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수석을 차지하고 싶었는데…. 괜찮게 보긴 했지만 몇 개 틀린 것 같아요. 영어가 제일 어려웠어요.” 지난 4월5일 고등학교 입학자격을 얻는 검정고시를 치른 신창원(38)의 첫 소감은 ‘만점 수석’을 놓친 데 대한 진한 아쉬움이었다. 이날 검정고시 시험장을 찾은 한 친지는 신창원이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시험을 치른 후 자신있는 모습으로 “충분히 합격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합격자 발표는 5월초로 예정돼 있지만 정답지를 이용해 미리 채점해본 그의 예상점수는 ‘다 맞추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수준. 신창원은 이미 합격을 자신하고 8월로 예정된 고졸 검정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청송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는 신창원은 97년 1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중이던 부산교도소 화장실 창문을 뜯고 탈옥해 99년 여름까지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여 ‘희대의 탈옥수’로 불렸다.
신창원의 공부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은 올 1월. 그가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엄상익 변호사에게 보낸 안부편지를 통해서다. 그는 편지에서 “중등반에 편입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평균 95점 이상 받고 싶다”는 강한 학구열을 드러냈다. 신창원은 그후 불과 석 달만에 자신의 ‘1차 목표’를 사실상 이뤄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대학에 진학할 것이라는 의지까지 밝혔다.
그러나 사실 확인을 위해 신창원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수감돼 있는 청송교도소측이 ‘무기수에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외부인의 접견을 사실상 차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창원 본인도 안면이 없는 이와의 면회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창원은 대신 매주 꾸준히 만나고 있는 친지들을 통해 자신의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전해주었다.
요즘 그의 하루 일과는 독서와 공부만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0.8평 규모의 독방에서 혼자 생활하며 불면증, 신경쇠약 등에 시달려온 그에게 공부는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처. 그는 변변한 교재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독학으로 나름의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신창원이 한때 “헛것이 보인다” “어디선가 곡소리가 들린다”고 호소하는 통에 골머리를 앓았던 교도관들도 그가 공부를 시작한 이후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건강을 상당히 회복했다고 전했다.
사실 신창원이 처음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만 해도 영어, 수학, 과학 등 여덟 과목에 이르는 검정고시 과목을 제대로 익힐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도피생활로 인해 체력과 정신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인 데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단 한번도 교과서를 들고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독방생활하며 정신질환 호소했으나 공부 시작한 뒤로 안정 찾아
99년 2년6개월 간의 도피행각에 종지부를 찍으며 검거된 직후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들었고 가정은 급격히 무너졌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육성회비와 급식비를 가져오라 하고, 집에서는 돈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해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때부터 학교를 빠지고 과일과 과자를 훔쳐먹으며 며칠씩 집 밖에서 지내곤 했다’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는 중학교 1학년을 중퇴한 그가 자신의 최종 학력을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밝히는 까닭은 이같은 그의 이력 때문이다.
97년 부산교도소를 탈출한 신창원은 2년6개월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도피행각을 벌였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한 뒤 신창원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께 못다 한 효도를 하려면 반드시 뛰어난 점수로 합격해야 한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공부만이 그에게 새로운 삶,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또 다른 삶을 가능케 해줄 것이라는 믿음도 그를 교과서에 몰두하게 만드는 이유다.
신창원이 조심스레 고백한 그의 꿈은 대학에 진학해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후 일탈 청소년을 위한 카운슬러가 되는 것. 그는 “왜 공부를 하느냐”는 친지의 질문에 “청소년 범죄자들은 대부분 그저 재미로 범죄를 시작한다. 그것이 가져올 끔찍한 고통을 누군가 미리 충고해준다면 범죄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내가 겪은 고통과 아픔을 전해줌으로써 ‘제2의 신창원’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사명이다” 하고 답하고,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할 때 겪었던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고 한다.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해 홀로 포장마차에 들어갔는데 주인 부부가 하루 일을 마무리하며 가볍게 다투고 있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종일 고생했으니 어서 들어가라.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말하자 아내가 ‘천막치고 장보는 일을 당신이 다 했는데 왜 내가 피곤하냐. 당신 먼저 들어가라’고 맞서고 있었다. 내 인생에는 저렇게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나, 앞으로도 영영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날 새벽 나는 다 식어버린 우동을 먹으며 내내 울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사회에 대한 복수’로 토해냈던 그에게 카운슬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삶을 이끌어갈 새로운 힘인 셈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금껏 신창원의 삶을 이끌어온 힘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겪은 외로움’과 ‘결핍에 대한 분노’였다고 전한다. 신창원 역시 자신이 범죄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가 끊임없이 쫓겨다녀야 하는 도피생활 중 어느 곳에 가나 여자와 함께 지내고, 그들로 인해 꼬리가 밟히는 일을 반복한 것은, 그들만이 자신 안에 있는 뿌리깊은 외로움과 애정결핍을 잠시나마 잊게 해줬기 때문이다. 신창원은 친지에게 따뜻한 가정을 일궈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도피시절 신창원이 쓴 글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 담겨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한겨울 밤이었다. 나는 경찰에 쫓기고 있었고 이미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져 어디 한군데 마음 편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산길을 걷고 있는데 멀리 연기가 보였다. 산비탈에 쳐진 비닐 하우스 굴뚝에서 뿜어져나오는 온기였다. 기어올라가보니 비닐하우스 안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젊은 엄마, 아빠와 어린아이 둘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추운 겨울에 비닐 하우스에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이었겠는가. 하지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내게는 전혀 추워보이지도, 불쌍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굴뚝 온기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져 눈물이 나왔다. 그날 이후 그들에게서 풍겨나오던 그 행복의 느낌은 내게 천국의 모습이자 꿈이 되었다.”
지난 3월 옥중에서 친지가 마련해 준 생일파티에 감동, 울먹여
하지만 그의 주변에 있던 수많은 여자들은 검거 후 다 사라졌고, 한때 신씨와 옥중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던 이와의 관계도 기약없는 감옥생활로 인해 끊겨버렸다.
지난 3월, 감옥 안에서 조촐하게 그의 생일파티를 열어줬다는 한 친지는 “내가 사간 케이크를 보고 창원이는 ‘내 생일날 케이크를 놓고 잔치를 한 것은 생전 처음’이라며 울먹였다”고 말했다. 평생 사랑과 배려를 찾아 헤맸지만, 정작 따뜻한 관심조차 받아본 적 없는 그에게는 이 생경한 경험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추억이 된 것이다. 그후 신창원은 영치금을 모아 자신의 생일파티를 열어준 친지에게 양말을 선물했다고 한다.
99년 검거 당시의 모습. 그가 입고 있는 프린트 셔츠가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도피과정 중에도 ‘창작과 비평’ 등 문학 계간지와 박완서의 소설, 한수산의 에세이 등을 읽은 것으로 알려진 그가 요즘 가장 열심히 보는 책은 성경. 잠언을 즐겨읽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있다는 그의 바람은 언젠가 자신의 모습에서 따뜻함과 삶의 온기가 풍겨나왔으면 하는 것이라고 한다.
1989년 9월 강도치사 등의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97년 탈옥했던 신창원은 99년 검거돼 추가로 22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법률적으로 볼 때 그에게는 무기형보다도 더 긴 형기가 남아있는 셈. 오랜만에 교도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검정고시 시험날에도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겹겹이 둘러싼 교도관들과 함께 이동해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과연 신창원에게 그가 간절히 꿈꾸는 삶의 제 2막이 열릴 수 있을까.
재소자를 위한 대학과정은 교수들을 교도소로 초빙해 이뤄진다. 법무부 관계자는 “신창원과 같은 무기수라도 일정조건만 갖추면 교도소에서 운영하는 대학과정에 진학, 졸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카운슬러가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않고 최선을 다하면 준비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어느 교회 장로의 말을 되새기며 새로운 삶을 준비중인 신창원의 앞날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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