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밴 승용차가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가 잽싸게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연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리는 아내를 조심스럽게 부축한다. 아내는 “고마워요” 하며 그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지금 임신 4개월이에요. 이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시기라고 하잖아요. 아내는 한동안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곁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미안하더군요.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입덧도 하고 출산도 하고 싶다니까요.”
빨간색 점퍼와 톡톡 튀는 빨간색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난 탤런트 김형일.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푹신한 소파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잡는 것을 보니 그가 왜 ‘매너맨’으로 통하고, 아내 사랑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는지 한눈에 알 것 같았다.
아내 한복희씨가 임신 사실을 안 것은 지난 1월초. 임신 5주째에 접어드는 때였는데 꾸준히 병원에 다니며 임신소식을 기다려왔던 터라 비교적 일찍 알았다고 한다.
“몸이 평상시와는 달리 좀 무겁다 싶어 시약을 사다가 집에서 테스트를 했어요. 아침에 일어난 후 첫소변이 가장 정확하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테스트를 하고도 그 시약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더라고요. ‘아니면 어떡하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거라는 생각 때문에요.”
다행히 시약엔 보라색 두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아내는 기쁜 마음에 바로 침실로 건너가 밤샘 촬영으로 새벽에 들어와 단잠에 빠져있는 남편을 깨웠다. “성공이야!” 그 한마디는 남편의 깊은 잠을 단박에 쫓아버렸다.
“잠이고 뭐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죠. 얼마나 기다렸던 소식인데요. 임신 초기라 복부초음파가 아닌 질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들어오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무작정 밀고 들어갔죠. 병원이 생긴 이래 질초음파실에 남편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저에겐 절실했거든요.”
오는 9월이면 새 식구나 탄생한다. 부부는 어서 가을이 왔으면 한다.
부부가 그토록 임신에 매달린 이유는 늦은 결혼식과 두 사람의 나이 때문. 8년간의 열애 끝에 지난 2000년에야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의 올해 나이는 남편이 마흔두살, 아내가 서른여덟. 남들 같으면 벌써 학부모가 되었을 나이다. 그러니 조바심이 날 수밖에.
게다가 지난해 겪었던 유산은 부부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한 방송국에서 진행된 ‘아기 갖기 프로젝트’에 출연하기도 했던 부부는 그러나 임신 4주 만에 자연유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인연이 안되려고 그랬나봐요. 한동안 많이 힘들었죠. 특히 아내의 슬픔이 너무 컸어요. 주위에선 아기를 빨리 다시 갖는 게 그 슬픔을 달래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더 조급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임신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병원에서 수 차례 정밀검사를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진단이었다. 그저 무용을 전공한 아내의 ‘아기집’이 작아서 그럴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씀만 있을 뿐.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시험관 아기 이야기를 꺼냈다.
“한참 고민하는 눈치더니 인공수정을 하자고 하더군요. 더 늦어져선 안되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하지만 의술이 아닌 부부의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아기를 갖고 싶었어요. 그래서 딱 3개월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죠.”
이후 임신을 위한 부부의 구체적인 몸관리가 시작됐다. 남편은 3년 전에 끊었지만 스트레스가 쌓이면 가끔 피우곤 했던 담배를 완전히 끊어버렸고,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분위기에 맞추어 물만 마실 뿐 술 한잔 입에 대지 않았다. 심지어 3차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도 술의 유혹을 이겨냈다. 아내도 몸관리에 철저했다. 하루에 몇잔씩 마시곤 하던 커피를 멀리했고, 건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병원에 열심히 다녔어요. 날마다 체온표도 작성하고, 병원에서 배란일에 맞추어 내준 숙제(?)도 꼬박꼬박 했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한달 정도 병원에 안 갔어요.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게 최고일 것 같아서요.”
부부의 ‘편안한 마음으로 아기 갖기 전략’은 성공했다. 몸관리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임신소식이 알려지자 가장 반가워한 사람은 어머니와 장모님. 형보다 먼저 결혼을 해 벌써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둘이나 둔 동생과 비교하며 “너는 언제 결혼할 거냐” “아기는 언제 가질 거냐”며 걱정을 하던 어머니는 “장하다”며 아들과 며느리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병원에서 녹화해준 초음파 비디오는 식구대로 이미 몇번씩 돌려봤고, 태교에 좋다는 음악 CD며 그림책들이 선물로 들어오고 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입덧이 심했어요. 음식냄새가 그렇게 싫고 물만 마셔도 속이 울렁거리더군요.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링거 신세를 지기도 했고요. 저 때문에 남편도 3개월 동안 집에서 식사 한번 제대로 못했어요.”
아내가 걱정이 된 그는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간식거리를 사는 것이 코스였다고. 하지만 어떤 걸 사가야 입덧을 하지 않고 먹을 수 있을지 몰라 어묵에서 수프, 족발까지 사다보면 어느새 봉지가 가득 차곤 했다.
“하루는 너무 시원하고 맛이 좋다며 올갱이아욱국을 포장해온 적이 있어요. 사실 국을 포장해 가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그래도 임신한 아내 줄 거라며 우겼더니 식당 아주머니께서 포장해 주시더래요.”
요즘 그녀의 입맛을 자극하는 것은 육류. 임신을 하면 신 게 먹고 싶다고들 하는데 웬일인지 그녀는 과일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신김치는 소리만 들어도 반응이 온다고. 어른들은 육류를 좋아하는 걸 보니 아들이 틀림없다고 내심 반기는 눈치라고 한다.
하지만 늦은 임신이다 보니 부부의 걱정도 크다. 그래서 그는 바쁜 촬영스케줄 속에서도 병원만큼은 아내와 함께 가려고 노력한다.
“임신하기 전엔 아기를 가졌으면 하는 열망이 컸고 임신 소식을 알고는 잘생긴 아들이나 예쁜 딸이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아기가 건강하기만 바라는 마음이 커지는 것 같아요. 이런 게 부모가 돼가는 과정인가 봐요.”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몰라 아직 지어놓은 이름은 없다. 아기를 낳으면 서로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자며 장난스레 생각해놓은 이름은 ‘복일’. 하지만 아이가 두고두고 원망할 것 같아 예쁜 이름을 생각중이다.
기다림이 큰 탓일까? 뱃속에 있는 아기에 대한 부부의 사랑은 남다르다.
요즘 부부의 관심은 온통 출산과 육아에 관련된 곳에 쏠려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분유나 아기 옷 광고가 눈길을 붙잡고, 잡지나 신문에 나온 육아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기도 한다.
“남편이 더 열심이에요. 아기 앨범을 사다놓은 지는 오래됐고, 요즘은 한참 신생아용품을 사 가지고 들어와요. 시장의 장난감 가게앞에서 자주 멈추는 걸 보면 곧 장난감으로 집안이 가득 찰 거예요.”
입덧이 사라지면서 얼마전부터는 태교도 시작했다. 클래식 등 태교에 좋다는 음악을 항상 틀어놓고, 부부가 함께 태담도 한다. 동네 찜질방에서 서로의 다리를 주무르며 태어날 아기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상의하는 시간이 늘었다.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공부는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운동은 하나 정도 잘 했으면 해요. 아이가 원한다면 스포츠 방면으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어요. 배우요? 글쎄요. 소질이 있다면 몰라도, 하하.”
부부는 아이에게 높임말을 쓸 계획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바른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제가 낚시를 참 좋아하거든요. 아내와도 주로 낚시터에서 데이트를 즐겼죠. 아이가 좀 크면 함께 낚시를 하고 싶어요.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아이의 고민이며 생각들을 듣고, 또 제 이야기도 들려주고요. 그렇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그의 휴대전화엔 재미난 인사말이 녹음되어 있다. “안녕하세요. 김형일입니다. 핸드폰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지요. 바쁘게 살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요즘 참 좋은 봄날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바야흐로 그에게 봄날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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