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50)을 만나러 가는 날, 세상 천지는 백설로 눈부셨다. 새해 첫 폭설이었다. 차창 밖으로 휘날리는 눈발만큼 청주로 가는 내내 가슴 설레였다. 엉금엉금 기는 고속버스가 야속하긴 하였어도, 초면인 그를 만나는 길, 눈발이 괜스레 좋은 징조처럼 느껴졌다.
폭설에 갇힌 한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목도리를 둘둘 만 그는 감기몸살이라고 했다. 오늘 촬영은 꽤 힘들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웬걸, 그는 촬영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아마 서울서 내려온 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였으리라.
식사를 마치고 자택으로 갔다. 집필실은 참 아담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손때 묻은 책들은 그의 지난 삶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안중근> <함석헌> <우리 역사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사랑의 학교> <통일을 여는 국어교육> <해방공간의 문학> <조선의 민속놀이> <참교육의 함성>…. 책들은 그가 걸어온 날들을 함축해주는 듯 보였다. 함석헌 선생의 진보적인 사상과 철학에 빠졌던 청년시절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 자본주의와 학교교육, 해방공간의 문학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한편으로는 진솔한 서정시를 노래해온 시인으로 우리 곁에 다가선 도종환 시인.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자작나무’ 전문)
인고의 세월이 묻어있는 시 속의 ‘자작나무’는 어쩌면 그의 자화상일런지도 모른다. 꽃과 나무를 사랑해 꽃나무에 물을 주는 것으로 아침 일과를 연다는 그답게 시에는 유달리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시인은 말한다. 봄이 오고 바람이 불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나무를 통해 바라보노라면 늘 마음이 편해졌다고. 해직이라는 고통의 터널을 지날 때도 다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주던 건 나무들이었다고. 그런 나무를 찾아 그가 다녔던 충북대 캠퍼스 숲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린 그에게 눈발이 뚝 하고 안겼다.
“설령 잎 지고 열매마저 다 잃고 난 뒤에 빈 가지만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서있어도 나무는 소중한 것이죠. 잎이 무성한 날들도, 열매를 맺으러 고통스럽던 날들도, 그 열매를 지키기 위해 견뎌온 날들도 나무에게 진정 소중한 날들이에요.”
나무 예찬론을 펴며 두 팔을 벌린 그에게 눈발은 계속해서 정겹게 떨어졌다. 허공의 계단을 즈려 밟고 내려온 눈발을 맞는 겨울 숲. 깊은 속울음으로 견뎌온 그의 과거가 겨울 숲 위로 스친다.
도종환 시인은 충북 청주 무심천 서쪽 운천동 산직말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동네. 그는 어릴 때는 글보다 그림에 더 소질이 있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미술반에서 활동했을 정도. 당시 문화원 화랑 전시회에서 중학생인 그의 작품이 가장 비싼 값에 팔려나갈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미대 진학은 꿈도 못 꿀 일. 그는 수업료가 면제라는 국어교육과로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닌 ‘그 시절, 그 가난’이야말로 문학적 자산
이미 중학교 때부터 시인은 가난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했다. 떠돌며 살던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가 떠나자 그는 텅 빈 쌀통만 남겨진 자취방에 혼자 남아야 했다. 냉기 도는 방을 피해 둑길을 자전거로 달렸다. 손발을 에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는 펑펑 울었다. 참고서를 살 돈은커녕 소풍이나 수학여행조차 한번도 가본 일 없었다는 그는 대신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삶의 반전’을 꿈꿨다. 어쩌면 남 모르게 눈물 흘렸던 그때가 자신을 시인의 길로 이끈 것인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그는 생각한다.
가난은 대학시절에도 여전했다. 월세 2천원짜리 단칸방에서 살던 가족들. 단칸방 윗목은 그야말로 냉골이었다. 딱 하나밖에 없는 연탄 화덕의 훈기가 그곳까지 미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사정 때문에 아버지는 그가 일찍이 취업을 하거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미 문학과 철학서적을 손에서 뗄 수 없던 그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무심천 옆 술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 사르트르를 이야기하며 밤새워 문학과 철학을 논했다. 술집 문이 닫히면 다시 둑길로 장소를 옮겨 깡소주를 까며, 다음날 아침을 맞곤 했다. 그에겐 무심천은 지겹게 매달리던 가난과 젊은 날의 상징에 다름없었다. 그는 ‘무심천’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읊고 있다.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이제는 먹고 살 만해졌지만 그 시절 그 가난이 문학의 자산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새삼 문학에 감사한다. 그리고 또한 그 시절 문학적 허기를 채워주던 헌책방에게도 감사한다.
돈이 없던 그는 대학시절 교재는 모두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헌책방은 그에게 삶의 생명선이자 탈출구였다. 당시 3백원, 5백원이면 살 수 있었던 카뮈,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철학서적, 일본 작가 무샤고오지 샤네아스의 <인생론>, 해방 공간의 좌우익 작가의 작품을 망라한 <조선단편문학선집>, 최현배의 <한글의 투쟁>, 김동석 평론집 <예술과 생활> 등 헌책방에서 건진 보물들을 밤새워 읽곤 했다. 이 가운데 김동석 평론집은 그에겐 각별한 책이다. 당시에는 좀 비싼 가격인 1천원에 장만한 이 책에는 임화, 정지용, 오장환 등 낯선 이름의 작가들을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김동석은 ‘월북 평론가’로, 이 책을 구입한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고.
그가 군에 복무하던 80년 5월, 빛고을 광주에서는 민주화항쟁의 불길이 당겨졌다. ‘사격명령’이란 전언통신문이 암호로 날라왔고, 그는 차출돼 광주로 가는 여수순천간 17번 국도의 고갯마루로 실려갔다. 시민들을 진짜로 쏴야 하나…. 밤새 고민을 하다 탄창 맨 위의 총알을 거꾸로 장전하고 그 밤을 견디었던 처절한 기억. 몇해 전 그는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그날의 광주가 떠올라 펑펑 울었다고 한다.
겨우 군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집안 분위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빈민으로 떠돌던 아버지는 그새 소작농이 되어 있었다. 이집 저집 음식점 잔반통에 남은 찌꺼기를 돼지 먹이로 쓰기 위해 걷으러 다니는 아버지 등 뒤에서 그는 번민의 시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에 실린 ‘산읍일지’라는 시를 접했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눈오는 밤에 나는/잠이 오지 않았다(중략)…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눈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친구들이 미치고 다시/미쳐서 죽을 때/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라는 반문은 그동안 낭만주의에 젖어 있던 그 자신을 반성하기에 충분했다. 시심의 낫날만 벼릴 게 아니라 그 연장으로 곡식을 거두고 삶의 텃밭을 일구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벼를 일으켜 세웠고, 꼴을 베고, 볏가마니를 짊어졌다. 때론 인분 리어카를 끌고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밭으로 오고갔다.
어느날에는 그동안 써온 소중한 초고들조차 불살라버렸다. 그때 어머니는 그 불을 끄더니 원고 뭉치를 뒤안으로 가져갔다. 알고 보니 뒷마당에 있는 화덕의 불쏘시개감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그가 쓴 원고는 식구들이 먹을 죽을 끓이던 솥의 밑불이 되어 사라졌다. 아무리 마음을 달리 먹었다고 해도, 대학시절 머리를 싸매며 썼던 문학적 고뇌가 그렇게 한줌 재로 잠들던 밤엔 그도 잠이 오지 않았으리라.
강한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직선으로 살아가고 싶다
졸업 후 그는 교직에 나갔다. 그동안 등록금을 면제받았던 당연한 대가였다. 보은에서 한 시간 걸리는 완행버스 안에서 이불보따리를 끌어안고 오구니재 열네 구비를 넘어 산골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그곳이 그가 교사생활의 첫발을 내딛는 학교였다. 그러나 그는 첫 학교에서도 늘 괴로워했다. 시인이고 싶다는 정체성과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서로 상충하며 그를 괴롭혔다. 하루 예닐곱 시간을 수업에 시달리고 나면 그저 축 늘어진 육신만이 남았고 갈등은 커져만 갔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박두진의 시 ‘바다의 영가’를 읽어주다 거기 나오는 ‘바다가 죽으면 가슴도 죽는다…’라는 구절에 그만 목이 메어 울고 말았어요.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하는데 저는 눈물을 닦고 서있느라 수업을 하지 못했죠.”
어느날, 빈 교무실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을 접하지 못했다면 그의 갈등은 더욱 깊어갔으리라. 그의 마음을 다잡아준 구절이 이와 같았다. “직업이란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다. 직업에는 인습에 짓눌려 개인적인 견해는 발붙일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고독은 그런 속에서도 당신에게는 의지와 고향이 될 것이며 그 고독으로 해서 당신은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그날 밤, 그는 일기장에 “서두르지 말자, 서두르지 말자”라고 썼다. 그리고 가능한 한 삶의 길을 천천히 걷기 위해 온몸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길 위에 고통이 있고 외롭고 쓸쓸한 날들이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부드러운 직선’이라 부른다. 쪽빛 하늘 아래 추녀, 뒷산 능선의 부드러운 선,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 추녀…. 이들 모두는 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곧은 나무의 직선이 모여 이뤄내는 가장 부드러운 자태를 꿈꾸는 것. 그의 가치관이고 시의 근본이었다. 흙바람에 시달리고 견디면서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그 역시 나무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연을 사람처럼, 사람을 나무처럼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자연과 삶을 일치시키는 인생을 살아가기로 했다. 그런 넓은 가슴이라야만 나무처럼 부드러운 직선으로 휘어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모습은 그의 시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86년 이후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접시꽃 당신>을 비롯해 <고두미 마을에서>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등 시집은 이별, 슬픔, 아픔조차 빛나는 절창으로 뽑아내는 시인의 저력을 보여준다. 그의 정서가 강한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직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휘어지는 데 멈추지 않고 함께 조화를 이루는 곡선이 되자는 정서. 그 근저에는 신산한 삶을 견디면서 더욱 두터워지고 따뜻해진 진솔한 마음이 깔려있다.
당신의 무덤가에 패랭이꽃 두고 오면당신은 구름으로 시루봉 넘어 날 따라오고당신의 무덤 앞에 소지 한 장 올리고 오면당신은 초저녁별을 들고 내 뒤를 따라오고당신의 무덤가에 노래 한줄 남기고 오면당신은 풀벌레 울음으로 문간까지 따라오고당신의 무덤 위에 눈물 한 올 던지고 오면당신은 빗줄기 되어 속살에 젖어오네.(‘당신의 무덤가에’ 전문)
아내를 묻은 남편은 다시 가슴에 그 사랑을 묻는다. 혼자 걷는 길 위에 내리는 빗줄기가 절절한 사랑과 교감하며, 당신을 향해 젖어가는 것이 곧 나의 길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접시꽃 당신>에 실린 이와 같은 사부곡들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의 시가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보편적 정서인 한을 ‘서민의 건강함’으로 극복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와의 사별이라는 충격에 더해져 전교조 문제가 불거졌다. 타의로 교단을 떠나야 했고 그후 10년을 길거리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교조 활동과 지역문화운동을 묶어내며 보냈던 10년은 그에게 세상을 더 크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어주었다. 드디어 복직하던 날. 교복 입은 여중생들이 거수경례를 붙이며 “충성” 하는 모습 앞에 그는 목이 메었다. “애들아, 인사 다시 하자. ‘안녕하세요’라고….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이 걸렸구나. 정말 오고 싶었다.”
복직교사의 아름답고 신선한 일성(一聲). 돌아온 그는 ‘신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대로 학교를 잘 꾸려나가고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충북 진천군 덕산면 덕산중학교는 EBS 주최 제1회 신나는 학교상을 받고 지난 연말 TV에 다큐멘터리로 방영됐을 정도로 ‘열린 학교’의 모범이다. 너무나 순박해 연출해서 찍는 장면마다 방송팀이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이 학교 아이들은 요즘 애들 특유의 되바라짐이나 영악함이 없다. 그는 이곳에서 시를 쓰고 가르치며 학생들의 등불이 되고 싶어한다.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아니라,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아니라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의 징검다리, 길을 묻는 아이들의 지팡이, 헐벗은 아이들을 싸안은 옷 한 자락, 푸른 보리밭 같은 아이들 가슴에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는 지금 예비된 고난을 넘어 참된 선생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푸른 아이들의 꿈길을 열며, 이 시대의 한복판을 나지막이 흘러가는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다. 작고 낮은 가슴의 강물이 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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