장 성실하고 사고가 반듯한 사람”이라며 그의 태도를 칭찬했다.
지난 2002년 KBS 일일드라마 ‘당신 옆이 좋아’ 이후 방송 활동을 접었던 탤런트 하희라가 연극 무대에 선다. ‘우리가 애인을 꿈꾸는 이유’라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아 오는 7월15일부터 공연하는 것. 2003년 1월, 드라마 종영 이후 1년6개월 만에 활동을 재개하면서 연극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당신 옆이 좋아’를 끝내고 난 뒤 드라마 섭외가 많이 들어왔지만 연극을 꼭 하고 싶었어요. 번역극이 아닌 창작극으로요. 우리에게 낯선 외국 이름을 부르며 연기하는 것보다 창작극이 우리 정서에도 더 잘 맞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고 그가 처음 연극 무대에 서는 건 아니다. 그는 88년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2∼3년에 한번씩 연극 무대에 섰다. 그러던 중 98년 뮤지컬 ‘넌센스’ 지방 공연 때 첫째 민서를 임신하면서 6년간 무대를 떠나 있었다.
모노드라마 첫 도전, 공연 앞두고 대사 까먹는 악몽에 시달려
‘우리가 애인을 꿈꾸는 이유’는 겉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30대 후반의 주부이지만 성적 쾌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으로 고통받는 한 여자의 이야기. 지윤이라는 여자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그가 지금의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을 찾고, 또 그가 변해가는 모습을 코믹하면서도 비극적으로 그리는 모노드라마다. 고두심, 김미숙이 연기한 ‘나, 여자예요’와 김혜자의 ‘셜리 발렌타인’을 연출한 하상길씨의 창작극으로 성에 대한 표현이 때로는 은유적으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성인 연극’이다.
하희라는 여러 차례 연극 무대에 섰지만 모노드라마는 처음. 그는 혼자서 극 전체를 이끌어가며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사실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더군다나 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 대사나 극의 전체적인 느낌이 야하다는 것도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이런 부분에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이번 작품을 꼭 해보고 싶긴 한데 좀 야하다고 했더니 ‘혼자서 하는 연극이 야하면 얼마나 야하겠냐’고 하더라고요(웃음). 제가 모노드라마라는 점 때문에 망설이고 있으니까 ‘너라면 할 수 있어’ 하며 격려해줬어요. 그 덕분에 힘을 얻어 용기를 냈죠.”
모노드라마이다 보니 대본 전체를 혼자 소화해야 한다. 그는 주인공 지윤을 비롯해 그의 할머니와 자살을 기도하는 친구 등 모두 11명의 인물을 혼자서 연기한다. 때문에 매일 스태프와 함께 3∼4시간씩 연습하는 것으로 모자라 집에서도 늘 대본을 들고 있다고. 그는 몇 달째 계속되는 연습과 두달 넘는 장기 공연을 무리 없이 소화하기 위해 보약을 챙겨 먹고, 일주일에 한번씩 아이들 손 붙잡고 청계산에 오르며 체력을 단련하고 있다며 웃었다.
하희라는 오랜 연기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한결같은 연기자로 유명하다.
“자려고 누웠다가 대사 한 구절 읊어봐야지 하고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끝까지 되새기게 돼요. 그러다 잠들고, 다시 눈뜨면 가장 먼저 대사를 떠올리고요.”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대사 연습을 멈추지 않는 탓에 처음엔 낯뜨거운 대사를 듣고 매니저가 얼굴을 붉히곤 했다고 한다. 마치 공부벌레처럼 연습을 하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연기 경력 20년을 넘긴 베테랑 연기자이지만 가끔 무대에 서기 직전 대사를 모조리 까먹는 악몽을 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랜만에 연기를 시작하니 모든 게 새롭고, 작품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작업이 즐겁다고 한다. 더욱이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연기를 통해 끄집어낼 수 있어 아주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고. 그는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연기에 도전함으로써 자신의 연기가 한층 성숙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스태프들 사이에 그는 ‘울보’로 통한다. 매번 연습 때마다 울지 않은 적이 없고, ‘꺼억 꺼억’ 하며 하도 서럽게 울어서 연습이 중단될 정도라고. 그는 성과 자기정체성에 대한 30대 주부의 고민을 담은 연극 내용 중 공감하고, 가슴 아픈 부분이 많다고 한다.
“벌써 결혼생활 11년째예요.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워보았기에 이번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연극처럼 그렇게 절망적인 경험을 해본 건 아니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잖아요. 제가 만약 지윤의 처지라면 저 역시 애인을 꿈꿀 것 같아요. 운이 좋아서 워낙 다정다감한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웃음).”
연극의 내용과 다르게 하희라는 최수종과 함께 10년 넘는 결혼생활 내내 연예계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손꼽혀왔다. 최근엔 두 사람의 금실이 국가대표급임을 인정받기도 했다. 지난 5월, ‘UN선언 세계 가정의 해 10주년 기념 대한민국 대표 부부 찾기 선정위원회’(위원장 강지원 변호사)가 가정의 달을 맞아 서울시민 1천명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커플을 설문 조사한 결과 최수종·하희라 부부가 가장 많은 4백73표를 얻은 것. 두 사람은 연예계의 대표적인 잉꼬커플로 꼽히는 탤런트 차인표·신애라 부부(2백37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75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75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변치 않는 부부금실의 비결은 대화와 양보
하희라는 연기 활동을 중단할 생각은 없지만 일보다는 가족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잉꼬부부의 대명사로 불리다 보니 각자 하는 일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공식석상에 부부 중 한 사람만 나타나면 “왜 혼자 다니느냐”고 물으며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부부는 그런 관심과 기대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제는 그 부담감을 평생 안고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연예인 후배들을 비롯해 두 사람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모범적인 부부상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한결같은 부부금실의 비결은 대화와 양보. 특히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불만을 쌓아두지 않고 그때그때 대화로 풀기 때문에 크게 다툴 일이 없다고 한다. 더욱이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된다고.
“저희 부부는 상대방이 ‘내 연기가 어떠냐’ 하고 묻지 않으면 먼저 이랬다 저랬다 모니터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간혹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이 어떻냐’고 물어오면 잘한 부분을 찾아 칭찬해주는 편이죠. 잘못한 건 제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본인이 더 잘 알거든요. 그 순간에 잘못한 걸 일일이 꼬집어서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는 대신에 잘한 부분을 찾아서 얘기해주면 힘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잘한 게 없는데도 잘한 것처럼 말을 꾸미지는 않죠(웃음).”
하희라의 남편 최수종은 아내를 위해 각종 이벤트를 자주 마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내 사랑이 극진한 최수종이 아내가 연극 연습을 하는 극장에 몇 차례 방문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이벤트 할 시간도 없어요(웃음). 대신에 틈틈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아요.”
앞으로의 바람을 묻는 질문에 하희라는 주저없이 “전 현모현처가 될 거예요” 하고 말한다. “앞으로도 연기를 계속하겠지만 어떤 일이든 아이들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고. 98년, 첫째 민서를 임신하고, 모든 활동을 중단한 뒤 민서를 낳고 13개월 만에 둘째 윤서를 낳은 그는 2002년 영화 ‘몽중인’과 ‘당신 옆이 좋아’ 외엔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일과 가족 모두 소중하지만 아이들이 엄마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일을 이유로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 것은 엄마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육아법이 유별난 건 아니다. 올해 남매가 한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서 한시름 놓았다는 그는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고 욕심내기보다 아이와 많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사물의 다양한 의미를 일러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컵 하나를 놓고도 그는 “이건 컵이야” 하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잔이라고 할 수도 있고, 물이나 음료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찬찬히 이해시킨다.
아이들을 두고 부부가 외출이라도 하려면 하희라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어디를 가야 하는지 한참을 설명한다. 아이들이 납득할 정도로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또 한참 지체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만한 교육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그는 아이에게 명령하는 일도 없다.
“전 아이들이 예의바른 사람이 됐으면 하는데 그렇다고 인사를 잘하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엄마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잘해서 사람들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거든, 그러니까 너도 인사를 잘해라’ 하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엄마는 참 행복했어. 그러니까 너도 엄마가 느꼈던 그런 행복한 감정을 느껴봤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죠. 아이가 설사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차근차근 설명해요. 물론 엄마에게 굉장한 인내력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런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다 보니 이제 아이들도 바깥 나들이를 했다가 위험한 물체를 보면 “엄마, 이거 만지면 피나고, 피나면 눈물이 나고, 내가 울면 엄마 마음이 아프지?” 하고 말할 정도라고. “그거 하지 마” 혹은 “하면 안 돼”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했을 때 엄마가 마음이 아플 거라는 식으로 다소 장황하더라도 차근차근 아이를 납득시키다 보니 이젠 아이들이 엄마의 어법을 그대로 흉내낸다고 한다.
아이들과의 약속 반드시 지켜
그가 아이들을 대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한 가지는 아이가 엄마를 찾을 때는 “잠깐만” 혹은 “이따가 얘기해” 하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어, 왜?” 하고 아이와 시선을 맞춘다. 또한 아이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기 때문에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처럼 떼를 쓰는 일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가 와서 ‘엄마 나 뭐 해주세요’ 했을 때 제가 ‘그래 두 밤 자고 해줄게’ 하면 아이들은 ‘네’ 하고 돌아가요. 그런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아이들이 어쩜 조르지도 떼를 쓰지도 않느냐며 놀라죠. 전 아이들과의 약속을 안 지킨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 그러니 아이들도 저를 믿고 기다릴 줄 아는 거죠.”
이렇듯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도 일단 일을 시작하면 휴대전화를 끄고 집안일은 잠시 잊는다. 그는 몇달째 일주일에 하루만 쉬고 매일 나와 연습하느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데다 앞으로 공연을 시작하면 더욱 바빠질 터라 아이들에게 내심 미안했는데 다행히 공연을 앞두고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겼다고 한다. 스위스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들 가족에게 스위스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 것.
그는 공연을 앞두고 있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동안 연습하는 모습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스위스에 가져가 보고, 매일 대사연습을 해서 여행 때문에 생긴 공백이 절대 티 나지 않도록 노력할 거라고 야무지게 말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보여줘야 하는 작품이니까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전 우리 아이들한테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부끄러울 게 없다는 걸 강조하거든요. 이제까지 아이와 남편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면 이번 일은 순전히 저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거예요. 행복해지기 위해 무대에 섰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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