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봉씨(42)를 만나러 가는 길은 복잡했다. 충남 서산 시내에서 버스로 30여분을 더 들어가는 오지에 사는데다 그를 만나려면 관할 파출소에 먼저 들러야 하고, 다시 마을 이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에 많이 노출된 엄씨 모자를 보호하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조치였다.
“눈물이 다 나더랑께. 월매나 자랑스러운지 말여. 기봉이 덕분에 마을에는 경사가 났시유. 그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감?”
엄씨를 찾아왔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지난 1월 있었던 단축 마라톤 대회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만큼 엄씨는 마을의 자랑이다. 동네사람의 안내로 엄씨의 집에 들어서자 “어디서 오셨시유?”하며 엄씨 어머니 김동순씨(80)가 방문을 열었다. 허리가 굽은 김씨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보청기 없이는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들의 마라톤 때문에 왔다고 하자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운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어머니를 따라나온 엄씨는 “서울 좋아.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또 강이 있어서 좋아. 서울에서 살고 싶어” 하며 그날을 회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서울이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그가 20㎞ 단축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5㎞ 지점까지 17등으로 달려 입상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일찍 지치는 바람에 상위 입상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3천여명의 참가자 가운데 1백17등이라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순전히 그의 정신력 때문이다.
그는 정신지체 1급 장애인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해맑은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일곱살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의심할 줄 모르는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다. 동네 친구들이 모자란다고 놀릴 때마다, 아버지가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그는 달렸다.
평생을 뛰어다녔다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가까운 거리나 먼 거리나 뛰어다녔다. 가난 탓에 운동화도 없어 맨발로 달렸다. 운동화를 신기 시작한 것은 마라톤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관절에 무리가 간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지금은 꼭 운동화를 챙겨서 신는다.
이렇게 달리기를 열심히 한 덕에 엄씨는 트로피 두개를 갖고 있다. 마라톤 경기에 참가해 받은 것으로, 매일 밤 잠을 잘 때 머리맡에 두어야만 비로소 잠을 청할 정도로 아낀다. 손님이 오면 언제나 자기 방에서 제일 먼저 꺼내 자랑한다는 트로피.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희망의 상징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3월. 마을 행사인 ‘고북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할 대표선수를 찾던 마을 이장은 평소 달리기를 잘하던 그를 떠올렸다. 무슨 일에나 열심히 하는 엄씨라면 5㎞ 정도의 거리는 너끈할 것으로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첫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3등을 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다.
가능성을 발견한 이장은 그를 본격적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엄씨는 달리기는 잘하지만 장거리 마라톤에서는 필수인 체력안배를 잘 하지 못했다. 이장은 체력과 지구력 향상을 위한 훈련을 시켰다. 엄씨는 하루에도 몇번씩 마을 주변을 돌며 연습했다. 처음엔 시간에 상관없이 낮이고 밤이고 달리기를 했지만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통에 지금은 낮에만 뛴다.
“밤에 뛰어도 안 무서워. 새벽 4시까지 뛰었어. 엄마한테 혼나니까 나갈 땐 말 안해. 아버지보다 더 무서워. 이젠 안 나가. 큰일나. 엄마가 걱정하니까 낮에 해.”
그가 두번째로 출전한 경기는 올 1월초 개최된 ‘경상남도 고성군 이봉주 훈련코스 제2회 마라톤 대회’. 10㎞ 코스였다. 긴장된 순간, 엄씨는 힘차게 스타트를 했다. 이장은 오토바이를 탄 채 그의 뒤를 좇으며 체력안배를 도와주었다. 비록 순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는 훌륭하게 완주해냈다.
“기봉이 덕분에 마을에 활기가 돌았지유. 기봉이 아니면 누가 텔레비전에 나오겠시유. 이젠 달리기 연습을 하면 어른들이 불러다 격려를 하지유. 워낙 착해서 사람들이 다 좋아해유. 달리다가도 어른을 보면 꼭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간당께. 그러니 누가 싫어 하겠시유. 게다가 어머니한테 지극 정성이지. 기봉이는 어딜 가나 환영이지유” 하고 옆집에 사는 이상기씨(75)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방송에 나간 후 엄기봉씨 모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을에서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이제 엄씨는 마을의 ‘스타’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대회 때는 마을사람 전체가 차를 대절해 서울까지 가서 응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달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골인하면 기분이 좋아. 안 힘들어. 막 뛰는 게 아니고 찬찬히 뛰거든. (달리기를) 안 배웠으면 방에서 맨날 잤을 거야. 내가 이것을 배웠으니까 방송에 나갔지. 배우길 잘했지. 달리기가 좋아.”
엄씨는 대회에서 받은 상금과 상패를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안겨주었다. 나이 많으신 어머니는 그가 달려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첫 대회 때 상금을 탄 그는 앞으로 마라톤을 잘 해서 번 돈으로 평생 고생만 해온 어머니를 도와드리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다.
이처럼 엄씨는 소문난 효자다. 부모 옆에서는 아무리 나이 든 아들이라 할지라도 재롱을 부린다고 했던가. 그는 어머니의 심기가 불편하기라도 할라치면 얼른 다리를 주물러주고, 노래도 불러준다. 버스를 타고 읍으로 나갈 때면 의자에 앉지 않고 옆에 서서 혹시나 어머니가 쓰러질까봐 지켜본다. 그뿐 아니라 동네잔치에 가면 꼭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릴 음식을 따로 챙겨온다. 어머니에게는 그 어떤 자식보다도 자랑스럽고 기특한 아들이다.
누구보다 어머니를 지극하게 생각하는 엄씨는 2남3녀 중 막내. 아버지는 그의 나이 13세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질도록 질긴 가난과 모자란 막내아들을 보면서 늘 가슴아파했던 아버지는 일찍 저세상으로 떠났다. 엄씨 위의 형제들은 모두 출가를 했기 때문에 엄씨는 할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남의 집으로 머슴살이를 하러 갔다. 하루 세끼와 월 5만원을 준다기에 흔쾌히 갔다. 그러나 그 집에서 돈과 밥은커녕 일만 죽어라 해야 했다. 그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악용해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소여물을 뜯어먹었어.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어”라고 엄씨는 말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뒤로 그는 먹는 것만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먹어댔다. 워낙 굶기를 밥먹듯 했던 그였기에 ‘있을 때 먹어두자’는 생각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위를 상해 무척 고생하기도 했다. 달리기를 하다가도 위가 쓰려올 때마다 제대로 뛰지를 못했다. 지금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하루 세끼를 조절해서 먹어 거의 다 나았다.
두번째로 일하러 간 집에서는 약속대로 밥도 주고, 돈도 줬다. 그곳에서 소똥도 치우고 온갖 허드렛일은 도맡아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 글도 모르고, 숫자도 모르는 그는 그렇게 30여년을 남의 집에서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런 와중에도 월급을 받으면 혼자 계신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가져갔고 수시로 집을 들여다보며 어머니를 챙겼다.
반면, 그의 형은 사업을 한다며 시골의 땅을 모두 팔아 도시로 갔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병까지 걸리고 말았다. 지난해 형이 찾아왔다. 어머니 곁에서 죽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지만 어머니는 “내 눈앞에서 죽지 말라”며 돌려보냈다. 그렇게 떠난 큰아들은 며칠 후 사망했다. 큰형이 세상을 떠나고 다른 누이들도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탓에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고스란히 엄씨의 몫이 되었다. 가장 못난 새끼손가락이 어머니를 지키게 된 것이다.
엄기봉씨의 극진한 효성은 마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어머니와 한집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국민기초생활보장금’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엄씨는 매일 아침 어머니가 세수할 물을 데우기 위해 군불을 지폈다. 그리고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침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했다. 가까운 산에 가서 나무도 해오고, 연탄 보일러의 연탄도 갈았다. 그에게 정신지체 1급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엄씨는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을 때 사람들이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어 동네 사진관에 가서 사진 찍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약간의 용돈이 생기면 읍내로 나가 일회용 카메라를 샀다. 카메라로 찍히는 세상이 좋았던 것이다. 그가 주로 찍는 것은 ‘어머니’와 ‘꽃’이다. 때로 달리기를 하다가 동네 어른을 만나면 얼른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다.
“나도 몇번 찍어줬는데 잘 찍어유. 찍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난중에 사진으로 인화해서 갔다줘유. 동네 사람들을 자주 찍어주는데 아마도 자기를 도와주니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는 것 같어유. 남에게 받은 만큼 주는 것이지유.”
옆집의 이씨는 그의 사진 솜씨가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식 같은 마흔살의 엄씨가 마냥 귀여운 모양이다.
엄씨는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다. 해야만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꽃을 심고 돌보는 것이다. 요즘은 가까운 교회에 나가 글과 숫자도 배우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되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얼마전에는 이장 집과 파출소에 전화하는 법도 배웠다. 이렇게 그는 진도는 느리지만 조금씩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배워나가고 있다.
“옛날에 어릴 때는 손이 구부러졌었어.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 그러니까 글도 쓸 수 있어.”
이제 그는 여러 마라톤 대회에서 초청을 받을 정도로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 지금은 4월 충남 태안군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달라는 군수의 초청을 받아 훈련 중이다. 또한 가을에는 지난번 3등을 했던 ‘고북면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목표로 출전할 계획이다. 그래서 엄씨는 오늘도 달리기 연습을 위해 운동복을 갖춰 입고 머리엔 노란색 띠를 둘렀다. 운동화 끈을 질끈 조이는 그의 손은 야무지기만 했다.
어머니가 잔소리 할 때마다 “그려” 하며 공손하게 대답하는 그와 들리지 않을 때마다 순박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들 모자에겐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뛰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한적한 시골길을 타박타박 쉬지 않고 뛰어가는 엄씨의 멋진 모습을 오래오래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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