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세상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많은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조용히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요란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는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던 순천대 법학과 김성순 명예교수(65). 하지만 막상 연구실로 찾아간 기자에게 이것저것 자상하게 들려주는 모습은 역시 평생을 교단에서 살아온 이다웠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교수는 전남 순천시 저전동 성당의 연도회장이다. 그는 10년전부터 지금까지 성당 교우를 비롯해 생활보호대상자, 무연고자 등 3백여명의 시신을 씻겨왔다. 누구나 꺼리는 장례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속된 물음에 김교수는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 아니냐”며 “하늘이 제게 주신 보속(補贖)의 과제라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하려 한다”고 조용히 대답했다.
시신 돌보는 손길에 전문 장의사들도 혀를 내둘러
김교수가 망자들의 몸을 씻기는 일을 시작한 것은 지난 92년. 순천 저전동 성당 사목회장으로 활동할 때였다.
“자매 교우가 돌아가셨는데 성당의 전문 장례봉사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입관예절을 맡을 이가 없었습니다. 사목회장으로 상가에 들렀다가 유족들의 딱한 요청에 그만 엉겁결에 염을 하게 되었지요.”
집안 어른들이 돌아가실 때 입관하는 모습을 지켜보긴 했지만 막상 직접 하려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어떻게 시신을 씻겨 수의를 입히고 입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게다가 망자가 여성이라는 점도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다급했던 상황인지라 김교수는 용기를 냈다. 마을 노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수건으로 시신의 위아래를 가리고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망자가 숨을 거두면서 내놓은 배설물로 지독한 악취가 났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지요. 수의를 입히는데, 너무나 서툴러서 유족들에게 죄송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그때가 초겨울이었는데도 온몸에 비오듯 땀이 흐르더군요.”
간신히 염습을 끝내고 관속에 시신을 눕히자 유족들의 오열이 터지기 시작했다. 김교수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고 했다.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일을 너무 서투르게 해서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이 일은 하늘이 제게 내려주신 과제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후부터 3년 동안 초상이 날 때마다 성당의 전문 장례봉사자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지요.”
서툴렀던 손길도 날로 익숙해졌다. 마스크도 하지 않은 채 지극정성으로 시신을 모시는 그의 염습은 이제는 전문 장의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나이든 분은 제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어린 사람들은 제 형제와 누이라 여기고 그저 마지막 떠나는 길 깨끗하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심껏 몸을 씻길 뿐입니다.”
그렇게 10여년 세월 동안 그는 2백76명의 주검을 씻겨왔다. 조수로 일을 배우며 씻긴 망자들까지 합하면 족히 3백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는 성당 교우들뿐만 아니라 신자가 아닌 가난한 생활보호대상자나 무연고자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는 신앙의 가르침을 깊이 새긴 그가 염습요청이 들어오면 천릿길을 마다않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법. 김교수는 그동안 장례봉사 활동을 하면서 소설에나 나옴직한 일도 많이 겪었다고 말했다.
“모친상을 당해 미국에서 늦게 달려온 외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보겠다고 매달려 장지로 가는 도중에 관을 열어야 했죠. 그때 눈물의 모자상봉은 오래도록 제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더군요. 또 장례식장에서 이복형제가 부친의 장례비 지급을 서로 미루는 바람에, 보다 못해 직접 보증을 선 뒤 장례를 치른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요.”
전업 장의사 이상으로 장례에 관한 절차를 훤히 꿰뚫고 있는 그이다 보니 주변에서도 장례절차에 대한 크고 작은 조언을 그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한 집안에서 종교 갈등 때문에 장례방식을 두고 다툼이 벌어지거나, 장례비용 등의 문제로 유족과 장례식장 사이에 분쟁이 생기거나 할 땐 그가 직접 나서서 조정을 한다. 전공이 법학이다 보니 그의 조정으로 대부분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하지만 때로 망자가 직접 김교수에게 유언으로 부탁한 장례약속을 유족들의 고집으로 지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을 겪기도 했다고.
“고인은 화장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유족들이 울며 매달려 절대로 안된다고 하거나, 고인은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유족들의 고집으로 선산에 관을 안치하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어요.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유족들 뜻을 따르는 경우가 많아요.”
장례문화와 관련해 그는 특별히 흥미로운 조언을 하나 해주었다. 다름 아닌 염습과 입관 과정에서 망인의 자손들이 시신의 관속에 넣어주는 금붙이나 노잣돈 봉투에 관한 것.
“돈 많은 유족들의 경우 고인 생전에 못 다한 효도를 아쉬워 하면서 노잣돈을 많이 넣으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그건 도리어 묘지 도굴꾼들을 부르는 격이죠. 부모 죽은 다음에 노잣돈이 무엇입니까. 살아 생전에 한번이라도 더 찾아뵙도록 하세요.”
김교수는 그런 후손들을 대하면 앞뒤 사정을 설명해주면서 차라리 그 돈을 고인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주도록 권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유족들은 그의 말을 따른다고.
나누고 베푸는 일에 김교수는 늘 앞장선다. 지난 97년 김교수는 1천7백만원이라는 큰돈을 성당에 내놓았다. 그동안 장례봉사를 할 때마다 유족들이 건네준 수고비를 모은 것이었다.
“그냥 써버리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보람된 일에 쓰겠다고 맘먹고 그냥 모아뒀지요.”
성당에서는 그가 내놓은 돈으로 ‘소화 데레사상’을 제정해 매년 한번씩 효심 깊은 이를 선정해 1백만원의 상금을 주고 있다. 그는 지금도 장례봉사를 하고 받는 수고비는 꼬박꼬박 적립하고 있다. 현재 적립금은 총 3천1백만원에 달한다.
이런 장례봉사와 더불어 김교수는 성당의 60세 이상 노인 교우들과 함께 ‘요셉회’를 결성해 뜻깊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헌 옷과 신문 등 재활용품을 모아 그 수익으로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있는 것.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하는 선행은 큰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 생각을 같이한 회원들이 작은 일이라도 직접 해보자고 의기투합, 불우이웃 돕기를 시작하게 되었죠.”
50여명의 요셉회 회원들은 손수 손수레를 끌면서 동네를 다니며 재활용품을 수집, 판매한다. 생각보다 금액은 상당하다고. 성당교우 중 한 사람이 고맙게도 트럭까지 내줘, 이들의 폐품수집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렇게 3년여 동안 매년 6백만∼1천만원의 돈을 벌어 전액을 불우이웃들에게 전달했다. 김교수는 “금년에는 대략 9백만여원의 돈이 모일 것으로 예상돼요. 어림잡아 30만원씩 잡아도 30명에게 나눠줄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밝은 표정이었다. 김교수의 연구실에는 동료 교수들이 가져다준 신문뭉치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언제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지요. 전 장례봉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관 뚜껑을 덮을 때마다 언젠가 저도 이렇게 될 때가 오리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떠올립니다. “
그래서일까. 김교수는 자동차도 없이, 그 흔한 휴대전화조차 없이 살고 있다. 지난 8월말 정년퇴임을 하면서도 주위에서 권하는 떠들썩한 퇴임식을 조용히 사양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하라’는 지론대로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도 극구 피해왔다.
정년퇴임 뒤 가끔씩 나가는 대학원 강의 말고는 성당 장례봉사 일에 전념하며 여생을 조용히 살고 싶다는 김성순 교수. 그의 수첩에는 할머니 다섯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생활보호대상자들로 김교수 손을 붙잡고 뒷날 자신들이 죽으면 꼭 김교수 손으로 염습을 해달라고 예약한 이들이라고 한다.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던 순천대 법학과 김성순 명예교수(65). 하지만 막상 연구실로 찾아간 기자에게 이것저것 자상하게 들려주는 모습은 역시 평생을 교단에서 살아온 이다웠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교수는 전남 순천시 저전동 성당의 연도회장이다. 그는 10년전부터 지금까지 성당 교우를 비롯해 생활보호대상자, 무연고자 등 3백여명의 시신을 씻겨왔다. 누구나 꺼리는 장례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속된 물음에 김교수는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 아니냐”며 “하늘이 제게 주신 보속(補贖)의 과제라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하려 한다”고 조용히 대답했다.
시신 돌보는 손길에 전문 장의사들도 혀를 내둘러
김교수가 망자들의 몸을 씻기는 일을 시작한 것은 지난 92년. 순천 저전동 성당 사목회장으로 활동할 때였다.
“자매 교우가 돌아가셨는데 성당의 전문 장례봉사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입관예절을 맡을 이가 없었습니다. 사목회장으로 상가에 들렀다가 유족들의 딱한 요청에 그만 엉겁결에 염을 하게 되었지요.”
집안 어른들이 돌아가실 때 입관하는 모습을 지켜보긴 했지만 막상 직접 하려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어떻게 시신을 씻겨 수의를 입히고 입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게다가 망자가 여성이라는 점도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다급했던 상황인지라 김교수는 용기를 냈다. 마을 노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수건으로 시신의 위아래를 가리고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망자가 숨을 거두면서 내놓은 배설물로 지독한 악취가 났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지요. 수의를 입히는데, 너무나 서툴러서 유족들에게 죄송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그때가 초겨울이었는데도 온몸에 비오듯 땀이 흐르더군요.”
간신히 염습을 끝내고 관속에 시신을 눕히자 유족들의 오열이 터지기 시작했다. 김교수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고 했다.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일을 너무 서투르게 해서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이 일은 하늘이 제게 내려주신 과제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후부터 3년 동안 초상이 날 때마다 성당의 전문 장례봉사자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지요.”
서툴렀던 손길도 날로 익숙해졌다. 마스크도 하지 않은 채 지극정성으로 시신을 모시는 그의 염습은 이제는 전문 장의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나이든 분은 제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어린 사람들은 제 형제와 누이라 여기고 그저 마지막 떠나는 길 깨끗하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심껏 몸을 씻길 뿐입니다.”
그렇게 10여년 세월 동안 그는 2백76명의 주검을 씻겨왔다. 조수로 일을 배우며 씻긴 망자들까지 합하면 족히 3백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는 성당 교우들뿐만 아니라 신자가 아닌 가난한 생활보호대상자나 무연고자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는 신앙의 가르침을 깊이 새긴 그가 염습요청이 들어오면 천릿길을 마다않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법. 김교수는 그동안 장례봉사 활동을 하면서 소설에나 나옴직한 일도 많이 겪었다고 말했다.
“모친상을 당해 미국에서 늦게 달려온 외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보겠다고 매달려 장지로 가는 도중에 관을 열어야 했죠. 그때 눈물의 모자상봉은 오래도록 제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더군요. 또 장례식장에서 이복형제가 부친의 장례비 지급을 서로 미루는 바람에, 보다 못해 직접 보증을 선 뒤 장례를 치른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요.”
전업 장의사 이상으로 장례에 관한 절차를 훤히 꿰뚫고 있는 그이다 보니 주변에서도 장례절차에 대한 크고 작은 조언을 그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한 집안에서 종교 갈등 때문에 장례방식을 두고 다툼이 벌어지거나, 장례비용 등의 문제로 유족과 장례식장 사이에 분쟁이 생기거나 할 땐 그가 직접 나서서 조정을 한다. 전공이 법학이다 보니 그의 조정으로 대부분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하지만 때로 망자가 직접 김교수에게 유언으로 부탁한 장례약속을 유족들의 고집으로 지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을 겪기도 했다고.
“고인은 화장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유족들이 울며 매달려 절대로 안된다고 하거나, 고인은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유족들의 고집으로 선산에 관을 안치하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어요.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유족들 뜻을 따르는 경우가 많아요.”
장례문화와 관련해 그는 특별히 흥미로운 조언을 하나 해주었다. 다름 아닌 염습과 입관 과정에서 망인의 자손들이 시신의 관속에 넣어주는 금붙이나 노잣돈 봉투에 관한 것.
김성순 교수는 10년 동안 시신을 돌보면서 전업 장의사 못지않게 장례절차에 환해졌다고.
김교수는 그런 후손들을 대하면 앞뒤 사정을 설명해주면서 차라리 그 돈을 고인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주도록 권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유족들은 그의 말을 따른다고.
나누고 베푸는 일에 김교수는 늘 앞장선다. 지난 97년 김교수는 1천7백만원이라는 큰돈을 성당에 내놓았다. 그동안 장례봉사를 할 때마다 유족들이 건네준 수고비를 모은 것이었다.
“그냥 써버리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보람된 일에 쓰겠다고 맘먹고 그냥 모아뒀지요.”
성당에서는 그가 내놓은 돈으로 ‘소화 데레사상’을 제정해 매년 한번씩 효심 깊은 이를 선정해 1백만원의 상금을 주고 있다. 그는 지금도 장례봉사를 하고 받는 수고비는 꼬박꼬박 적립하고 있다. 현재 적립금은 총 3천1백만원에 달한다.
이런 장례봉사와 더불어 김교수는 성당의 60세 이상 노인 교우들과 함께 ‘요셉회’를 결성해 뜻깊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헌 옷과 신문 등 재활용품을 모아 그 수익으로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있는 것.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하는 선행은 큰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 생각을 같이한 회원들이 작은 일이라도 직접 해보자고 의기투합, 불우이웃 돕기를 시작하게 되었죠.”
50여명의 요셉회 회원들은 손수 손수레를 끌면서 동네를 다니며 재활용품을 수집, 판매한다. 생각보다 금액은 상당하다고. 성당교우 중 한 사람이 고맙게도 트럭까지 내줘, 이들의 폐품수집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렇게 3년여 동안 매년 6백만∼1천만원의 돈을 벌어 전액을 불우이웃들에게 전달했다. 김교수는 “금년에는 대략 9백만여원의 돈이 모일 것으로 예상돼요. 어림잡아 30만원씩 잡아도 30명에게 나눠줄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밝은 표정이었다. 김교수의 연구실에는 동료 교수들이 가져다준 신문뭉치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언제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지요. 전 장례봉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관 뚜껑을 덮을 때마다 언젠가 저도 이렇게 될 때가 오리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떠올립니다. “
그래서일까. 김교수는 자동차도 없이, 그 흔한 휴대전화조차 없이 살고 있다. 지난 8월말 정년퇴임을 하면서도 주위에서 권하는 떠들썩한 퇴임식을 조용히 사양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하라’는 지론대로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도 극구 피해왔다.
정년퇴임 뒤 가끔씩 나가는 대학원 강의 말고는 성당 장례봉사 일에 전념하며 여생을 조용히 살고 싶다는 김성순 교수. 그의 수첩에는 할머니 다섯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생활보호대상자들로 김교수 손을 붙잡고 뒷날 자신들이 죽으면 꼭 김교수 손으로 염습을 해달라고 예약한 이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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